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저녁 18 km, 구보의 추억,
“사단 본부의 명령이다. 내일부터 아침에 8km, 저녁에 10km, 체력단련을 위해서 구보를 한다.“ 아침 점호에서 포대장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포대원들이 말은 안 해도 걱정이 태산 같은지 어둡기 짝이 없다. ‘오 분 이상 승차인 포병에게 구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투덜대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가능할까? 아침저녁으로 천천히 소요하듯 걷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8km 구보를 하고 저녁에는 10km 구보를 하라는 사단의 통보가 왔단다. 체력단련이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는 체력을 소모할 것이라는 걱정보다 앞서는 물음표는 ‘가능할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라면 쑤실 수밖에 없다.’는 군대의 통념에 따를 수밖에, 이런 때에는 그 시간에 탄약고나 정문이나 후문보초를 서면 좋을 텐데, 그것은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아침이 왔다는 기상나팔이 온 천지를 깨우고, 눈 부비며 일어나 배낭부터 챙기고, 연병장에 나왔다. 저마다 상기된 표정이다. 간단한 포대장의 훈시가 있고, 8km 구보에 나섰다.
토우부대를 지나 철원에서 오지리 지나 서울로 가는 43번 국도에 나서면 이른 봄에 심은 모들이 푸른 것이 마치 초원 같이 펼쳐진 길을 4 km를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침 구보고, 저녁에는 5km를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늦봄과 여름 사이 들판은 싱그럽지만 완전군장을 했기 때문에 무게가 만만치 않다, 수통에 물은 금세 비워지고, 목이 마르면 달리 방법이 없다. 벼 이삭들을 헤치고 햇살에 데워져 미지근한 논물을 벌컥벌컥 들이미시고 다시 구보에 나서는 장병들. 그나마 가끔씩 보이는 사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를 감해주었던 것은 한창 피가 끓는 젊은 장병들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구보를 끝내고 먹는 아침밥은 얼마나 다디달았던가? 그런데 하루 일과를 끝내고 오후 네 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저녁 구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전보다 2키로 더 뛰는데, 마치 열 시간은 더 뛰었던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구보를 마치고 돌아올 때 늘 생각나던 구절이 이상의 <날개> 첫 부분이었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肉身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아침 구보에서는 느끼지 못하는데, 저녁 구보를 한 뒤 피로가 산더미처럼 몰려오면서 느끼는 감정, 구보를 마치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서, 내무반에 들어서는 그 순간에 추억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던 그 청량한 느낌, 그게 바로 고통 속에서 다가오는 참된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때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글감을 마구 휘갈겨 썼다. 이상의 <날개> 속 주인공처럼,
한 달, 말이 쉽지 정말 쉬운 것은 아닌 아침과 저녁의 구보,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부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도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인간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적응한다”는 것과‘군대 좆 같다“고 투덜대면서도 견딜 수밖에는 없는 의무감 때문, 넓고 깊게 말한다면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책무 때문이었다.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군대라는 대학은 하버드대나 예일대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실용지식과 학문을 등록금도 내지 않고 엄청난 월급( 이등병 690원, 병장 2,400원)을 주면서 가르쳐준 학문의 요람이었다.
미증유의 국난이라는 탄핵 때문에 경찰관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떠오른 군 생활의 추억이었다.
2025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