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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7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49,8-15
복 음 : 요한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현미경을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이 어디서 빌려왔다면서, 현미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미경의 슬라이드글라스 사이에 나뭇잎, 물, 흙 등을 넣고는 현미경 렌즈로 보았습니다.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이 현미경 렌즈 안에 있었습니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 배율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떠올리며, 하느님이 비록 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커지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현미경을 장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며 안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의 현미경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했다는 점을 두고
유다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을 삼았다.”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며
당신과 아버지께서 공통으로 지니신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하나임을 보여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임을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중풍 병자의 치유보다 더 큰 일들을 당신 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하느님만이 지니신 권능, 곧 부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되살리시는 분으로서 당신께서 아버지와 대등하심을 또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현미경 없이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 없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계몽사’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저도 계몽사의 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계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을 깨우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진 문명과 문물이 뒤쳐진 문명과 문물을 이끄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를 살면서 계몽의 시대보다는 재미와 의미의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은퇴한 후에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시대입니다.
재미와 의미가 만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공감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계몽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계몽의 시대에는 권위와 가식이 있었습니다. 차별과 통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계몽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공감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권위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권위와 질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성사입니다.
이보다 완벽한 공감은 없습니다.
교회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계몽의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시어 이사야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나자로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청각장애자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감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명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명이 있다.
생명은
변화이며 신뢰이다.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가
우리들의
참된 변화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에게는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
이미 흐르고 있다.
신뢰는 신뢰로
이어진다.
지금이
바로
신뢰할 때이다.
사순시기는
참된 자아를
만나는 때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신뢰할 마음이 없다.
도움을 주고
사랑할 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살아있는
지금의 선택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신다.
살아나는 생명은
하느님의 뜻이다.
삶의 여정이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여정이다.
생명은
처음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그 여정이다.
영원하신 사랑
영원한 생명을
진실로 진실로 믿는다.
하느님의 구원을
믿어야 할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해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대등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다섯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릴 권한을 착한 종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고을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서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곧 구원에 따른 ‘심판’이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죄로 심판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구원받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결혼한 지 6주 만에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70년 뒤에 알게 된 여인이 있습니다.
1940년 스물두 살의 페기는 공군 조종사 빌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군 중위였던 빌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부부는 쓰라린 이별을 합니다.
페기와 빌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 내내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하며
긴 전쟁이 끝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재혼도 하지 않으며 7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폐기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회의원 톤 베리에게 보낸 편지가 답장이 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는데,
빌리는 기록에 따르면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라고 하고 생사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빌리와 관련된 모든 곳을 수소문하며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기의 삼촌이 직접 군에 찾아가 군사기록을 밝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 뒤 페기와 친척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한 프랑스 여성이 얼마 전 이미 복사본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페기와 친척들은 당장 그 여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군의 도움으로 그 여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빌리는 프랑스 마을의 영웅이었습니다.
1944년 빌리는 적의 폭격을 맞아 방트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있었고
전투기는 화염에 싸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냥 추락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종간을 마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추락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빌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고
70년 동안 매년 빌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방트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빌리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빌리의 유골은 노르망디 국립묘지로 옮겨졌고,
방트 마을 빌리의 무덤은 영웅을 추모하는 의미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페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70년 만에 남편을 만난 페기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결혼 6주 만에 사라진 남편’,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빌리의 희생으로 방트 마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심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교회라는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십니다.
교회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다스림을 ‘왕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교회라는 마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교회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 하늘 나라에서 여러 고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기듯, 우리도 사랑하면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마을이 있고, 마더 데레사가 만든 마을이 있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마을이 있습니다.
모든 마을은 그리스도를 따른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결과물은
이렇게 나의 피로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입니다.
주님의 뜻에 저를 맞춥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 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꼭 해야 하는 일인지? 가끔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참된 믿음은 어려움을 겪을 때에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