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신문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68) "금의환향"
큰 부자 되어 돌아온 우 생원
손녀 납치한 산적 두목 만나 …
우 생원이 열두해 만에 고향 남원에 돌아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던 우 생원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사인교를 타고 그 뒤로는 말 세필이 바리바리 짐을 싣고 금의환향한 것이다.
이튿날, 넓지 않은 고향 집 마당에 차양이 쳐지고 소 잡고 돼지 잡고 잔치판이 벌어졌다. 상석에는 우 생원과 마을 어른들이 둘러앉아 너비아니에 청주를 마시고 앞마당 뒤뜰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끼리끼리 고깃국에 쌀밥을 고봉으로 차고앉았다. 열두해 전에 농사를 자식들에게 떠넘기고 보부상을 따라나섰던 우 생원이 제 아비 제삿날에도 오지 않더니 예순 줄에 접어들어 큰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안동포 백필을 우마차에 싣고 한산에 가서 한산 세모시 삼백필과 맞교환하고 한산 세모시 삼백필을 싣고 한달 만에 안동에 갔더니 안동포 육백필과 맞교환했지라우.” “워메∼.” 동네 어른들과 빙 둘러선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영광에서 굴비를 한배 가득 싣고 남해안을 돌아 동해안을 끼고 청진까지 가면 부르는 게 값이고 아라사(러시아)에서 수집해온 수달 모피를 매집해서 목포로 돌아오면 이 또한 돈 사태였다.
잔치가 끝났다. 우 생원은 사랑방에 똬리를 틀고 앉아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에헴, 에헴” 헛기침을 해댔다. 강 건너 시집간 큰딸 내외가 조롱조롱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다. 씨암탉 한마리와 송이버섯을 싸 온 것이다. 우 생원은 다락문을 열고 엽전 한움큼을 쥐고 손주들에게 나눠줬다.
셋째 딸 내외는 올망졸망 새끼들을 데리고 갈비찜을 해왔다. 이튿날은 셋째 아들이 몰려오고 저녁나절엔 아홉째 막내아들 떼거리가 찾아왔다. 우 생원은 타고 다닐 백마 한마리를 집에 들이며 외양간도 짓고 말잡이가 기거할 행랑채도 달아냈다. 육남 삼녀, 맏이는 고향 집을 지키고 그 아래로 모두 시집·장가가서 부지런히 일하며 오손도손 살던 아들딸들이 일손을 놓고 부자 아버지의 쌈지만 쳐다봤다.
어느 날 밤, 고개 너머 살고 있는 넷째 아들 내외가 헐레벌떡 찾아왔다. “아버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딸아이가 납치되었습니다.” 며느리는 퍼질러 앉아 울음부터 터뜨렸다. 형제들과 사위들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랑방에 모여들었다. 친구들과 다래를 따러 개울 건너 앞산에 갔다가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산적 세놈이 발버둥 치는 열세살 숙재에게 자루를 덮어씌워 둘러업고 산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돌멩이를 묶은 쪽지가 마루에 떨어져 읽어봤더니 ‘내일까지 돈 천냥을 산마루 주막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숙재를 청나라 선주에게 팔아버리겠다’라는 전갈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우 생원이 고개를 저었다. 숙재 어미인 넷째 며느리가 기절했다. 동서들이 찬물을 뿌려 깨우자 도끼눈을 하고 시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숙재가 납치된 건 아버님 때문이에요.” 악을 쓰며 삿대질했다. “그건 맞는 소리다. 그래서 안된다는 것이다.”
“친손자 외손자 모두 쉰셋이야. 내가 이번에 돈을 주고 숙재를 데려오면 쉰두명이 모두 납치 대상이 되는 거야.” 숙재 어미가 방바닥을 치며 “숙재를 살려내라∼” 집이 떠나갈 듯이 고함을 치더니 “당신은 내가 숙재를 낳았을 때 ‘딸을 낳고도 미역국을 먹느냐?’고 내 가슴에 못을 박았지!” 아버님이라 하지 않고 삿대질하며 당신이라 불렀다.
“모두 제 갈 곳으로 가거라.” 우 생원의 고함에 모두가 흩어졌는데 숙재 어미는 산발을 하고 처마 밑에 앉아 울부짖었다. 우 생원도 뒷짐을 지고 집을 나갔다. 이튿날도 우 생원이 들어오지 않자 모두가 찾아 나섰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열이틀 만에 우 생원이 산적들에게 납치되었던 숙재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 생원은 단신으로 지리산 산적들의 산채로 들어가 두목과 담판을 벌였다. 닷새 동안 술을 마시며 두목과 산적들과 어울려 그들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두목은 쌓아놨던 재물과 우 생원의 전 재산을 합쳐서 산적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우 생원은 두목과 내려와 주막에서 사또와 마주 앉아 죄를 묻지 않기로 약속받았다. 사또 역시 발 뻗고 잘 수 있게 된 토호들이 모은 돈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산적들에게 노자로 보탰다. 우 생원이 갖고 있던 돈을 다 털어버리자 자식들이 농사일에 매달려 거름지게를 지고 논밭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