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아래 글에 리플로 이것저것 살을 붙여보려다가 너무 일이 커져서..;;
답글로 달았다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것 같아서 아예 분리해서 다른 글을 끄적였습니다.
제가 여기저기 주워들은 황산싸움의 대략적인 썰을 풀어보려 합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신라군 진격 경로
이병도의 주장을 따라 탄현을 현재 대전 달성구로 놓고, 또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기벌포를 금강 하류로 지정하고 보자면, 신라군은
상주에서 진격하여 대전을 향해 나아가 그대로 남하했는데, 논산군 연산면의 천호리, 송정리를 따라 흐르는 연산천을 따라 남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청각 자료가 없어 조금 설명이 난해한데, 네이버 지도(...)라도 창을 따로 켜 놓으시고 위성지도를 보시면
편하실 듯 합니다. 이와는 달리 연산면 신흥리, 산직리에서 난 동쪽 길에서도 신라군이 진입하여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여러 갈래로 진격하는 신라군은 첫번째로 연산면 근방의 평야지대에 집결하여 연산천을 따라 금강 지류로 합류하고, 또 당군과
합류하여 부여로 진격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군과 합류할 지점은 기벌포로 흐르는 금강과 탄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
짐작되는 연산천이 만나는 현재 논산시 강경읍 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설명을 따라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부근은 정말 조또 없는 허허벌판 사지인데다, 부여를 보호할만한 험준한 산이 딱히 없는 곳이기 때문에 (제 지레짐작이 얼추 맞다면...)성충, 흥수가 "기벌포, 탄현을 지키고 막지 않으면 좆된다"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아래 나오겠지만, 탄현을 잃어버린 백제군은 심히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2. 백제군의 주둔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계백이 세곳에 주둔해 신라군을 맞았다고 기록합니다. 학계에서는 백제군이 주둔한 곳을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산성을 비정합니다만, 정작 "황산성"은 연산면 관동리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여튼 연산면 근처에는 상당히 많은 백제군
요새지가 배치되어 있는데, 중요한 곳만 짚어보자면,
1. 황령재, 산직리, 모촌리로 이어지는 산성 세곳.
2. 연산천 북쪽에 축조된 황산성
3. 명암리 북동쪽에 위치한 청동리산성
현 학계에서는 황령재, 산직리, 모촌리로 이어지는 산성라인에 백제군이 주둔했다고 추청합니다만, 연산천을 타고 내려오는 매우 쉬운
길을 배후에 두고 황령재를 넘는 신라군을 맞서는 백제군은 굉장히 위험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그렇다고 연산천 길을 방어하기엔 남쪽
길에 배후를 열어두는 셈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백제군은 앞뒤로 적을 받아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산직리와 연산천의 거리는 약 12km, 30리 남짓이기 때문에 사실상 재빠른 기동으로 두곳을 동시에 방어하는게 불가능한
거리인데다, 사실 계백이 이 거리를 두고 전장을 통솔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거리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계백이 어떻게 보완했는지저는
솔직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세 곳에 진을 펼치고 신라군과 다섯번 싸워 김유신이 "황산의 싸움을 보았느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승부를 펼쳤다는 것까지가 후손들에게 허락되는 서적에 기록된 전승입니다.
제가 멋대로 추측해보자면, 계백은 북쪽 연산천 갈래를 지키고, 나중에 투항했다는 여러 좌평 충상, 달솔 상영 등등이 산직리 방면
길목 및 파악치 못한 다른 길목을 수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열세인 전력을 두갈래, 세갈래로 나누게 되는
셈이니 백제군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결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백이 하루를 버리고 수비군의 잇점을 버려가며 죽어라 전략기동을
했던, 안그래도 열세인 군대를 나누어 수비를 했던간에, 이것은 백제군의 실책으로 만들어진 전장터이며, 김유신이 백제군의 실수를 기반으로 최선의 기동을 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3.전투
전투의 진행은 사실 백제군이 용맹하게 싸웠고, 관창의 목이 베이고, 또 결정적인 순간에 백제군이 전멸했다는 이야기밖에 전하지
않습니다만, 논산시 부근 지명을 살펴보면 황산벌 싸움과 관련된 지명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들을 살펴보자면:
양직면 산직리 부근 "승적골"-백제군이 신라군과 싸워 이긴 곳
연산면 "관동리"-관창을 사로잡아 목벤 곳
양직면 산직리 부근 "한삼천"-백제군 피와 땀이 한삼천 근방 골짜기 세곳을 타고 흘러 냇물을 이룬 곳
부적면 충곡리 남동쪽 "가장골"-계백을 가매장 한 곳
부적면 충곡리 동쪽 "수락산"-계백의 목이 떨어진 곳
따라서 전투가 적어도 세곳 -산직리 부근, 충곡리 부근, 관동리 부근-에서 이루어졌다는 가정을 할 수 있으며, 이 가정을 토대로 황산벌의 전투의 경위를 조합해 보자면:
