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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대간이나 정맥 등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몰랐던 시절에는 보통 눙선종주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선 종주는 보통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을 중심으로 행해졌었죠.
대표적인 것이 지리의 동서남북 종주나 설악의 공룡능선, 화채능선 그리고 서북능선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1980년 이우형 선생에 의해 산경표가 발견된 이래 백두대간 진행을 필두로 정맥 산행도 일반화 되었고 나아가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가 발표된 이후에는 지맥산행까지 매니아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 분위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현재는 '산으로' 박흥섭의 '대한산경표'로 산줄기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곧 산림청에 의해 '공식화된 우리나라 산줄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산줄기 산행이 산경표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간단한 산과 산의 이름인 '능선종주'의 운행 행태는 여전히 지역 산꾼들에 의해 사랑받고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시간상 그렇고 ...
일단 서울 부근만 살펴본다면 가장 전통적인 코스는 역시 '5산종주'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이른바 '불수사도북(산)'으로 불리는 서울 시계市界종주코스입니다.
불암산 ~ 수락산 ~ 사패산 ~ 도봉산 ~ 삼각산 등 5개의 봉우리를 잇는 코스라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죠.
그런데 이 5산종주를 하고 난 꾼들은 다음 산행지로 눈을 한강 이남으로 돌립니다.
그러고는 교통의 편의 그리고 산다운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춘 수원의 진산 광교산을 주목합니다.
그 다음 서울을 향해 금을 긋습니다.
우선 직선으로 그으니 만만하게 마무리 될 만한 곳에 청계산이 있습니다.
좀 짧은가요?
청계산을 우측으로 돌아 옛골로 떨어진 다음 옆에 있는 산으로 이어보니 인능산 ~ 구룡산으로 연결됩니다.
한 번 더?
평평한 도로를 따라 우면산까지 이어 사당동으로 떨어지는 코스.
하나 더?
우면산에서 남태령으로 가서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특공대 같이 움직여 관악산 ~ 삼성산 까지 가는 코스.
아예 삼성산에서 이른바 호압산로 진행하여 관악산생태공원을 거쳐 독산고등학교 정문에서 마무리하는 코스 등 .....
엿장수 마음대로 입니다.
그러니 이들 코스의 이름도 강남5산이니 7산 그리고 9산 등 제각각이며 들머리나 날머리도 진행하는 이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늘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코스 중 수원의 광교산과 청계산을 잇는 코스 만큼은 '청광' 혹은 '광청'이라하여 어엿하게 제 이름을 가진 능선으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이 이름으로 종주산행을 즐기고 있다는 말이겠죠.
이들은 다 교통 편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전철로 양재역으로 이동 후 마을버스 편으로 양곡터미널로 이동한다거나 혹은 청계산 역으로 가서 오르면 된다는.....
그런데 하는 이에 따라 과천청사역에서 매봉으로 올라 이수봉으로 접속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아예 저같은 경우에는 석수역에서 호압산 ~ 삼성산 ~ 관악산 ~ 청사역 ~ 매봉 ~ 이수봉에서 청광종주 루트에 접속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기본 23km에 14km 정도가 더해져 약 37km에 달하는 아주 길쭉한 코스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약 14시간 정도가 소요되기는 하겠지만 중간 과천에서 식사나 물을 보충할 수 있으니 종주산행을 효율적이면서도 탄력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들 제조건을 고려하여 석수역에서 버스를 타고 인덕원역으로 이동하여 인덕원 ~ 청사역으로 전철로 이동 청사역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매봉 ~ 이수봉 ~ 바라봉 ~ 광교산으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중간중간 반대방향에서 오는 지인들을 분명히 만날 수도 있겠거니와 든든한 이한검 대장님이 백운산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지도 #1
05:06
집을 나섭니다.
시간이 이른 고로 마을 버스가 없으니 걸어서 석수역으로 나갑니다.
안양천을 건너....
안양천은 안양지맥을 거느리고 있는 물줄기이죠?
오늘 구간 중 백운산 ~ 국사봉이 이에 해당됩니다.
