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경 압구정동에서 용인 보정역 부근의 한 아파트를 왔다.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타고 내리기까지 36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계속 대화를 나눴더니 저녁을 부실하게 먹은 영향으로 공복감이 밀려왔고 머리까지 띵하다. 웬만해서는 손님들과 얘길 하지 않지만 손님이 먼저 말을 걸면 간단히 응수하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이놈의 입방정은 그걸로 만족을 못하고 끝없이 나의 개똥철학을 읊는데 문제가 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하며 내리는 손님을 뒤로하고 아파트를 빠져나오는데 왠지 기분이 걸쩍지근하다. 괜한 말을 한 건 아닌가 해서 기분이 찜찜하기에 그래서 머리가 개운하질 못하고 띵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기사님 차를 전에도 탔었죠"하며 손님이 먼저 아는 체를 하기에 얼핏 기억이 나서 "손님의 동선과 택시기사의 동선이 겹치면 계속 만나게 됩니다. 거대도시인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길에서 손님과 기사 간에 다시 만날 개연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이렇게 콜을 부르게 되면 아니 만날 수 없거든요. 그게 좋을 수도 있지만 손님 입장에서는 사생활이 노출되기에 불편할 수도 있고요"하며 말문을 텄다. 이 말에 손님은 "기사님, 전에는 뭐 하셨어요"라며 보통의 택시기사와는 다른 나에 대한 궁금증을 보였다. 워낙 많이 듣는 말이라 이제는 이런 호기심에 아무런 감응이 없다. "제가 뭘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저의 현재 소셜포지션과 소셜클래스는 택시기사이며 서민일 뿐입니다"라는 말로 간단히 응수했다.
일 나오기 전에 뉴스로 접한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을 한화로 넘기는 빅딜에 대해서 손님과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에 나의 택시는 청담대교 남단에서 수서-분당 간 고속화도로에 오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오야붕의 싸인 하나로 삼성맨에서 한화맨이 되어야 하는 회사원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얘길 했더니 "한화가 삼성에 비해서 연봉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삼성 같은 경우 마흔 중반이면 마구 쏚아내는데 비하면 한화는 그렇지 않고요. 김승연 회장에 대한 대외적 이미지가 근래 실추된 건 사실이지만 조직 내에서는 상당히 충성도가 높습니다. 그만큼 직원들에게 챙겨주니까 그러하겠죠"라며 손님이 얘길 했다.
자신이 경영컨설턴트라고 밝히기에 손님의 그 말이 더 신빙성이 있게 다가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으이리'가 그 회장님에게 있다는 말인데 일개 조폭세계에도 그런 모습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과연 그 의리라는 게 누구를 위하는 것이란 말인가. 자신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위한 의리와 모든 사람들이 다 어울려 살 수 있는 공생의 윤리,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가치인가? 바른 생각을 가졌다면 의리를 그렇게 외친 회장님이란 작자가 아들을 때린 술집을 찾아가 기합을 주고 혼내는 망발을 감히 행하지 못 했을 것이며 기업비리로 수세에 처해질 때마다 휠체어에 탄 초췌한 '환자 코스프레'를 연출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이 얘기를 하며 "저의 10년 아래인 사촌동생이 삼성전자에 다니는데 그 녀석 연봉이 보너스 포함해서 얼추 일억 원이 되며 제수씨도 그 회사를 함께 다녀 이젠 기반을 잡아 지난 추석엔 외제차를 뽑았더라고요"했더니 "제 친구도 삼성전자 과장인데 일억 원은 안돼요. 그리고 의외로 삼성엔 지방대 출신이 많더라고요. 그 친구도 대구대 출신이에요. 스펙만 따진다면 한화가 훨 나을 거예요."라며 말했다. "그렇죠. 그 정도까진 안될 거예요. 저의 집이 큰집이라서 명절 때마다 온 가족이 다 모이는데 삼촌이 그 녀석 좀 띄우려고 과장했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요. 하지만 현재 국내 최상의 연봉인 것은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경북 출신인데 우리 때는 SKY대(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못 가는 실력이면 삼국대(건국대 동국대 단국대) 같은 건 쳐다보지 않았거든요. 비싼 돈 들여 서울 생활하는 것보다는 경북대를 차순위에 뒀죠. 경북대 못 갈 거 같으면 대구대, 영남대에 뜻을 뒀고, 그랬는데 한강 이남의 최고의 대학인 부산대, 경북대가 이젠 인서울 대학 보다 못한 '지잡대'의 처지로 전락을 했으니……디지털 세상에 뭐든지 서울, 서울하고 있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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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이젠 흘러흘러 교육과 서울-지방의 차별에 대한 얘기로 흘러왔고 4대강을 위시한 이명박의 부도덕에 대한 질타가 있었고 푸른기와집의 미세스박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손님은 미세스박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는데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안목과 손가락을 탓했다. 쯔쯧,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이상돈과 김종인의 때늦은 탄식을 보는듯했다. 그리고, 선거철만 되면 이성이 마비되는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오로지 새누리당 투표성향에 대해 그쪽 출신으로서 많은 비애를 느낀다고 했더니 손님은, 그건 호남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말에 "그렇죠. 영남이나 호남이나 다 비이성적이죠. 하지만 이러한 경향을 '한통속'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 농도가 옅어졌지만 민주정부 이전엔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었나요. 그런 차별과 배제, 억압에 대한 트라우마로 호남인들이 그런 경향을 보이는 건데, 그러한 거는 차치하고 그냥 싸잡아 뭉뚱거려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입니다"라고 얘길해줬다. 그러자 "그런 소외도 민주정부 10년 동안 어느 정도 배려를 받았잖아요. 그러면 되었지 아직까지 그러는 것은 영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거든요"하며 처음으로 이질감을 손님은 표출했다.
