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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떠나보면 알 거야>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낯섦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협함에 갇혀 하느님까지 거부하는 죄의 속성을 바로잡아 주실 성령은 어쩌면 우리에게 힘겨운 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존 습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변혁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 새로움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기존의 삶을 부둥켜안은 채 철저히 성령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박병규)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성령이 오시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 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제를 안 것이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사랑과 품이 얼마나 큰지를, 아니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 중심의 편협한 삶에 갇혀 나 자신을, 이웃을,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관계의 단절이 있다면 지금 서둘러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포도나무 비유에 들어있는 삼위일체 신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 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거름을 받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가지에 성령의 수액을 넘겨줄 수 없습니다.
이별 영화의 대명사인 ‘카사블랑카’(1942)에서 이러한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지배하는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합니다.
카사블랑카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통행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릭은 카사블랑카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과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는 냉소적인 미국 국외 거주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유럽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파리에서 릭의 전 애인 엘사가 남편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릭이 소유한 ‘통행증’을 얻기 위해 카사블랑카에 있습니다.
이 통행증만 있으면 독일 점령 유럽과 중립 포르투갈을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습니다.
릭은 나치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 엘사가 갑자기 그를 파리에 남겨둔 것에 대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엘사는 독일에 대항해 싸우던 남편이 죽었다고 믿어서 릭과 사랑에 빠졌던 것인데 남편 빅터가 살아 돌아와 결국엔 빅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릭과 엘사의 과거 관계를 알고 있는 빅터는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잡혀가면서 자기 아내 엘사를 릭에게 부탁합니다.
엘사도 릭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릭은 자신의 친구 고위 경찰에게 자신이 빅터에게 통행증을 전해줄 때 잡으면 더 큰 공을 올리게 될 것이라며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릭이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독일군 서장의 서명이 있어야 하는데 서장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둘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스트라사 소령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릭은 그를 총으로 사살합니다.
그리고 릭은 빅터와 엘사가 행복할 수 있게 영원히 떠나보내 보내줍니다.
경찰서장 루이는 릭의 친구였기 때문에 웃으며 릭이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둘은 진정한 우정 관계를 시작합니다.
릭이 사랑하는 여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사블랑카에 범죄자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니까 떠나야 하는 영화의 대명사입니다.
떠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상징되는 통행증이 엘사와 남편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 머물러야만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사의 남편 빅터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에게 죄는 독일에 저항하지 않는 릭입니다.
그는 독일에 저항함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독일이라는 악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내주려는 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함으로써가 아닌 자신이 릭의 목숨 값으로 받은 통행증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또한 릭이 독일군 장교를 처단한 것처럼 악의 심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악에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긴 성사라는 통행증을 받고 의로워지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심판을 이긴 것입니다.
사랑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잘 떠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릭은 엘사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빅터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릭의 친구 루이가 아니면 통행증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주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총을 직접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줄 것이 없으면서 붙어만 있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원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흘러오는 수액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흘러들지만, 사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계시고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거름으로 포도나무를 키웁니다.
그래야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를 떠난 분을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매일 집에만 있다면 자녀들은 좋을까요?
불안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야 돈을 벌어오는지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가 안 보이는 것을 기뻐합니다.
물론 규칙적으로 만나주기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주 가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며 저를 키우셨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의 일하는 곳까지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자리는 그분이 일하는 곳에서 그 일에 참여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떠나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여 당신이 계신 곳에 오도록.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젊은 사제 시절, 저희가 운영하던 아동 보육 시설에는 초딩 꼬마들도 간간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하늘같은 중고생 형들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꼬마들에게 보호 본능 내지 측은지심이 느껴져 더 각별히 챙기곤 했습니다.
가끔 연피정이나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형들로부터 시달릴 꼬마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꼬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있을 때는 그나마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는데, 이래저래 불안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분리된 친구들인데...
이제 겨우 정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니, 아이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종의 분리불안증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다독이고 그렇게 떠나곤 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분리로 인해 걱정이 태산인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손수 우리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내 일시적인 부재로 인해 너희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하지 말거라.
그 근심은 잠시뿐이란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란다.
내가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이란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주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곧 돌아 온다 해놓고 안 돌아 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주님께서는 200퍼센트 확실히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승천하시자마자 약속하신 대로 즉시 당신의 대리자요 우리를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가운데 머무시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보호자께서 오시면>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의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하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왜 이렇게 나의 ‘죽음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기만 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분명히 물었습니다(요한 13,36).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묻는 사람이 ‘지금’ 없다는 뜻이고, 당신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는 “떠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별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 없이 슬퍼하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에게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기만 한 것을 크게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임종과 장례 때에 슬퍼하면 안 되는가?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라는 말씀은 당신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중요한 ‘계시’ 라는(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떠나시지 않는 것은 제자들에게 해롭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떠나도 너희의 영적인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신다.”, 또는 “나는 떠난 뒤에도 성령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있겠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의 “떠나지 않으면... 오지 않으신다.” 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과 성령이 마치 임무 교대를 하듯이, 또는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듯이 그렇게 엇갈려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당신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 제자들이 따로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하시면, 늘 제자들 가운데에 당신이 현존하신다고 해도 제자들을 위해서 따로 성령 강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라는 말씀은 앞의 14장에서 하셨던 약속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6)
교리서에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복음서에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신다고 표현될 때도 있고, 예수님께서 보내신다고 표현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뜻은 모두 같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너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박해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입니다.
