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나 3: 8-14)
겸손한 사랑으로 행하라
< 빨리 하나님을 찾으라 >
니체는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도 목사 딸이었다. 그의 어릴 때 꿈은 목사였고 믿음이 좋아서 꼬마 목사로 불렸지만 나중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의 사상에는 불교 사상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38세 때 <즐거운 학문>이란 책의 125번째 단편인 ‘광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했다. 그 단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광인이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서 “나는 신을 찾는다.”라고 계속 외쳤다. 불신자들이 조롱했다. “신이 길을 잃었나? 숨바꼭질을 하나? 사람을 두려워하나? 배 타고 이민을 갔나?” 광인은 조롱하는 군중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내가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신의 시체가 부패해가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가? 신도 썩는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인 죄를 어떻게 속죄 받는가? 그 위대한 일을 해내려면 우리 자신이 신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인간 역사는 더 고귀해진다.”
군중이 놀란 눈으로 광인을 쳐다볼 때 그가 등불을 땅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데 인간들은 신이 되는 일을 이미 저질러버렸다.” 그날 광인은 여러 교회로 뛰어들어 ‘죽은 신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다가 교회에서 쫓겨나 심문받을 때마다 이런 말만 반복했다. “교회가 신의 무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 단편에서 광인은 니체 자신이다. 그는 인간이 신을 만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또한 인간이 신과 같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광인이 등불을 땅에 내던지는 행위로 인간이 초인이 되는 일은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결국 니체의 초인 사상은 허무주의 사상에 가깝다. 그는 인간이 신을 죽였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깊이 분석하면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을 죽일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낸다.
니체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내면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못하는 자기 분열 상태에 있었다. 그는 천국을 추구하는 기독교를 허무주의 종교라고 주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허무주의에 빠져 내세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였다. 그는 미래의 시간이 아닌 현실의 시간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사람을 초인으로 여겼지만 사람이 진짜 초인이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기독교는 미래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다 중시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현실의 시간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것을 긍정한다. 또한 하나님이 없이 초인이 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려고 한다. 니체는 하나님이 없이 초인이 되라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적인 모순에 빠지고 사상과 현실이 괴리된 삶을 살면서 점차 정신이 분열된 상태가 심화되었다.
니체는 초인 사상으로 약자에 대한 연민을 부정했지만 자신의 내면에 실재하는 연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산책 중에 마부가 말을 매질하는 모습을 보고 연민의 감정을 품고 말의 목을 부둥켜안았다가 의식을 잃고 미쳐버렸다. 그 후 11년간 정신병에 시달리다 죽었다.
니체는 약자의 편을 드는 종교와 철학을 부인하려고 했지만 내면의 종교심과 양심을 부인하지 못해서 끊임없는 내적인 투쟁을 겪다가 결국 미쳐버린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없다면 삶은 기초부터 흔들린다. 하나님을 죽이거나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 >
어느 날 세 아이가 가족 자랑을 했다. 첫째 아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한 번 잠수하면 50m 간다.” 둘째 아이가 말했다. “우리 아빠는 한 번 잠수하면 100m 갈 때까지 안 나온다.” 셋째 아이가 말했다. “우리 형은 작년 여름에 물속에 들어가서 아직도 안 나왔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자랑하는 것은 셋째 아이의 철없는 자랑과 같다. 자랑을 삼가라. 자랑을 할수록 사랑을 받지 못한다.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1. 사람의 영화
본문 8절에 언급된 노아몬은 아몬의 신전이 있는 ‘아몬의 도시’란 뜻이다. 그곳은 고대 애굽의 수도로서 신전,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등이 있었고 나일 강 사이에 있는 지형적인 이점으로 인해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또한 에티오피아 왕조인 구스와 연합해서 고대에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고 게다가 붓과 루빔까지 협력해서 그 세력이 더욱 강력했다(9절).
루빔은 오늘날의 리비아를 뜻하고 붓은 리비아 인근의 고대 국가로 추정된다. 결국 구스와 애굽과 붓과 루빔은 강력한 고대 국가 동맹이었고 그 동맹의 중심지가 노아몬이었다.
그런 노아몬조차 패망해서 주민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아이들은 비참하게 죽고 귀족과 권세자들도 결박되었다(10절). 그처럼 니느웨도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패망해서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없이 피난처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11절).