즉 한남정맥의 백운산에서 가지를 쳐 국사봉 ~ 관악산을 지나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34.3km의 산줄기입니다.
오늘 그 지맥을 일부구간 지나니 만큼 그걸 인식하면서 건넙니다.
05:42
그 시간 즈음의 석수역 버스정류장 분위기.....
제가 이용할 버스는 17분 후에나 도착을 한다고 ITS는 이야기 해주고 있고...
시간이 충분한 만큼 석수역으로 가서 가볍게 산행준비도 하고....
인덕원역에서 전철로 갈아타고는,
06:34
청사역 2번 출구로 나갑니다.
길 건너 9번 출구 뒤로 관악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텅 빈 도로를 따라 단지 안으로 들어섭니다.
별양 어린이집 좌측 토끼굴로 나가서는 우틀,
06:51
갈빗집 방향으로 좌틀합니다.
이정표를 따르고....
06:53
본격적으로 산으로 듭니다.
매봉이라고도 불리는 응봉369.2m.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응봉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응봉鷹峰.
한자를 한글로 풀어놓은 말입니다.
매鷹이니 곧 수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봉우리의 이름은 우리 옛말 높다는 뜻의 수리봉이었다는 얘기죠?
백수리산과 수리봉
부항령을 지나 만나는 첫 봉우리인 백수리산은 967.3봉을 통하여 오리지널 능선으로 진행하는 루트와 사면치기를 통하는 루트 등 두 길로 갈린다. 등로는 역시 뚜렷하여 길을 잘못들을 염려는 전혀 없다.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백수리산은 이 부근 특유의 서체로 된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 이름은 그냥 지어진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 의미가 있는 이름들이다. 백두산의 백(白)에 대해서 이미 얘기했다.
백(白)은 ‘하얗다’는 의미보다는 육당의 논지에 따라 ‘ᄇᆞᆰ’사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ᄇᆞᆰ’은 神, 天, 하느님, 광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산 이름 중 ‘국사봉’ 다음으로 많은 산 이름을 가진 '수리봉'의 ‘수리’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이 단어는 원래 고구려 말로 ‘제일 높은 곳’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주변 산들보다 높은 산을 수리봉이라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백수리봉은 주변 산들에 비해 유별나게 ‘높고 신성한 산’이라고 보면 된다.
“진짜 이 백수리산에서 석기봉이나 삼도봉 쪽, 수도산 쪽 그리고 덕유산 쪽 등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네.”
우리 선조들이 괜히 이름을 막 지어놓은 게 아니다. 아름다운 주위 풍광을 보면서 걷노라면 갑자기 나무 데크가 길게 나온다.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 이해한다. 해인리로 빠지는 우측으로 ‘산삼약수터’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비알을 치고 올라간다. 삼거리가 나오고 3도의 화합을 기원하는 조형물인 삼도봉비가 있는 삼도봉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54쪽
봉우리 두 개를 넘어 도착하는 만월봉1280.4m에서 삼각점(연곡434)을 확인하고 큰 등산안내도도 본다. 인상적인 주목 한 그루를 보고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 1등급 대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응복산1360.0m이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174개의 1등급삼각점 중 이게 그 하나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중에는 鷹伏山의 응이 매鷹자여서 매복산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매가 웅크린 형상이란 말인가?
이미 ‘수리’는 ‘높은 곳’ 또는 ‘맨 꼭대기’를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고 여기서 파생된 말이 ‘사라’, ‘사리’, ‘설’, ‘솔’, ‘시루’, ‘수’, ‘싸리’, ‘수락’ 등 여러 가지 형태라는 건 이미 봤다. 당연히 높은 곳을 나는 새(鳥) ‘수리’나 ‘독수리’도 여기서 나온 이름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이 수리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취(鷲)자를 쓰는 건 사실 시간 문제였다. 영취산(靈鷲山), 취성산(鷲城山)이 그 가장 비근한 예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매’이다. 그리고 그 매의 한자인 응(鷹)이 응봉(鷹峰)이 된다거나 매봉이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 이런 이름의 산을 볼 때에는 주위 산보다 높은 곳을 일컬음이니 비약하여 ‘수리 모양’, ‘매가 많이 사는 곳’ 등의 얼토당토않은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응복산도 응봉산의 잘못된 표기이리라.
