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자하문터널 주변을 백운동(白雲洞)이라 불렀다. 서울의 4
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의 바로 남쪽 밑으로 백운동계곡, 백운동천이라 불리
기도 했는데, 이는 흰 구름이 떠있는 고운 계곡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아리송
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으나 조선 초부터 서울 제일의 경승지로 존재감이 북한산(삼각산)만큼
이나 컸다.
조선 초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던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 1410~1481)과 삼탄 이승소(三
灘 李承召, 1422~1484),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
宗直, 1431~1492) 등이 이곳에 퐁당 빠져 시를 남겼으며, 용재 성현(傭齋 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서울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은 삼청동(三淸洞), 그 다음은 인
왕동(仁王洞), 그 다음은 쌍계동(雙溪洞)과 백운동, 청학동이라 찬양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이염의(李念義. ?-1492)는 아예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도 백운동 그림이 전한다.
1770년에 제작된 한양도성도,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 백운동 지명이 나오며,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준천사실(濬川事實)','한경지략(漢京識略)','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개천(開川, 청계천)의 발원지 중 백운동천 계곡이 가장 길고 멀다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이 이곳
에 백운장을 지어 머물렀는데, 백운동천 바위글씨는 바로 그가 남긴 것으로 글씨 서쪽에
아주
작게 '光武七年 東農(광무7년 동농)'이라 쓰여 있어 1903년 동농이 썼음을 알려준다.
독립운동에도 나섰던 동농 김가진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여기서 가까운 신교동(新橋洞)에서 태
어났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 과거에 나갈 수가 없어 1877년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인연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으며, 1883년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
었고,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
다.
나라의 개화 필요성과 방법론을 다룬 봉서(封書)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정책을 주도하
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했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기도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했다. 그리고 주차일본공
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이 되어 왜열도 동경(東京)에 머물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
대신(駐日本辦事大臣)이 되었다.
왜에 호의적이고 청나라를 멀리하는 태도 때문에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물러났다
가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어 박영효(朴泳孝)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허나 바로 그해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제4차 김홍
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獨立門)과 독립공원을 조
성하는데 크게 나섰다. 또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적극 가담해 헌의6조의 실행을 촉구하
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06년 스스로
충청남도 관찰사를 자청해 지방에 내려갔다.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1910년 이후 왜정으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자 9년 동안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거의 잠수를 탔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대동단(大同團)을 창설해 초대 총재로 선출
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뜻에 따라 그를 중원대륙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선언
서 발표를 시도했으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자마자 왜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하여 동농
혼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고, 대동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계획하
다가 1922년 7월,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대한제국)이 아주 허무하게 망하자 많은 고위 귀족과 황족들은 왜정에 붙었다. 허나 동
농은 협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왜정이 상해임시정부를 우습게 보았으나 김가
진이 가세하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허나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에 한때 친일 행적 논란
이 나오기도
했다.
동농의 집은 장안 제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 위엄이 대단했는데, 백운동계곡의 풍경을 너무
좋아하여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1903년 백운동천 글씨를 남겼으며, 백운장이란 별장까
지 지어 이곳의 일원을 꿈꾸었다.
백운장 부근에 왜인이 세운 청향원이 들어섰고, 동농이 중원대륙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백운장
을 모두 매입해 고급식당을 굴렸다. 1961년까지 요정과 호텔로 쓰이면서 요정 정치의 현장으
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면서 결국 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터만 남
은 상태이다. |
서쪽 계단의 끝에는 건물터가 있다. (백운장이나 그 이후에 지어진 부속건물) 그 너머에는 청
운공원이 있으나 담장이 민통선처럼 꽁꽁 둘러져 있어 넘어갈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무조건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나중에 이곳에 사적공원이 꾸며지면 청운공원을 잇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인왕산자
락길과 인왕산길, 인왕산, 윤동주시인의언덕, 부암동, 북악산(백악산)과 바로 연계가 가능해
져 인왕산과 서촌(웃대), 부암동, 북악산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답사 코스가 태어나게 된다. |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제외하고 백운장터에 제대로 남은 인공 유물은 석등이 유일하다. 생김새
를 보니 멀리 잡아도 김가진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머물던 1900~1910년대, 가깝게 잡으면 왜
정 때 세워진 것으로 탑 스타일이 왜식(倭式)에 가깝다.
그에 대한 정보는 딱히 전해오는 것도 없고, 자신을 보듬던 백운장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된
충격에 벙어리까지 되어 아무에게도 속삭여주지 않는다. 석등 주변에는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
엽이 수북하게 쌓여 서로 동변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 백운동계곡은 사실상 막다른 외로운 곳으로 북쪽 높은 곳에 청운문학도서관이 있고, 동
쪽 높은 곳에는 붉은 피부의 빌라로 이루어진 청운벽산빌리지가 있다. 서쪽은 길이 막혀있고,
오로지 남쪽만 입을 벌리고 있다. 청운동에 가해진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수려한 풍경을 제대
로 난도질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창의문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설 때 창의문로로 가지 않고 백운동 옆인 청운벽산빌
리지를 거쳐 경기상고로 내려갔다. 그 옛길도 도시화로 사라져 온전하게 더듬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서촌(웃대) 나들이는 백운동계곡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6-6일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