성령께서 직접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씀들은 신앙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일은 신앙인들이 하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일하는 신앙인들을 도와주십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도움도 못 받게 됩니다.
‘보호자’는 성령이고, ‘세상’은 박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라는 말씀의 뜻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은
죄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고”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죄인은 믿지 않은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아버지께 가는 일은(나의 승천은) 곧 내가 의롭다는 것을(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고,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단죄한 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그들은 자신들이 나를 심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부활은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일이 될 것이고, 동시에 사탄의 하수인이었던 그들도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승리의 삶 -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영적승리의 삶을 소망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영적승리의 삶도 선택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선택의 은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보호자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고 나가면 맨먼저 보는 밤하늘 하늘이요 다음엔 늘 거기 그 자리의 영원한 도반 불암산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살라고 눈들면 별들이요, 땅의 꽃처럼 살라고 내려다 보면 무수한 꽃들입니다.
요즘의 한국은 어디나 신록에 꽃들 만발한 천국같습니다.
아무리 나눠도 새롭고 좋은 다음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앞뜰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요 제 주변에는 이런 영적도반들이 많습니다.
어제 파코미오 원장 수사의 영명축일이 마치 내 영명축일인 듯 기쁘게 지낸 영적승리의 하루였습니다.
어제의 강론을 축일 선물로 드렸고, 다음 내용이 축일 선물로 보낸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성모님’을 ‘장모님’으로 보낸 오타 덕분이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왜관 피정집 장모님께서도 기뻐 축일 축하드립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니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이 장모님이라면 ‘성모님의 사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성모님의 사랑은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유쾌하고 좋은 축일 선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 강론을 축일 선물로 보낸 것이지요.
바로 이런 유우머의 덕담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불가의 성철 대선사가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다섯가지 수행지침이 생각납니다.
1. 많이 먹지 마라.
2. 많이 말하지 마라.
3. 많이 자지 마라.
4. 간식하지 마라.
5. 많이 책 보지 마라.
영적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구체적 수행 지침들에 공감했습니다.
얼마전 의사분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당뇨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간식하지 말고 체중을 줄이세요.”
이 또한 저에게는 명심해야할 수행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먹는 대로 됩니다(I am who I eat).”
적게 먹어 병이 아니라 지나치게 먹어 병입니다.
어제 강론에도 인용했고 어느 자매와도 나눈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굴은 사람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 순수로 빛났던 젊음의 얼굴들이 욕망대로 무절제의 삶을 살다 보면 괴물같은 노년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한폭의 그림같습니다.
평생 그려가야 하는 인생 그림이듯 평생 꼴잡아가는 얼굴입니다.
웃으면 꽃같은 사람 얼굴인데 웃지 않을 때는 괴물같아 보일 때도 많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 처방전 약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대로 살면 꽃같은 얼굴에 영적승리의 삶이 보장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께서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이 말씀에 꼭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웃을 때 하늘의 별같은 얼굴이, 땅의 꽃같은 얼굴이 됩니다.
웃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사람의 얼굴들입니다.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의식적, 의도적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수행자들의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구체적 처방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보호자 성령임을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이다.”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떠남이 죄요, 주님과 함께 함이 의로움이요, 주님과 함께 할 때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에 구원의 삶임을 말해 줍니다.
성령과 함께 파스카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 때 죄에서의 해방, 의로움의 성취, 심판에서 벗어납니다.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영적전쟁입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다음 복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ㄴㄷ)
바로 영적승리의 삶을 모범을 보여주는 제1독서의 바오로와 실라스 일행입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중에도 오뚜기 같은 두 제자입니다.
무지몽매한 군중의 승리인 듯 하나 바오로와 실라스의 승리요 주님의 승리, 성령의 승리입니다.
깊은 감방속, 발에 차꼬를 채웠지만 이들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자정 무렾에 이들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고 다른 수인들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러자 즉시 발생한 기적이 상황을 일변시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자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감옥문들은 저절로 열리고 사슬도 풀렸습니다.
마침내 간수의 구원에 까지 이르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두제자의 영적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두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두 제자들은 이 가족으로부터 음식 대접에 환대를 받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니 참으로 통쾌한 영적승리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실 때 백전백승의 승리요, 전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 없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 영문 한구절이 저에겐 화두처럼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하느님은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실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시는 주님을 모시고 성령따라 살 때 언제 어디서나 곧은 삶, 영적승리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바오로와 실라스가 그 모범입니다.
탓할 것은 주님과 함께 못하는 내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위 잠언 말씀을 입증하는 제 “메꽃들”이란 시입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피어 내며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
- 1997.8.21.
무려 26년 전 제 정주의 꽃자리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 쓴 자작 애송시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늘 사랑 꽃피어 내듯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써온 강론에 제가 놀라고 감사한 마음 차고 넘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말씀하십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든 사건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찬"(요한 16,6) 것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떠남을 말씀하시는 건 "당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요한 16,7 참조)
예수님과의 분리는 제자들 소명의 근저가 뒤흔들리는 불안을 야기합니다.