같은 취지로 위의 매복산도 매봉산 혹은 매봉의 오기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65쪽
길이 갈리는 곳마다 친절하게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야자매트도 깔려 있어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여 주기도 하지만 발도 푹신푹신 편하게 해줍니다.
지리산에서의 이 작업의 시작은 만복대 부근 아니었나요?
지리가 그립습니다.
07:28
땀 좀 흘립니다.
그러니 이내 응봉인 매봉입니다.
산경학을 놓고 따지면 여기서 안양지맥에 접속합니다.
그 산줄기가 지나는 과천 시가지 건너 관악산을 조망합니다.
안양(관악)지맥 길을 눈으로 훑어보고.....
고압선 전선이 눈에 거슬리는군요.
남태령 우측으로 우면산.
9산 할 때 걸었던 길이죠.
그 뒤로 삼각산과 도봉산 라인....
다시 그 우측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에 이어 용마산과 아차산까지.....
수락산 ~ 불암산 ~ 용마산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곧 중랑천을 끼고 있는 중랑지맥.
저 도봉산은 좌틀하여 노고산으로 가는 한북정맥이고....
매봉의 데크를 내려오자마자 길은 두 갈레로 갈립니다.
청계산 방향으로 직진하는 길과 우틀하여 청사역으로 가는 길
그 청사역으로 가는 길이 곧 349.4봉으로 진행하여 물을 건넘이 없이 관악산으로 진행할 수 있는 안양지맥 길이기도 합니다.
갈현동 청사 옆으로 교묘하게 물을 만나지 않고 오르는 지맥길은 말그대로 안양지맥의 하이라이트 구간입니다.
그만큼 길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의왕시를 만난 오늘 진행하는 루트는 여기서 직진을 하면서 의왕시와 과천시의 시계市界를 따라 걷게 됩니다.
의앙시에서는 친절하게 정교한 지도로 안내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왕대간'이라는 글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군요.
이 세상에 대간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즉 백두대간에만 써야 하는 고로 '대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간 = 백두대간이라는 것이죠.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 졸저 전게서 162쪽
즉 간幹은 줄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기본 산줄기인 백두대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나 물줄기는 여기서 비롯된 가지줄기 곧 맥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맥이니 기맥, 지맥, 단맥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맥脈'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이는 독자적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늘 물줄기와 관련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이기도 합니다.
즉 합수점형 혹은 울타리형, 산줄기형 등 세 가지 요건 중 적어도 어느 한 가지에 부합할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죠.
대간이라는 개념은 그저 아무데나 붙여 어느 정도 '폼나게' 사용하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의왕시 공원과에서 누군가가 의왕대간이라고 붙여놓고는 "음...그럴 듯하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산경표를 무시한 아주 '무식한 산림행정의 한 단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백번을 양보하여 대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다면 의왕대간 구간은 정확하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입니까?
07:55
지도 #1의 '가'의 곳에 있는 헬기장을 지납니다.
모여서 밥먹기 딱 좋은 곳.....
이수봉을 따르고....
관악산....
08:04
청계사에서 올라오는 길인 이른바 절고개를 지납니다.
지도 #2
세 개 정도의 삼각점 같은 것을 봅니다만 삼각점은 아니죠.
방위 표시도 확실치 않고....
08:15
지도 #2의 '나'의 곳입니다.
여기서도 우틀하면 청계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죠?
여기서 이수봉은 정규 등로 대신 우측으로 크게 우회하여 소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커다란 바위도 만나고....
08:33
그러고는 헬기장을 만나고....
여기서 성남시를 만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청광종주 라인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 얘기는 곧 이제부터는 과천시를 버리고 의왕시와 성남시의 시계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의왕대간'이라는 이름보다는 '성남누비길'이라는 이름이 훨씬 쉽게 다가오고 또 맞습니다.
