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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측이 주장하는 12.12신군부설은 김대중을 거절한 전두환 숙청, 국가정보권력을 김대중 심복 이종찬에게 몰아주기 위한 전두환 거세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윤상원의 구호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를 맹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5.18 당시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유언비어가 판을 치게 됩니다.
1980년 5월 19일 시위당시 권색양복을 걸치고 앞머리 숱이 적은 중년 남자가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고"
이소리를 고장난 레코드 판 모양처럼 외치며 선동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사조직 간부인 이사람은 5월 18일 오전 8시부터 이 유언비어를 외치기 시작하여 영상에 담긴 5월 19일 까지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 이 유언비어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하러 왔다"
"전두환의 광주 살률작전"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했다"
로 확대됐고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본적지가 전남 화순이이지만 전두환의 아버지 전상환선생이 만주에 독립운동하러 떠난 것이 화근이 되어 할아버지 대에 화순을 떠나 경남 합천으로 야반도주하다 시피 이주한 전두환이 무슨이유로 또 무슨 권한으로 그 같은 명령을 내렸을까요?
전라도 씨를 말리고 싶은 전두환이라면 왜 최측근에 장세동이 있을까요?
5.18자체가 12.12와는 상관없는 사건이였고
더구나 전두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임은 역사와 증거가 말하고 있습니다.
5.18은 북한의 남침계획과 김대중 개인의 야심이 부른 참극이였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김일성, 대한민국은 김대중이 근대사 대한민국의 역적이란 말입니다.
무고한 시민의 등뒤에서 총질을 한 시민군
총기사망자 대부분은 광주시내에 단 한명도 없었던 공수부대 진압군의 M16총알아닌 시민군이라고 자칭하는 폭도들의 칼빈 총알에의해 등뒤에서시작된 총상에 의한 사망자이고 부상자 대부분은 진압군의 곤봉에의한 부상보다는 시민군이라고 자칭하는 폭도들의 차량에의한 부사이였음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사망자 유형을 보면 사망자 164명중 학생 33명, 일반인 119명, 신원불상자 12명.
칼빈사망 학생 22명, M-16 사망자 10명, 미상 1명
칼빈사망 일반인 58명, M-16 사망자 26명, 미상 35명
학생, 일반인 사망자 152명중 총상에 의한 사망자는 116명으로 76.3%입니다.
총상 사망자중 칼빈 즉 시위대총상사망자는 80명, M-16 즉 진압군총상사망자는 36명입니다.
하지만 5.18측은 20여년이 지난 후에 그 반대라고 합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겠지요.
실제로 시민군이라고 자칭하던 폭도들이 무장을 하고 광주시민을 굻어 앉혀 총구를 겨누는 등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은 상황실에서 업무보고를 받던 중 김대중 수하 윤상원이 뛰어 들어와 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 수습위원들의 무조건 무기를 반환결의를 한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짔었습니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은 20여명의 무장병력을 데리고 올라가 복도와 문앞에 배치시키고 지시하면 전부 사살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반환 거부의 주체는 윤상원이였다는 겁니다.
윤상원은 YH사건 배후 선동인물로 부마사태를 촉발시키고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까지 만든 광주지역 노동운동 총지위자이자 김대중 조직 핵심인물입니다. 아직도 담배피우는 윤상원의 사진을 보며 닮고 싶어하는 정신병자들이 있습니다.
총기사고로 인해 무기를 반환하자고 했던 시민에게 총살형 위협을 가하였던 무장폭도들이 바로 민주를 위한다는 시민군대장이고 김대중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5.18진상규명에서 중요한 최초의 무장시점, 최초 총기발사, 최초 총기발사에 의한 사망자, 5월 19일 15시 나주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객관적 증거자료는 무시하고 아직도 전두환을 욕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5.18진상규명이 아니라 전라민국을 만들고 김대중을 영원한 전라민국의 왕으로 자리매김 하여 그 후광으로 정권을 잡으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공수부대가 투입하기전 무장을 했고, 충정이 시작되기전 많은 사상자를 낸 5.18입니다.
객관적으로 부정할수 없는 시민군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자료가 나오자 5.18추종세력들은 전두환이 시켜 시민복으로 갈아입은 공수부대의 만행이라고 아직도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은 최규하대통령이며, 당시 계엄군 사령관은 이희성이였다는 것.
이같은 사실은 상관없이 아직도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것만 들으며,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김대중 떨거지들. 그들이 5.18의 주범인것입니다.
민주를 외치던 자들은 지금 어떻습니까?
아직도 권력을 잡기위해 시뻘건 눈으로 왜곡된 5.18을 팔고 다닙니다.
참고.