가족과 생업과 기존 종교 질서를 버리고 따라나섰던 분이기에, 그동안 쌓인 정도 있거니와, 아직 홀로 설 준비도 안 되었고, 또 뭔가 손에 잡히는 결실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스승이 떠나신다는 사실이 충격에 가까운 근심을 불러올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제자들과 세상에 더 이로운지 아십니다.
비록 고통스러울망정 당신이 그들을 떠나가셔야만 세상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걸 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 당신이 보내실 보호자 성령께서 세상에 현존하시며 성부의 뜻과 성자의 가르침을 일깨우고 기억시켜 온전한 구원을 향해 가도록 도우시리라는 것도 아시기에 그렇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이다."
(요한 16,8)
세상은 율법을 근거로 죄를 재단하고, 의로움을 판단하며 심판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면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시지요.
곧 오실 성령께서 이 모든 가르침을 밝혀 주신다고 말입니다.
제1독서는 필리피에서 바오로 사도 일행이 겪은 수모를 이야기합니다만, 어쩌면 이 일화의 주인공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아니라 "간수"인 것 같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군중의 공격을 받고 정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행정관 지시로 매질을 당한 후 감옥에 갇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흔들렸다."(사도 16,26)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사도 16,26)고 하네요.
참 의미심장한 현상입니다.
사람은 종교든 이념이든 직업이든 그동안 믿고 의지하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 마치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를 보호해 주던 든든하고 안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힘겨운 과정이 시작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밑바탕부터 뒤흔들리고 비틀리는 지진과 요동은 묶여 있고 갇혀 있던 모든 제약과 구속에서 존재를 해방시킵니다.
이는 오늘의 주인공인 간수가 만나게 될 새로운 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간수는 사슬도 풀리고 문도 열렸는데 달아나지 않은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놀라 그들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원'에 대해 묻습니다.
이 와중에 어떻게 구원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극심한 충격과 위기의 순간을 맞닥뜨리면 그동안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질문과 대면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간수에게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이고, 무고하게 매맞고 갇혀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도망칠 기회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믿는 이들"에게 존경심이 포함된 의구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도 16,31)
바오로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모든 걸 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밝혀주신 "죄와 의로움과 심판"의 열쇠,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사도 16,33)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 밤에 그들이 서로에게 행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간수는 사도들이 육체에 입은 상처를 씻어 치유해 주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수와 그 가족의 죄의 상처를 씻어 깨끗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 "기쁨"을 나누며 성령의 현존 안에 하나가 됩니다.
제게는 간수의 세례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면 세상의 "죄인"를 통제하고 다루는 준법자, 즉 "의로움을 수행하는 이"고, 그 기준은 세상 법에 의거한 "심판"입니다.
이것이 그가 순응해 살아온 질서였지요.
그런 그가 지진과 자결 시도, 사도들과의 만남을 통해 변한 것입니다.
사실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사도 16,23)받은 사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해 주고 세례 받고 음식을 나눈 것은 엄연히 규정 위반이고, 세상 눈으로는 "죄"가 분명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처럼 지켜온 규정의 안팎을 넘나드는 자유인이 되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가 세례를 통해 세상 질서에서 하느님의 질서로 건너가고,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편협하고 국지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을까요?
간수로서의 경험상 그는, 강제로 갇혀있던 이들이 통제가 풀리면 자유를 찾아 도망칠 거라고 생각해 왔겠지요.
그래서 죄인을 지키는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려 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지진으로 외적 통제(감옥 문, 사슬)가 해제된 상태에서도 자의로 감옥을 벗어나지 않고 머무르는 사도들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억압과 구속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 자유, 감옥 안에 있건 세상 한복판에 있건 누리는 진정한 내적 자유는 바로 구원의 표지니까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이롭다고 하십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잃고, 웃음도 미소도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과 규정, 관습은 하느님의 법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법규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하나로 요약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모든 법은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 때문에 아픔도 수고도 마다않는 축복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라마단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월절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이 지나고 부활 축제기간 중이었습니다.
요르단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려고 이스라엘로 많이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서 국경에 직원들이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많이 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1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이번에는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짜증을 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새치기 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새치기한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분도 보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왔으니 요르단의 법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새치기 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나는 성지순례를 왔지만 저분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니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는 늦게 이스라엘에 도착해도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분들에게는 기다리는 버스가 없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나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침 강의 내용이 ‘도마복음’이었습니다.
평소에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으니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사자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사자에게 먹히면 불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가 인간에게 먹히면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육체의 욕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게 사로잡히면 불행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는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사자는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사자는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요르단에서 넘어오는 이스라엘 국경에서 저는 사자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자를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욕망,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사자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뽑힙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화가에게 치명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만약 포기했다면,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과 포기의 연속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이라는 새로움은 그들에게 새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없는 새로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성령을 통해 또 다른 삶,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많은 은사와 열매를 받은 제자들은 새롭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도 16,31)
바로 믿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줍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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