우측으로 조금 이따 만나게 될 국사봉이 보이고 그리고 그 뒤로 백운산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는 한남정맥 길도 보입니다.
08:40
그러고는 이정목과,
정상석이 있는 이수봉입니다.
사실 이 봉우리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이름은 물론 표고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그저 작은 봉우리에 불과했었습니다.
그것을 2000년 12월 성남 상적동 주민들이 이 정상석을 세우면서 이수봉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지리 3인의 은자隱者 일두 정여창 선생 까지 동원을 하였습니다.
지리 3인의 은자라 하면 고려시대의 한유한과 조선시대의 정여창, 조지서 아닙니까?
삽암과 모한대와 취적대
입석나루로 내려서는 일은 쉽지 않다. 바위 즉 삽암 앞에는 대숲이 우거져 접근할 길도 없어 대숲 사이 비탈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더라도 잡목 때문에 비석 주위를 온전하게 보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럽게 바위 윗면을 살펴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좌측에 松南송남 李世立이세립이라는 글자도 보이는데 이는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새겼다 한다.
<사진 3〉 삽암의 이세립이 각자한 모한대. 모한대 상단에 取適臺라는 글자가 희미하다.
지리 3인의 은자라 하면
사실 이 ‘한유한(생몰년生沒年 미상)’을 밖으로 나오게 만든 건 순전히 남명 조식 선생의 공로이다. 즉 남명은 1558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서는 산행기 형식으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쓰면서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龍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揷巖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정여창과 조지서는 갑자사화 때 각각 부관참시와 참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임금의 부름에 불응하였던 한유한은 관직을 피하여 더 깊숙한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술 한 잔에 그 아픔을 달래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남명의 탄식 속에 다 들어 있는 듯하다.
絲綸入洞踰垣走 사륜입동유원주 임금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方丈千秋獨一仙 방장천추독일선 방장산에는 천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한유한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문인 박민(朴敏, 1566~1630)의 시이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남부 지리를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
1744년 황도익은 ‘두류산유행록’에서 “또한 녹사대錄事臺가 있으니 한유한韓惟漢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사람은 떠나가고 축대만 덩그렇게 남았는데, 강물은 변함없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한유한의 맑은 풍모를 상상하자 감회가 절로 일어났다. 바위 벼랑에 새겨진 취적대取適臺 세 글자는 자획이 거의 마모되어 있었다.”
한유한은 누구인가? 위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한유한은 고려 무신집권기 당시 도교, 신선 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최충헌이 전횡을 휘두르자 난리가 날 것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은거하고는 세속과 연을 끊었다. 조정에서는 서비대원 녹사의 직을 주면서 회유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은거하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선인의 계보를 정리한 ‘청학집’에는 한유한을 고려 때의 ‘선파仙派’ 가운데 한명으로 분류했다.
이 모한대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비 중 좌측에 있는 비는 진주사람 권도용(1877~1963)의 작품이다. 이 비에는 “사대부 노태현 등 30여명이 선인들의 훌륭한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년 춘삼월과 구월에 모여 시를 읊으며 옛 사람의 유풍을 추모하고자 계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차 비를 세워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도 그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번에 남쪽으로 섬진강 따라 유람하다가 이 대臺 앞에 이르러 근처에 이세립 공이 바위 벽면에 모한대 세 글자를 크게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사적을 기록한 비碑는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앙모의 정을 금할 수 없어 애오라지 몇 마디 소감을 적고 돌아간다.”고 적혀 있다.
김선신은 두류전지에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간다. “한유한이 피신한 곳은 ‘깊은 골짜기’인 묵계동인데 그는 이곳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곳의 고은高隱, 독재獨在라는 지명이 이런 이유로 얻은 게 아닐까?”라고 하였다.
한유한, 정여창 그리고 조지서……
한편 이 비에 적힌 중요한 사실史實로는 남명선생이 한유한을 정여창(1450 ~1504), 조지서(1454 ~1504)와 더불어 세 군자라 칭송하였다는 말과 다만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번의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 되는 욕을 보았고 조지서 역시 갑자사화를 비껴나가지 못했지만 한유한은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는 멀리 떠나 물 깊고 산 높고 험한 곳으로 자취를 감춰 하늘이 준 수명을 마쳤으니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계속하여 남명의 유두류록은 일두 정여창이 기거하던 집까지 거론한다.