노무현의 아버지 노판석의 정체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6.25 당시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했었습니다. 노무현의 고향 전라남도 강진(1953년 5살 때까지 그 곳서 살았음)에서 약 20~30명 가량의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를 했지요. 이후 노판석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됩니다.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가 철찬지 원수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노판석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노무현의 조부, 즉 노판석의 부친이 일제시대 때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때 노무현의 조부가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동네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괄시와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갖고 있다가 6.25가 터지고 나서 인민군이 전남 강진을 점령하자,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철저한 앙갚음을 하게 됩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노판석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절에도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지리산에서 가까운 남원부근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지 않았겠나 하는 큰 의혹이 듭니다. 왜냐하면 당시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자발적으로 식량과 물품을 대줄 민간인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요. 1953년 들어서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남한 전역에 치안과 질서를 확립해 나가자 노판석은 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당시 5살 되던 노무현과 노건평을 데리고 야밤에 도망을 갑니다. 왜냐하면 고향에 그대로 눌러 있다간 동네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야간에 목포항(목포 바로 옆이 영광 그리고 그 바로 옆이 강진입니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주를 하게 됩니다. (자기네 동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족을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한 노판석은 산골 오지인 경남진영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그 곳서 호적을 새로 만들지요(당시에는 전쟁 직후였으므로 호적을 새로 만들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리곤 다시 김해로 도주를 합니다.(김해는 진영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후부터 노무현네 집안은 경상도 출신 행세를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노무현은 경남 김해에서 역시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던 권오석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권오석은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로서 지역주민 11명을 살해한 경력의 소유자 입니다. 이후 노무현은 고시를 패스, 판사직을 채 1년도 못되게 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노무현을 크게 도와준 이가 바로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김광일 변호사 입니다. 김광일 변호사는 수습 변호사로 자기 사무실에 온 노무현에게 돈까지 빌려주면서 노무현의 변호사 개업을 도와줍니다.
이 때 빌린 돈을 노무현은 돈 버는데 수완이 좋아서인지 불과 3개월만에 다 갚습니다. 또 김광일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시국사범들에 대한 인권 변론을 하는 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참여시키기도 합니다.
바로 그 같은 계기가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인권변호사라는 (사실 노무현과 문재인에게는 그들의 행적으로 미뤄 볼 때, 인권 변호사라는 직함이 전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호칭이 따라붙게 되는 시작이 된 것이지요
김광일 변호사 덕분에 시국변론을 몇 번 하던 노무현은 역시 김광일 변호사 덕분에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김영삼의 추천으로 공천을 얻게 되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됩니다.
그런데 노무현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훨씬 지난 후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그 책에 노무현은 'YS로부터 봉투를 많이 받아서 원도 없이 써 봤다'라는 글을 게재합니다. (바로 여기서 노무현이란 인간의 본색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5공청문회가 열립니다. 노무현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집니다.(완전 계획적인 행동이었지요). 이 덕분에 호남지역 사람들과 김대중의 눈에 들게 됩니다.
얼마 후 민자,민주, 자민의 3당 합당 반대에 나서면서 이를 명분으로 합당을 극력 반대 합니다. 꼬마 민주당에 잠시 머물던 노무현은 김대중 진영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과 노무현의 관계는 양부, 양자 관계까지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무현의 정치입문과 김대중과의 관계를 보다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김대중과 노무현의 관계는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모종의 관계와 거래가 있지 않았나?'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즉 김대중과 호남세력을 비롯한 조직 들이 노무현과 그 집안에 대한 과거와 진실을 감춰주고 보호해주는 세력들이 존재했다는 의혹이 매우 큽니다.
이젠 그러한 의혹을 밝혀야 할 때 입니다. 진실을 감추고 숨겨주고 왜곡시켰던 존재들의 진상을 밝혀야 할 시점이지요.
노무현 장인 (권오석) 이야기
권오석에 의해 학살된 양민 유족 중에 변재환 박사(58세)가 있다.
그는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의 대표다.
그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權오석씨는 태생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權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였다. 권씨는 사상관계로 의심을 받아 다른 면에 있다가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6.25가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었다. 눈이 먼 권씨는 동네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 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2002년 5월 3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장인의 묘소에 참배를 하면서
“장님(장인 권씨)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권양숙은 아버지 권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때 나는 어려서 부모님 일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은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후천적으로 실명한 권씨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권씨의 경우 장님이 된지 얼마 안 되었고 남편이 양민을 등급별로 손으로 판정하고 있을 때, 옆에서 부축했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의 장모였다.
노무현 부부의 거짓말에 대해 변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장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 되나. 나는 권양숙씨와 동갑이다. 나도 아버지를 통해 숙부님의 학살사건을 낱낱이 듣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렸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것인가? 더욱이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당시 권양숙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갔는지 들었을 것 아니냐?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서 안 것은 아니지 않나.”
“학살당한 11명의 유족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6.25 이후 부모 두 사람이 있어도 어려운 살림인데 아버지 없이 산 유족들은 그야말로 피눈물 흘리 는 세월이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했더라면 유족들은 부모형제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지 모른다. 노무현 부부와 장모는 죄 없이 죽은 11명의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사과해야 한다”
권오석의 좌익 부역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 실록’에 있다.
피해자측 증언들에 따르면 권오석은 일제시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일했을 정도로 똑똑해서 양민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인민 재판에서 검사, 변호사, 판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생사를 가름하였다고 한다.
'실록' 책자에는 권오석이 죽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피해자 측 주장은 11명이다.