그 말에 머리에 뭔가 둔탁한 것이 와 닿은 양 띵 하며 울려 어떤 말을 해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 말을 해주었다. "그렇죠. 김대중, 노무현 양대 정부 10년 동안 차별받았던 호남인들을 비롯한 민주진보세력들에게 많은 기회가 있었고 누린 것도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고 기관의 장 몇몇이 바뀐다고 해서 100년(아니 500년) 이상 덧칠해진 수구보수의 두께를 10년 동안 얼마나 벗겨냈겠습니까. 120년 전의 동학의 농민혁명, 그리고 해방 전후의 사상대립,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 등 근현대사에서 호남을 비롯한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뤄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없었기에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보다듬어야 하는 게 우선일진대 작금엔 양비론과 회색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정말로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 말에 손님의 입이 작게 오므라지며 잠잠해졌다. 택시기사의 입에서 의외의 통 큰 생각이 나와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많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열띤 이야기가 오가던 차량 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면서 서먹서먹해졌다. 이런 분위기가 십여 초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태양계에서 다른 우주로 벗어날 만큼 아주 길고도 멀게 느껴졌으며 나 자신부터가 그런 공기를 견딜 수 없어 도착할 때까지 더 주절이 주절이 읊어대었다. 마치 일체의 찬 공기가 엄습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어느덧 차는 보정동에 다다랐다. 너무 얘기에 열중해서 운전을 소홀히 한 듯도 해서 조금은 멋쩍었지만 손님이 얘길 해 주지 않아도 그의 아파트 동호수 앞에 정확히 차를 대는 것으로 나의 불성실을 만회하려 했다. 몇 번 모셨더니 나의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용케 손님의 집 앞의 지물을 기억하고 바람결 냄새를 기억해 내는 것이다. '좋은 얘기 잘 들었다'라는 말을 남길 때 손님의 표정에 불편해하거나 거부의 몸짓은 묻어있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경영컨설턴트라는 직업적인 마인드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가져본다. 위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고 존경하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경제가 더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의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의 경비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이후 그 아파트 경비노동자 전원이 해고가 예고되는 아픔을 겪는 일은 덜 생길 거다, 대기업에게 괴기덩어리(이익)을 던져주는 판을 벌이고 있는 미세스박과는 달리 우리 같은 서민들도 지금보다는 더 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아무래도 경영컨설턴트라는 직업은 친기업적이지 친서민적이지는 않을 것이기에 이런 말이 불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포커페이스일 수도 있고……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손님을 여러 번 태웠고 전화하는 모습이나 나에게 한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 거다. 그만큼의 인성이 된다고 본다. 그렇기에 내 말을 별 거부반응 없이 잘 받아준 거다. 물론 내 말이 얼토당토않은 말은 아니기에 그도 경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내려주고 되돌아오면서 머리가 띵했는데, 그건 너무 많은 말을 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행동을 되돌아 보고 뭐가 잘못되지 않았냐며 울리는 일종의 경고의 음이리라. 내 얘기가 비록 입바른 말이라고 하더라도 간단히 응수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뚝 터진 보 마냥 하염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면 선한 눈으로 본다고 해도 곱지는 않으리라. 포커페이스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비정한 사회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을 무지렁이로 본다.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닌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적절히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 면이 나에게 부족하다. 그러니 절제와 겸양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으로 이 지향 없는 물음을 대신하려 한다.
첫댓글 정답이야 없지만서도 ....재미있을때 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가요? 깊이 들어가면 자기의 주의, 주장이 나오니 마찰이 생길것이고 그러다 보면 얼굴도 붉어질것이니....걍 즐겁다는 정도까지만 하면 될성 싶습니다만...^^*
그렇죠. 정답은 없지만 그 간극을 잘 조절하면 멋진 '빅마우스'의 역활은 톡톡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