“도탄에서 1리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천령 출신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주신 분이다.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뒤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향토사학자들은 도탄을 지금의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한다고 한다. 진양지에는 화개에서 서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였으니 덕은德隱 부근 어디쯤 될 것 같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화개면 덕은리에 일두를 추모하는 ‘악양정岳陽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이곳이 일두가 살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할 뿐이다.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일두는 처자식을 이끌고 아예 지리산 악양으로 다시 들어와 18년간 은둔하며 학문을 강론했다는 곳이다. 이 건물은 15세기 말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두어 차례 중건을 거쳐 1920년에 3칸이던 건물을 4칸으로 덧붙여지었고 1994년에 보수하였다.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으며,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며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왕도정치를 추구했던 일두는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조선조 동방 5현과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제향祭享 되고 있다. 이곳을 찾은 남명은 “현명한 사람哲人의 다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한유한의 은거 생활과 일두의 안타까운 죽음을 탄식했었다.
그 악양정 돌담을 따라 거닐며 남명선생이 지리산 산행 중 만난 일두 선생의 흔적을 통해 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한편 일두 선생을 기리는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사액서원이며 대원군 사원 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유서 갚은 곳이다. 일두의 생가도 함양에 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승안산에 선생의 묘도 있고 남계서원까지 있으니 사실 선생을 보려면 함양으로 가야 할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61쪽
이 정상석에 의하면 일두는 두 번의 위기를 넘겼다 하여 二壽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일두가 은거를 한 곳은 이곳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리산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는 결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피하지 못해 결국 부관참시 당하는 욕을 보았으니....
믿음이 안 가는 지명 유래를 뒤로 하고 자리를 뜹니다.
08:49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또 하나의 청계사 갈림길을 지납니다.
직진하여,
우측 샛길로 올라,
국사봉으로 오룹니다.
멋진 정상석.
근데 이 봉우리의 이름인 국사봉에 대해서 의문이 있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이 봉우리의 이름을 國思峰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의왕시에서는 여말 조윤을 불러들여 그가 멸망한 고려를 생각하던 곳이라는 허무맹랑한 유래를 만들어 냅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차 오류를 의왕시에서는 우리 한국식 어법에 따라 2차 오류를 저지른 것이죠.
즉 국사가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말이야 그 어순이 주어 + 목적어 + 서술어이겠지만 영어나 중국어는 주어 + 동사 + 목적어의 어순 아닙니까?
그렇다면 思國峰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산이름은 이렇게 막 지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산이름은 거의 '불교지명설'과 '산악숭배사상' 두 가지만 놓고 보면 됩니다.
물론 산을 신령스럽게 바라보고 살았으니 산악숭배사상이 제 1이고 그 다음에 불교가 들어왔으니 불교지명설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니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이니 당연히 이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國師'로 표기하여야 하고 이럴 때의 國師는 불교의 승계가 아닌 그 고장을 지켜주는 봉우리의 신이 살고 있는 넓게는 단군이 될 것이며 좁게는 그 봉우리의 산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곳곳에 이 국사봉이라는 봉우리가 널려 있는 것이고 그래서 산림청 등재 제1위의 산이름이 바로 이 국사봉인 것입니다.
참고로 제2위의 봉우리 이름은 수리봉이죠.
이 역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 국사봉에서 관악산을 조망합니다.'
바로 아래 송전탑 봉우리가 조금 전 지나온 응봉이고...
응봉 = 매봉 = 수리봉.
수락산이니 설악산, 속리산, 영취산도 다 이 수리봉에서 온 이름임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청계 TG.
좌측 맨 뒤가 백운산.
청계 TG 뒤로 모락산385.8m.
그리고 그 우측 뒤로 수리산469.3m과 수암봉397.9m이 보이는군요.
응봉과 관악산.
