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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듯이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른 인간입니다. 삶의 자세가 틀리고 자라난 배경 역시 다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평생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사랑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교회·사회·나라는 분열되고 맙니다. 사랑의 시작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자 표지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고 가장 의미 있고 행복했던 것은 사랑한 일이고 앞으로 남은 것은 사랑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합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원주] 서로 사랑하라! 김창수 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친구는 어떤 사람? 친구는 “있는 그대로 오라” 체험이다.
[춘천] 무언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장성준 신부
오랜만에 동기를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난 이후 한결같이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주던 친구였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로도 줄곧 얼굴을 보며 지냈습니다. 그런 친구를 몇 달을 못 만났으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항상 마음은 있지만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이 좀 어렵다보니 만나지 못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의 첫마디는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는 것입니다. 왠지 자신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하고 지낸 것이 꽤나 미안했나 봅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둘이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가 있어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5,9-17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요즘 농부들의 심정과 고초를 많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립니다. 한 여름의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며 수시로 찾아갑니다. 마치 자식 키우는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걱정입니다. 잠을 자도 걱정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애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오랜 노고를 기꺼이 참아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기대는 무엇입니까? 풍성한 수확입니다. 알찬 결실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왠지 손해 본다는 느낌 드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억울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가면 그만인데도 꿀맛 같은 새벽잠을 포기하십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그 꼭두새벽부터 본당으로 향합니다. 봉헌금도 내야지요, 교무금도 내야지요, 2차 헌금은 또 왜 그리 잦습니까? ‘재수 없으면’ 신축본당으로 떨어져 뭉칫돈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때로 야단맞아가며 내 시간 허비해가며 봉사활동에 전념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손해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거두게 될 풍성한 영적 수확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넘치도록 베푸실 영원한 상급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영혼의 열매,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비결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쉬워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분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절실히 와 닿는 깨달음 한 가지가 있더군요. 연약한 우리이기에, 흔들리는 우리이기에 가끔씩 우리가 그분을 떠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간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묵묵히 침묵하십니다. 빨리 돌아서기만을 간절히 고대하십니다.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우리, 자꾸만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의 힘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활 6주일 - 십자가, 행복의 문턱
저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조부모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중병인줄 알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대신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니,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행복하지도 못하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살아있을 때 행복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았지만, 행복에 이르려면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저는 행복하기 위해 먼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면 짜릿한 무엇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저는 서로의 사랑이 확인 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다가,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서로 사랑을 확인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달았고,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참 ‘행복’을 누리시는 것을 보아도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랑 때문에 행복해진다면 더 완전한 사랑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보기로 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똑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과연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을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에 가장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때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온통,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셨겠습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고통스럽고, 굴욕스러운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더 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도 그만큼 더 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당신의 잃었던 애인인 교회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니 해산의 고통으로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 태어난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와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듭니다. 아담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만나게 된 하와는 아담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남자가 여자가 없으면 더 이상 남자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아담도 자신의 살에서 나온 살이고 뼈에서 나온 뼈인 하와를 보면서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짝인 교회가 없었다면 인간으로의 예수님의 강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사랑을 교회와 하고 싶어서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한 몸이 되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아들은 그대로 교회와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을 떠나서 제 멋대로 놀아나고 있었고 참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 번째 아담을 십자가에서 깊은 잠에 빠뜨리십니다. 당신 아들의 옆구리를 찢어도 아프지 않도록 깊은 잠, 즉 죽음의 잠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론지노의 창에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열립니다.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인간의 ‘죄를 씻는 희생’이고 ‘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피와 물’이 바로 모든 ‘성사’의 원천이고 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죄가 용서되고 성령님이 오시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성령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에선 ‘피와 물’을 통한 새로운 하와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의 의미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실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인류와 당신과의 사랑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이 하와가 태어나는 순간이요, 당신의 짝을 만나는 순간이기에 가장 행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목적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즉, 십자가의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다운 행복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죽음까지 이르게 될 때 신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행복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들도 못 박히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 당신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온전한 신적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2009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나해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Jn.15.12)
제1독서 사도행전 10,25-26.34-35.44-48
제2독서 1요한 4,7-10
복음 요한 15,9-17
제가 얼마 전에 어느 곳에 갔다가 어떤 이름을 보고서는 이곳이 도대체 무슨 곳인가 했습니다. 그곳에 적혀있는 이름은 “팬티 내리는 곳”이었거든요. 너무나도 이상했지요. 아니 사람이 왜 괜히 팬티를 내리겠어요? 하지만 그 장소를 가보고서는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바로……. ‘화장실’이었습니다.
솔직히 이상한 쪽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지요. 사실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대학교 복사실에 뚱뚱하고 못생긴 여학생이 책을 복사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안에는 아주 잘 생긴 남학생이 열심히 복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학생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잘 생긴 이 남학생이 복사를 하다 말고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 반... 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그 못 생긴 여학생은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까지 흘릴 뻔 했지요. 하지만 그 잘 생긴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나.. 나머... 나머지 반도 금방 끝납니다... .” 이 남학생은 여학생이 맘에 들었던 것이 아니었지요. 그는 말을 더듬는 잘 생긴 남자였을 뿐이었고, 여학생은 남학생의 첫 마디 반했다는 말에 착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자주 착각에 빠집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겸손하지 않지요. 더욱 더 끊임없이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며, 더욱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 안에서 우리들은 착각의 늪에 점점 깊숙이 빠질 뿐입니다. 특히 사랑의 경우에는 더욱 더 착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는 사랑을 베푸는데, 상대방은 상대방을 받으려고만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본전 생각난다고, 억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을 보고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본전 생각난다. 억울하다.” 우리들은 이런 말 많이 하지요. “미쳤어?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게?”라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나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현명하시고,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은 어떠한가요? 계속해서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계십니다.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인간이지만,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죄를 범합니다. 자기 말고도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 자연까지도 파괴하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과 함께 있자니 귀찮고 힘들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옛날 노아의 홍수 때처럼 쏵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이 세상은 더욱 더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 덕분에 우리들은 큰 이득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랑하며 열심히 살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데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이제는 우리 하나하나가 ‘보시니 참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이 주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라파데르) 분노('좋은 글' 중에서) 어느 날 한 신부님이 분노에 대해서 강론을 했다. 미사가 끝나자 한 부인이 신부님께 다가갔다. 그 부인은 자기가 성질이 너무 급해서 고민이라며 신부님에게 자기 문제를 고백했다.
“신부님, 저는 작은 일에 가끔 폭발을 하지만, 그리고나서는 뒤가 없습니다. 금방 풀어버립니다. 마음에 두고 꿍하고 있지는 않지요. 일 분도 안 걸려 그 사람하고 그 자리에서 다 툭툭 털어버리고 끝납니다.” 신부님께서 그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정중히 말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오래 안 걸립니다. 그러나 한 방만 쏘아도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다 박살나지요.” 분노는 터지고 나면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분노의 폭발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분노를 느낄 때 하느님을 불러보자. “하느님. 정말 못 참겠습니다. 속히 나를 도와주소서.” 그 순간 성령은 우리를 도와 참고 넘어가게 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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