본문 12-13절은 니느웨의 견고한 산성이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고 앗수르 군사들이 여인처럼 약해지고 니느웨 성문들이 넓게 열려 점령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임하면 인간의 힘과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권세와 영화가 생기면 그것을 자랑의 도구가 아닌 사랑의 도구로 쓰라.
예전에 한 사람이 권력을 잡자 그 밑의 부하 장교도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 그 장교의 조사실에 언론사 사주들과 기업 회장들이 불려가 조사받으면서 벌벌 떨었다. 그때 재산도 상당히 모았다. 나중에 그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가끔 과거에 기업 회장들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떤 얘기를 과시하며 말했다. 그러나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교회를 가볍게 보고 수시로 옮겨 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과시를 들으면 “와! 과거에 대단하셨네요.”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안타깝게 보셨을 것이다.
“왕년에 내가 어떠했다.”라고 자랑하지 말라. 나이가 들면 세상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하면서 왕년 자랑에 매달리기 쉽다. 그런 왕년 자랑을 힘써 삼가고 변화시켜야 할 것은 변화시키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 또한 세상의 빠른 변화를 탓하지 말고 나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빨리 후대에게 자리를 잘 내어주고 내 뜻과 비전을 잘 계승시키면서도 후대를 앞세울 지혜를 발휘하라.
필자가 핸드폰 문자나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 이유는 변화에 대해 적응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 육신의 하드웨어가 약해진 상태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활동 범위를 좁히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 빠른 변화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회 및 공동체에서 변화를 조금 늦추려는 어른 그룹도 존재해야 변화로 인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너무 빠른 변화가 바람직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을 옛날 방식대로 하기를 고수하면 속칭 꼰대가 될 수 있다. 특히 왕년의 영화를 생각하고 왕년 자랑을 하며 과거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고 하지 말라.
반면에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으로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혜롭게 지키면 꼰대가 되기보다 닮고 싶은 어르신이 된다. 그러므로 자랑을 삼가고 겸손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 비전에 충실하고 자기 현실에 감사하라.
2. 사람의 대비
본문 14절을 보라.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이 표현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니느웨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하기 전에 상당 기간 포위당했을 것이라는 사실과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벽돌 가마에서 만든 벽돌로 성벽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전쟁에 잘 대비했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본문 15절을 보라.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느치와 메뚜기 떼가 들판을 휩쓸면 들판이 초토화된다.
니느웨가 아무리 잘 대비해도 불과 칼로 초토화될 것이란 비유적인 표현이다. 사람이 아무리 잘 대비해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모든 대비와 준비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를 받기 위해 나의 기도와 감사와 헌신이 필요하다.
늘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살라. 사소한 문제에서도 기도하라. 급할 때 교통이 막히거나 앞차가 늦게 가면 그 사소한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하나님! 이 교통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하소서.”
그때 마음을 다스리고 감사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디선가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보상을 준비해 주시고 더 큰 시련이 생기는 것도 막아주신다. 그러면 현재의 답답한 현실 하나하나가 축복의 탑을 쌓는 벽돌 하나하나로 변한다.
급한 상황에서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을 때도 기도하라. “하나님! 그 물건을 찾게 하소서.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둘러보게 하소서. 그러나 못 찾아도 상황을 대처하게 하소서.” 그런 기도와 함께 침착하게 둘러보면 책 밑에 그 물건이 있거나 아니면 그 물건 있을만한 곳이 생각난다.
그때 찾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작은 믿음의 승리에 기뻐하며 은혜의 중요성을 새롭게 실감한다. 사람의 대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중요하다.
물론 은혜를 앞세워 산다면서 대비에 소홀하면 안 된다. 문제도 대비하고 미래도 대비하라. 요새 ‘운팔능이’란 말이 있다. “성공하려면 운 팔십 퍼센트와 능력 이십 퍼센트가 필요하다.”라는 말이다. 그 말이 성공하는 데는 맞더라도 성공을 지속시키는 데는 맞지 않다.