하오고개 넘어 367.1봉에서 이어지는 바라산과 그 뒤의 백운산과 한남정맥.
지도 #3
09:36
하오고개 쉼터를 지나,
09:53
'하오고개 갈림길에 들어서는데 앞에 누군가 낯익은 분이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지맥 130개를 마치고 이제 마지막 정맥을 정리 중인 수원 산꾼 '사르리' 신경호님 아닙니까?
사르리 님은 오늘 일찍 영통집을 나와 양곡터미널로 이동을 하여 오리지널 청광종주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저와 거의 같은 시간에 출발한 것을 보니 청광종주 길이 제가 걸은 길보다 1km 정도 더 먼 길임을 감안해 보면 역시 사르리 님답게 빨리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함께 걷습니다.
안양공동묘지를 지나,
10:07
하오고개 위에 설치한 다리를 건넙니다.
하오고개라...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하오개, 하오고개, 화의고개 등으로 불린다, 학현이란 명칭은, 의왕시 청계동 점 말에 있었던, 김해 김 씨 종산( 宗山 )이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며, 인근의 안동 김 씨 묘역도, 학의 혈( 穴 )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진다."고도 하며"사리에 사는 인부들이 염전일을 하던 중 다툼이 일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아로 가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화해를 했다하여 화해고개가 음운변화를 일으켜 하우 - 하오고개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서로 건네는 것 조차 낯 뜨거워지는 얘깁니다.
이 역시 국어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오고개의 경우는 좀 복잡하기는 합니다.
우선 이 어원을 알기 위해서는 이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말 둠/두름'이라는 '주변을 감싸다'는 뜻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두름'이 한자로 표기하기 위하여 두루 >두루미가 되었고 이 두루미의 한자어인 '鶴'이 동원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 이 학고개가 鶴峴이 되었고 이 학현이 시간이 흐르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게 됩니다.
즉 하고개, 하오고개, 아우고개, 와우고개 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 부근에서는 '하오고개'로 정착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참고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학현鶴峴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오고개 육교를 지나자마자 된비알이 시작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열심히 오르면,
10:21
367.2봉의 KBS 무선기지국입니다.
10:28
물 한 모금 마시고 출발하면 이내 367.1봉입니다.
밋밋한 이 봉우리에는 3등급삼각점(수원315)가 매설되어 있고.....
여기서 좌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씩씩하게 걷던 여성분이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군요.
'둥산이야기'팀인데 일행들과 장소 약속이 잘못되어 혼자서 일행들을 찾아나선 것이군요.
목표지점은 백운산 혹은 광교산.
광교산 ~ 청계산 종주인데 일행들을 만나면 다시 빽하신다고.....
좌측은 출입금지.
사유지라는 얘기겠죠.
등로는 너무 부드럽고.....
10:50
424.2봉입니다.
우담산(발화산)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군요.
다른 곳도 아닌 산악회에서 이렇게 무책임하게 막 이름을 지어 붙여놓다니!!!
이러시면 안 되죠.
산이름은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절차를 거쳐 만들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조금 이따 만나게 될 바라산을 보고 '우담바라'를 떠올리고는 바라산에 대응하여 우담산으로 지어 붙인 것 같습니다.
지도 #4
11:10
백운호수 갈림길을 지나,
11:18
오늘 코스의 가장 지루한 구간인 365계단 길입니다.
다행히 요소요소에 24절기를 소개해주는 안내판이 붙어 있어 무료함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해밀대원 세 분을 만납니다.
이 애기 저 얘기...
지리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냐고요?
글쎄 말입니다.
지리에는 비가 온다고 하여....
11:30
그렇게 올라 일단 바라봉 전위봉으로 올라섭니다.
우틀하여,
학의동과 백운저수지가 바라보이는,
11:33
바라산 정상으로 오릅니다.
아!
의왕시와는 왜 이리 사사건건 꼬이는고!
이곳 지명 유래 역시 '바라'에 착안하였고 나아가 바랄 望까지을 동원하여 '개성을 바라보며....'라고 섦명을 합니다.
그럴까요?