A. 관동리에서 계백이 승리해 관창을 두번 사로잡았고, 끝내 관창을 목베었다.
B. 산직리 승적골 부근에서 백제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C. 하지만 산직리 한삼천에서 백제군의 피와 땀이 시냇물을 이룰 정도로 대패하였다
D. 충곡리 수락산 근방(즉 청동리산성 부근)에서 계백이 전사하였고, 싸움 후 거주민들이 계백을 가장골에 가매장하였다.
이 네가지 경위를 논리적으로 조합하면 이런 가정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1. 계백은 관창을 한번 살려준 후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즉 이 당시 계백은 관동리에 주둔했다.
-충상, 상영이 다른곳에 주둔했는지, 아니면 계백과 같은 진에서 종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래 가정을 보아 백제군은 산직리에서도 주둔, 전투한 것을 볼수있다.
2. 백제군은 산직리에서 한번 크게 이기고, 한번 "피가 냇물을 이룰 정도로" 대패하였다.
3. 전투의 끝은 충곡리 수락산 근방에서 맻어졌다.
4. 거주민들이 가장골에 계백의 시신을 묻은것을 보아, 막바지 전투는 가장골, 즉 산 아래에서 이뤄졌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넵 결국 쉬운 이해를 위해 지도를 그려봤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보탠 전투의 진행을 조금 늘여보자면:
1.
백제군은 신라군을 앞뒤, 게다가 하루 행군거리를 두고 맞아 굉장히 난감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직리, 관동리에서 큰
싸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군은 백제군의 불리함을 백프로 활용하여 두갈래 이상의 진격로를 두어 백제군을 압박했으며, 김유신의
향방은 애매하지만 관창의 아버지인 김품일이 속한 신라군의 갈래는 연산천을 따라 남하했고, 다른 갈래의 신라군은 산직리 북쪽
벌곡면 방면에서 남하해 백제군을 앞뒤로 압박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계백은 산직리에 산성 세개가 줄줄이
이어져 있는 굉장히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계백은 연산천을 따라 남하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따로 황산을 의지해 관동리에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나눠 신라군을 양면에서 막아내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며, 그리고 그
승부수가 어느정도 적중하여 관동리 싸움에서 계백은 반굴, 관창을 죽이는 등 크게 승리했습니다. 계백이 황산성을 의지해 수성전을
하였는지, 아니면 산자락을 끼고 야전을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2. 남쪽의 백제군은 산직리 근방에서 방어선을
만들어 신라군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산직리 북쪽 한삼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사실상 산직리 방어선이 붕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한삼천은 산직리와 벌곡면 사이, 즉 승적골 한참 북쪽인것을 보아 아마 백제군이 몇번 크게 이겨 철수하는듯한 신라군을
추격하다가 기습을 당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이 전투를 충상, 상영이 지휘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곳에서 백제군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가능성이 높은만큼 이 둘의 생포, 또는 투항이 이곳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산직리에서
먼저 있었던 대패를 딛고 신라군이 맹공을 퍼부어 백제군을 궤멸시킨것을 보아 이 싸움을 김유신이 지휘한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제가 아는 기록으로는 김유신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파악되지 않습니다.