운은 지속되지 않는다. 운으로만 얻은 성공은 수명이 짧다. 능력이 있어야 성공이 오래 지속된다. 열심히 땀 흘려 능력을 키우라. 누군가가 게으르면 그 게으름에서 벗어나도록 잠시 전략적으로 외면하는 지혜도 발휘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는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하라.”라고 했다. 게으름은 그 자체도 죄지만 배반의 죄도 낳고 거머리 습성도 낳는다. 게으른 사람이 겉으로 유순하고 착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를 공짜로 얻으려는 생존 전략이다. 그러다가 돈을 받아낼 기회가 생기면 염치와 양심을 버리고 법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 악용하면서까지 집요하게 받아낸다.
남이 내 자동차 범퍼를 들이받아 범퍼에 작은 흠이 나면 부지런한 사람은 “범퍼는 부딪치는 용도로 있는 것인데 뭘 그래요. 그냥 가세요.”라고 한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 기회를 틈타 범퍼 교체 값을 받아내고 심지어는 염치와 양심을 버리고
멀쩡한 목을 붙잡고 내리면서 입원해 합의금을 요구한다. 게으름으로 인성이 나빠지지 않도록 열심히 땀을 흘리고 내일을 준비하고 대비하라. 그러나 아무리 잘 준비하고 대비해도 하나님이 한번 불어버리면 다 끝나기에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라.
3. 사람의 번성
니느웨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로 많은 상인이 드나들며 크게 번성했었다. 그 상인들과 방백과 장수들이 메뚜기떼가 사라지듯이 다 사라지고 니느웨가 황폐해진다(16-17절). 인간의 번성과 물질과 권세가 허무한 것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니느웨가 무너지자 앗수르 왕의 신하들과 귀족들은 전사했고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진다(18절). 그러자 니느웨의 압제와 행패에 시달렸던 주변 나라들이 동정하기는커녕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19절). 강성하다고 악을 행하면 언젠가 패망하고 수치를 당한다는 말씀이다.
번성과 성공을 자랑하지도 말고 그런 자랑에 현혹되지도 말라. 돈을 자랑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로또 당첨자는 사람들이 돈을 노리고 찾아올까봐 그 사실을 대개 감춘다.
진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노리거나 구걸하거나 투자하라는 사람 등이 무수히 찾아오는 것이 귀찮으니까 돈 자랑을 삼간다. 또한 돈을 노리고 접근하지 않는 진실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서도 돈 자랑을 삼간다.
돈 있는 것을 자꾸 자랑하는 것은 철이 없거나 실제로 돈이 없거나 아니면 돈 자랑으로 사람을 미혹하기 위해서다.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참된 은사가 없는 사람이다.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미혹되지 말라.
돈과 힘이 생기면 과시하지도 말고 돈과 힘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도 않게 하라. 참된 부자는 의에도 관심을 둔다. 돈으로 죄가 아닌 것을 죄가 되게 하거나 죄인 것을 죄가 아니게 되게 해도 안 된다.
전관 변호사가 고액의 수임료를 받고 명백한 죄를 무죄로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의다. 그때의 고액 수임료는 일종의 뇌물인 셈이다. 판결이 의가 아닌 돈에 좌우되면 억울한 사람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언젠가 심판의 비로 내린다.
어느 사회나 법조 비리와 법조 불의의 시정은 그 사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최선의 과제다. 의로운 부자도 필요하지만 외로운 법조인도 필요하다.
왜 판검사가 제사장 의복처럼 만든 법복을 입는가? 남을 정죄하고 생명까지 좌우하는 존재로서 종교인처럼 최고의 양심과 진실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법조인이 되는 것은 귀족이나 권력자가 되는 수단이 아니다.
의로운 법조인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최대의 수치로 여긴다. 국가와 사회가 큰 위기에 빠질 때는 법과 의가 돈과 힘에 의해 좌우될 때다. 그런 상황이 심해도 시정이 되지 않으면 언젠가 하나님이 심판의 손길로 그 상황을 직접 시정하신다.
아무리 강성한 국가도 법과 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조만간 몰락한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법조 회사들은 강력한 파워 그룹으로서 그 힘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기득권을 가진 것을 감사하며 기꺼이 내려놓으려는 마음까지 가져야 피의 혁명이나 급격한 사회 변혁을 통한 추락이 예방된다.