卞百燮(4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卞先燮(34,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卞曾燮(3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金玉甲(5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金万祚(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시락리
金聖甲(46, 농업) 창원군 진전면 창포리
朱正浩(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朴宗洙(51, 區長)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朴周漢(47, 농업)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鄭奉柱(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광촌리
權五乾(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피해자 유족의 주장 중에는 권오석이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으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또 치안대가 되었겠는가?
눈이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시각장애인을 간부로 기용한 사실은 권오석의 좌익사상이 투철하였고 좌익활동에 적극적이 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한다
송정호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양민학살로 수감 중이던 권오석이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폐결핵 등의 질병 때문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5.16 이 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27일 재수감됐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김일성이 죽기 전 남조선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과 의형제, 그리고 막내동생과 그리운 여인. 이들 4명을 가장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일본의 左派 거물 정치인 故 우스노미야 參의원과 김일성 사이에 1974년 9월 평양 대동강 별장에서 2박3일 회담을 하고 남긴 '김일성-우스노미야 단독회담 보고서'라는 비밀 보고서가 일본 공안 조사청 지하실과 평양 김일성 궁전 비밀금고에 남아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우스노미야 를 통해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는 형제간 이고 내가 2살 더 많으니 형이 되는 셈이지요. 또 아우님과 남조선의 김대중이 형제지간 이라고 하니 우리는 3형제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3형제가 손을 잡으면 아시아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우님께서 일본 총리가 되시고 막내 아우님인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되면 우리 3형제가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 큰소리 치는 아시아 의 龍이 될 것 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또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韓完相(한완상) 대한적십자 총재이며,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은 前 YWCA 총재를 지낸 孫寅實(손인실) 여사 였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를 넘어서' 를 보면 손인실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상당부분 묘사돼 있는데 한때는 남조선으로 밀사를 보내 북한으로 탈출시키려고 까지 했었다.
그 다음으로 꼭 만나고 싶어한 - 평양으로 탈출까지 시키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 로동당·빨치산 혁명투쟁 교육시간에 등장하는 '남조선 남로당 권오석 동지의 투쟁사'의 그 권오석이다.
권오석 동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임에도 6.25 민족 통일전쟁(?) 에 앞장서 남조선 반역자들을 가려내 처단하는데 혁혁한 攻을 세웠으며, 馬山지구 전투에서 미군 몇 명을 포로로 잡아 오는데도 큰 功을 세웠다. 그는 패전 후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으나 끝까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은 채 북조선 조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며 감옥 안에서 최후를 맞은 영원히 수령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남조선 빨치산 투쟁 영웅' 이었다. 그 위대한 '남조선 빨치산투쟁 영웅'의 사위가 남조선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 입성 하는 날, 평양 방송은 며칠 동안 권오석 동지의 공로와 그 영웅의 사위와 딸이 남조선 대통령이 된 사실 을 방송하며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정신이 승리했다'고 열 올리며 광분했다.
또 금강산에 "김일성 수령님이 가장 사랑하는 남조선 영웅 권오석 동지 의 딸 청와대 입성" 이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까지 크게 만들어 걸어 놓았 는데 한국 국회에서 말썽이 일자 이를 철거했다는 소문도 있다.
아직도 속고계십니까?
그들의 권력욕심에 민주라는 정의를 팔아버리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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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혹,역사학도 님의 글 인가요?
제 글과 자료들이 많이 인용되어 편집되었지만 제 글은 아닙니다. 저라면 "김대중을 거절한 전두환"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거절한 장군은 전두환이 아니라 정승화였습니다. 12.12 사태 사흘 직전 제4공화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최규하 권한대행 단독 후보였던 이유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양김씨가 대선후보되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사상 문제가 있어 안된다고 기자 인터뷰로 공적으로 밝혔습니다. 따라서, 만약 12.12 사태가 안일어났다면 김대중은 사면복권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2.12 사태가 일어나고 정승화가 예편되었기에 김대중에게
사면복권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이 열리자 2월 중순 김대중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려고 애썼습니다. 비록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만나주지는 않았지만 김대중 사면복권 서류에 서명을 해주었기 때문에 2월 29일자로 사면복권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대중의 경우 보안사령관의 서명 없이는 사면복권될 수 없었습니다.) 1980년 1월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인사삼아 시국사범들을 사면복권시킬 의향을 밝혀 김대중도 사면복권을 기대하고 싶었지만, 조총련 산하조직 한민통 괴수였던 김대중의 경우에는 보안사령관 서명이 있어야만 사면복권 절차가 완료될 수 있었는데, 김대중이 원하는 대로 전두환 장군이 서명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김대중을 거절한 전두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라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니, 위의 글은 제 글은 아닙니다.
인터넷에는 한나라당 민주당 알바들, 각종 시민단체 알바들, 노조단체 알바들과 조선족들 북괴요원들 까지 기승을 부립니다. 순수한 글을 올리게 되면 그런 패거리들이 바로 댓글로 논지를 훼손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합니다.
웹상에도 패거리들이 있고, 그런 텃새아닌 텃새를 부리는 덜 떨어진 인간들도 많습니다.
역사학도 님, 빵구 님! 바른 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