이 바라산은 조금 이따 만날 백운산과 함께 얘기해야 쉬워집니다.
백(白)자 이름을 가진 산 이름
정상석 뒷면을 본다. ‘흰구름이 봉우리에 걸리고....’
“형. 이거 아주 웃기는데. 마치 백두산 얘기 같네. 산이 높아 사시사철 정상부가 눈에 덮여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됐다는.”
일반인들도 사실 백운산하면 흰 ‘백(白)’자에 구름 ‘운(雲)’자를 쓰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이해를 하지. 근데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형도 알잖아. 형같이 열렬한 육당 팬인 사람이.”
“ᄇᆞᆰ‘사상 얘기하려는 거야? 좀 들어보자. 사실 불함문화론에 대해서 아직 정리가 잘 안 되서 말이야.”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던 육당은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 작성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21. 10. 18. 가출옥을 한다. 가출옥이란 곧 ‘회유’의 다른 말이었다. 그는 1925년 ‘불함문화론’을 내놓는다. ‘불함’이란 ‘ᄇᆞᆰ’ 즉 광명, 하늘, 신(神), 태양을 뜻하는 말이다. 육당은 단군사상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천신숭배사상 즉 ‘ᄇᆞᆰ사상’이 고대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ᄇᆞᆰ사상의 ‘ᄇᆞᆰ’의 한자어가 바로 ‘백(白)’이라는 논지다.
그러면서 이 ‘백(白)’자 계열의 땅 이름 중 가장 먼저 지목한 곳이 바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인 것이다. 즉 애당초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3,000명의 무리를 데리고 내려온 곳이 바로 태백산(太白山)이고 이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백두산의 원래 이름은 ‘ᄇᆞᆰ뫼’나 혹은 그 비슷한 이름이 한자어가 들어오면서 ‘ᄇᆞᆰ’에 존경 혹은 우두머리의 의미를 내포한 두(頭)를 붙여 백두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거다.
“그래.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은 좀 알아줘야해. 그리고 예로부터 각 부족은 이렇게 자신들 고유의 신격화 된 산 즉 ᄇᆞᆰ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그 부족들이 통폐합 되는 과정에서 이 ‘ᄇᆞᆰ산’ 서열의 높낮이도 결정이 됐고. 그러니 우리나라의 최고 대장인 산은 백두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야. 물론 ‘백’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이 ‘ᄇᆞᆰ’에 해당한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유별나게 ‘백’자 계열의 산이름이 많다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는 거지.”
“맞아. 형. 그리고 그 ‘ᄇᆞᆰ’이 시간이 지나고 또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하게 되었는데 ‘박’, ‘발’, ‘밭’ 등이 그 예잖아. 제천 부근에 있는 박달재의 박달재도 ‘ᄇᆞᆰ(明) + 달(高, 山) + 재(岾)의 조합이라는 것이고.”
“그래. 우리가 이 대간길을 진행하다 보면 박달령이라는 고개 이름도 많이 나와. 박달령의 다른 이름인 단목령도 보게 되고. 그러니 앞으로는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령이다.’라는 말은 삼가자!”
“그럼 이 백운산의 경우는 어떤 뜻인 거야?”
“그러니까 백운(白雲)은 ‘ᄇᆞᆰᄋᆞᆫ’ 혹은 ‘ᄇᆞᆰᄋᆞᆫ애’에서 왔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곧 천계(天界)를 뜻한다는 거지. 그게 신의 세계, 신의 산이라는 뜻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司祭) 즉 남자무당을 뜻하는 ‘박수’로 되기도 하였고 여러 전형(轉形)으로 백운(白雲), 백암(白巖)이 생기게 된 것이지. 그냥 간단하게 ‘신의 산’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아. 신령스런 산이라는 거지.”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10쪽
이 바래봉은 멀리서 봤을 때 '바리', '바리떼' 즉 스님들이 사용하는 밥그릇 같이 생긴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鉢은 사실 우리의 옛말 'ㅂ.ㄺ' 즉 '밝음, 광명, 신, 하늘 , 태양'등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 'ㅂ,ㄺ'은 한자가 들어오고 시간이 흐르고 그 말을 사용하는 지방에 따라 박朴, 백白, 배培, 발鉢, 불不 등으로바뀌게 됩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발산鉢山이라는 지명이 많은 것도 이런 취지와 무관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변형된 'ㅂ,ㄺ'란 지명이 바래도 되고 발리도 되고 이곳과 같이 바래도 된 것입니다.
