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길
천만이 넘는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곳이지만,때때로 내게는 서울이 어느
여행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영화감상을 하는 친구들 모임이 있다.(낙영회)
오늘 오전 종로3가 낙원상가에 있는 낭만극장을 갔었다.
낭만극장을 찾아 가는 길은 ‘송해 길’을 경유하게 되어있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앞에 작은 찻길을 사이에 두고 ‘송해 길’ 입구 표시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낙원 상가까지 약 240M 구간이 송해 길이다.
전철 종로3가역 5번 출구를 나서면 거리의 상징인 ‘송해 동상’과 팻말이 보인다. 거리 양편으로는 송해 커리커쳐가 붙은 가게들이 눈에 뜨인다.
주변에 기원이 많고 실버극장이 있어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보니,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문화시설이 많다.
악기판매 전문매장 낙원상가 건물 4층에 헐리우드극장이 있었다.
그러나 복합 영화관 시대를 맞아 이 극장은 시니어 세대를 위한 실버영화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들 일행이 종종 찾아가는 낭만극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민 MC 송해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며칠 만에 ‘송해 길’을 걸으며 왠지 허탈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별이 진 자리엔 추억과 적막이 흐르는 듯 했다.
한국 대중문화 예술계에 송해 라는 큰 별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도 구수하고 재치 있게 대중을 웃기던 그가 정작 떠날 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적막했다.
‘전국 노래자랑을 자기 고향 황해도에서 하고 싶다’ 던 그 꿈을 어떻게 달래고 멀리 떠나셨을 가.
눈시울 적시며 보고 싶다던 어머니를 저승에서는 만나셨는지.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을 흔들던 어머니 ...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칠십 년
보고 싶어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 ”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유랑 청춘’으로 노래했다.
가로 막힌 38선도 77년, 동족끼리 적군을 무찌른 625전쟁도 72년, 원한 서린 휴전선도 69년 세월이 흘러갔다.
애달픈 천 만 이산가족은 다시 만날 기약도 없다.
민족의 수난과 시련은 아직도 계속되는 중 이다.
송해 선생님은 일찍부터 코미디언으로 가수로 방송인으로 활동했지만 늘 말석 주변에 있다가 ‘전국 노래자랑’ 사회를 맡으면서 국민 스타가 된 분이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풍모에 하루 소주를 한 병씩 마시는 애주가셨다.
송해 길의 도로명은 수표로다.
송해 선생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고, 험난했던 역사의 풍랑을 넘어 국민 희극인 으로, 대중 예술의 산 증인으로, 오랜 세월 우리를 울고 웃게 한 한국 연예계의 살아있는 역사다.
종로구 낙원동은 그가 50년 넘게 방송과 행사를 하면서 생활의 근거지로 활동했던 지역이며, 주민들과 강한 유대감과 낙원동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실향민인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명예도로’ 지정 요청과 오랜 세월 동안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전 국민을 사로잡은 대중문화계 거목의 업적을 기려, 명예도로 ‘송해 길’ 로 지정되었다.
향년 95세로 고인이 되신 송해 선생님.
KBS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34년 동안 진행한 최장수 진행자였다.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첫댓글 부모님의 정성으로 나고 자라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살다가는 것인지
누구나 생각해 보도록 했던 시간이었지요.
모두에게 과제를 주었던 그때였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