국가의 패망이나 피의 혁명은 대개 법과 의가 무너지는 것이 징후다. 돈과 힘이 법과 의를 앞서는 부조리가 시정되지 않으면 언젠가 국민의 이름으로 매스가 대어지고 그것도 안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다.
돈과 힘과 물질이 생기면 그것을 자랑의 도구가 아닌 사랑의 도구로 쓰라. 번성이 추락의 예고가 되지 않도록 잘 나갈 때 잘 낮아지라. 번성 자체를 죄악시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번성해야 사회도 복된 사회가 된다. 번성을 추구할 때도 겸손을 잃지 말고 번성의 축복을 얻은 후에도 겸손을 잃지 말라. 겸손의 바탕이 없다면 사람의 잘난 것이 오히려 패망과 추락을 앞당기는 촉매가 된다.
< 겸손한 사랑으로 행하라 >
요즘 왜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에 대해 호감도가 낮아지는가? 은사를 가지고 조용히 섬기기보다 자랑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세 가지 자세를 권고했다. ‘받은 은사에 충실한 것’과 ‘겸손함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섬길까를 생각하지 않고 서로 비교하면서 자랑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파당이 생기면서 교회도 힘들어지고 인간관계도 힘들어진다.
오래 전에 한 아빠가 지방 근무를 할 때 두 자녀에게 엽서를 썼다. 그때 아이들은 글 내용보다 글자 수를 비교하며 글자 수가 많은 사람이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글자 수가 다르다고 아빠의 사랑이 다른 것은 아니다. 교인이 은사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자녀가 글자 수로 아빠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 같은 유치한 모습이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라고 주어진 것이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내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사랑하라. 내 곁의 사람을 자랑 대상이 아닌 사랑 대상으로 삼으라. 모든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헛된 자랑으로 남의 기분을 저하시키지 말라. 왜 기도하는가? 문제 해결의 목적도 있지만 좀 더 겸손해지려는 목적도 있다. 내게 주어진 것은 섬기라고 주어진 것이지 자랑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이곳에 없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곳에 없어도 돼.”라고 생각하라. 나를 주인으로 여기지 말라. 주님이 주인이시다. 내가 없으면 가정이 큰일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만 계시면 어디서든지 살 수 있다.
내가 없으면 나의 빈자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 채우신다. 나 혼자로는 늘 불완전한 존재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나의 부족함을 늘 인정하며 겸손함을 잃지 말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사람 자체를 불신하지 말라.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혼자 살겠다고 하지 말라. 속 썩는 일이 있어도 동역자가 필요하다. 자랑하는 마음만 버리면 좋은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람은 사실상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의 자랑거리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은사나 소유를 가지고 자랑하기보다 사랑할 때 내게 주어진 소중한 것들이 오래 내 곁에 머문다.
자랑하는 삶은 위선적이고 율법적인 삶을 낳는다. 위선과 율법주의에 빠져 행복을 잃지 않도록 자랑보다 사랑을 앞세우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3가지 자랑거리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들었다(살전 1:3).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은 사랑은 수고하는 것이라는 암시다. 겸손한 사랑의 수고를 외면하지 말라. 참된 사랑은 혀끝이 아닌 손끝에서 나타나야 한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창문 넘어 바깥을 보는 창문형 인간과 거울로 자기만 보는 거울형 인간이다. 같은 돈과 시간을 써도 거울형 인간의 삶은 낭비가 되고 창문형 인간의 삶은 헌신이 된다.
예수님을 위해 향유 담긴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행위를 거울형 인간 유다는 낭비로 보았지만 창문형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헌신으로 보셨다.
거울로 나만 살피는 거울형 인간이 되지 말고 창문을 통해 남도 살피는 창문형 인간이 되라. 창문을 넘는 헌신과 선교가 없으면 복된 삶도 없다.
20대 초에 폐결핵 말기로 죽음을 앞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왕 죽을 바에야 좋은 일을 하고 죽자면서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힘써 빈민을 돌보다가 건강을 찾고 그 후 50년을 더 살면서 빈민촌의 성자가 되었다. 그가 하천풍언이다.
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 작은 것으로 겸손한 사랑을 펼쳐서 성자가 되었다. 내가 가진 것이 작다고 실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이면 충분해.”라고 하신다.
내가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함으로 공동체에서 변화의 주체와 복의 근원이 되라. (이한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