3. 관동리에서 30리 거리인만큼 계백이
뒤늦게나마 남방전선의 전황을 확인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산직리에서의 대패가 계백을 관동리의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와 충곡리
수락산 가장골 아래 사지로 끌어낸게 아닌가 싶습니다. 계백의 계산은 산직리에서 패배한 백제군과 합류하여 수락산의 산세를
의지하거나, 아니면 청동리산성(해발 ~140m), 또는 외성리산성을 기반으로 수성전을 할 계산이었던것 같습니다. 이런 계산은
신라군은 거대한 보급인력을 거느리고 있고, 또 이들을 배후에서 공격하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신라군의 약점을 살펴 지연전의
가능성을 최선으로 둔 선택으로 파악됩니다. 이게 계백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승부수입니다.
4. 그러나 수락산의 지명
유래에서도 보았듯이(...) 계백은 수락산 아래 가장골에서 대패,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는 산세가 U자 형태로 가로막고 있어
서쪽으로 후퇴하기가 여의치 않고 (계백또한 처자식을 죽이고 부여에서 출정했으니 부여로 다시 돌아가거나, 서쪽 기벌포방면의 백제군과
합류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진하는 신라군과 북진하는 신라군에 쫓겨 포위되어 백제군이 궤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락산 위에서 마지막까지 쫀쫀하게 항전하다가 패한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일단 계백의 가매장 묘가 산 아래 있는만큼
(산위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면 굳이 산 아래까지 끌어내려서 가매장 할까요...?) 평야에서 의도적이든, 기습이든 만나 교전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봅니다.
머릿속 상상이 반입니다만, 저는 싸움이 이렇게 흘러갔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뭐 제 주변 지인들이 지적하듯이 군대를 나눈게 아니라 열세에 놓인 백제군이 프리드리히 대왕마냥 열심히 뛰댕긴게
아니냐, 아니면 기냥 가장골 앞 벌판에서 싸운건 아니냐, 뭐 이런 다른 가정들도 나올수 있고, 또 그런 가정들도 얼마든지
타당합니다. 그러나 역사, 그리고 그 중에 피와 살이 튀기고 비명소리가 삼삼하게 울리는 전쟁사를 파는 우리들이 황산벌 싸움에서
가져가야 할 교훈은 아무래도 이런저런 디테일보단 싸움 전에 일어나는 전략기동이 교전보다 두배, 세배 더 종요하고, 실질적으로
창칼이 맞닿기 전에 싸움의 승패를 가를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황산벌 싸움은 일방적으로 신라군의 의도대로 신라군의 페이스에 맞춰서
흘러갔습니다. 백제군이 네번 싸워 신라군을 막았고, 다섯번째 싸움에서 힘이 달려 졌다지만, 탄현을 잃은 상태에서 앞은 산, 뒤는
사지 평야인 지점에 놓인 백제군에게 싸움의 판도를 뒤집을만한 묘수나 결정권은 사실 없었습니다.
첫댓글 아 정말. 탁월한. 분석입니다
와 양식이다
지도가 엑박뜨네요?;;;
컴퓨터로 업로드한 것인데, 다시 한번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아직도 엑박이 뜨나요? ;;
이제 보입니다.
분석이 찰지구나.
이러고도 무장공비와 돈데기리와 책도장이 고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
전 빼주시라요 ㅡ,.ㅡ);;;;
돈데크만!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시간 나면 지도도 꺼내서 다시 멏번 정독해 보고 싶네요^^
이걸 사극작가들이 하믄 쩔텐데... 뭐, 소설도 괜찮구.
잇다다 기마스
삭제된 댓글 입니다.
mee to(2)
저도 여기저기에서 듣고 읽은걸 짜집기한거라 내공이랄것까지야;;
가끔 옛 전쟁터를 가보고 싶네요 황산벌의 위치에 대한 좋은 정보였습니다. 예전에 탄금대 전투 배치도를 보고 다음지도로 확인해보니 지형이 크게 변한게 없어 함 가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가보면 그냥 다른시골과 똑같겠죠?
탄금대 같은경우 대놓고 성역화가 되버려 예전 모습은 확인하기 어려웠던걸로 기억하는데 대부분 큰 싸움터 (예를 들자면 황산벌)의 경우 그냥 시골동네입니다 ^^;. 황산벌 싸움이 있었을때도 지금과 같은 다른 시골동네와 똑같은, 뭐 콩밭, 논두렁, 야트막한 동산, 조그만 동넷길 이런 곳을 끼고 싸웠겠죠. 도서관이나 자료실에서 옛날 지도를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도심은 휙휙 빠르게 바뀌어도 시골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