그만큼 이 '바래봉'은 예전 백제나 가야 그리고 신라인들이 숭모하던 봉이었음은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졸고 2019. 9. 9. 산행기 중
위와 같이 산이름은 그저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좀 거창한 뜻이 있는 산인 것입니다.
11:51
성남시 고기동과 의왕시 학의동을 잇는 고분재를 지나,
12:05
422.5봉을 지납니다.
12:27
462.2봉을 지나는데 계속 같이 걷고 있는 '등산이야기'팀 여성분에게 드디어 동료들과 전화 통화가 이루어지는군요.
그분들은 백운산 부근에 있다고 하니 곧 만나게 될 것 같군요.
그렇죠.
드디어 백운산 된비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군요.
사르리님은 이미 올라가셨고....
등산이야기 팀 대원은 일행을 만나 다시 거꾸로 그분들을 따라 가시고....
12:34
백운산 정상으로 올라 한남정맥에 접속을 합니다.
이때 바로 이한검 대장님이 반대방향에서 올라오시는군요.
아!
반가운 얼굴.
정맥길.....
응봉.
정자에서 가지고 온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자리를 뜹니다.
지도 #5
13:01
정맥길에서 직진을 하고....
13:09
억새밭을 지나,
13:21
쉼터도 지납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3:28
광교산으로 향하는데....
용인백두대간 팀에서 플랭카드를 붙여놓았습니다.
아는 분들도 있는 곳이니 관심을 갖고 읽어봅니다.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띄는군요.
뭐...
그런대로....
우리나라에는 이미 예전부터 산맥 개념이 존재했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산맥山脈을 곧 산줄기로 봤던 것이죠.
즉 산줄기= 산경山經 = 산맥山脈이었던 것이죠.
그것을 일본인 지질학자 고또 분지로가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쓰면서 지질학적 개념으로 우리 산줄기를 파악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붙였던 것이고 이를 식민지 교육이 시작되면서 지리교과서에 이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붙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산맥이라는 이름은 우리 전통 지리학에서의 산맥 즉 산줄기와 다름은 물론이며 온전하게 우리 지형과 맞지도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좀 부족하고...
또 신경준이 산경표의 저자도 아님에 신경준이 쓴 산경표라고 했으니...
이우형 선생이 그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를 발견한 해는 1980년인데 1960년으로 오타가 났고....
1대간, 1정간 13정맥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이렇게 다 걷고 있고....
여하튼 대원들 많이 모여 성공적으로 대간길 무탈 완주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1:30
광교산 정상에서,
2등금삼각점(수원23)을 확인하고 ...
그런데 우리를 마중 나온 분이 전화기를 쉬던 장소에 놓고 왔다고 하여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수지성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해밀의 영영님을 또 만나고....
14:19
중간에 분실장소를 오고가느라 시간을 허비한 끝에 전화기를 습득한 분과 절묘하게 통화가 이루어지고.....
전화기를 회수하고는.....
14:33
수지 먹거리촌에서 해물찜으로 뒤풀이를 합니다.
좋은 분들과 좋은 시간을 갖으니 시간을 왜그리 빨리 가는지.....
유수流水보다는 쏜살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오늘 19.5km를 쉬는 시간 포함 8시간 정도 소요되었군요.
첫댓글 명절에도 부지런히 움직이셨네요~ 근교의 좋은 운동코스죠~ㅎ 전화기 찾아 다행임다...
그 추운 겨울 선배님과 함산하던 길입니다.
그날 선배님 과음하셨습니다.
복수혈전으로 9산까지 하셨던가?
클래식 종주 코스입니다...
그렇죠?
길이 아주 반들반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