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24절 ~ 33절: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러므로 혹이 앗수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하게 하신 열방사람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저희를 죽였사오니 이는 저희가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앗수르 왕이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하나를 그 곳으로 데려가되 저로 그 곳에 가서 거하며 그 땅 신의 법으로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기도: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이 땅에서 비록 나그네 생활을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갈 수 있도록 해 주셔서 짧디 짧은 이 나그네 생활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늘 진리와 성령으로 함께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물질을 하나님으로 삼아 물질에 등을 기대고 세상 살을 찌우면서 이렇게 소원 목적적으로 살고 있지만 저희들은 이 세상이 나그네 생활이니 나그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인 줄 압니다.
이 나그네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만들어 내 놓으신 하나님의 그 목적 그 성품을 부지런히 잘 입고 갈 수 있는 지혜로운 당신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시시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들어 일으켜서 우리들에게 붙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하늘나라를 향해서 모든 사건 환경을 잘 이용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어 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시고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잠깐 동안의 이 세상을 목적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저 천국을 향해서 늘 마음이 달려가는 복된 저희들의 신앙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같이 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가끔 사마리아로 하나님의 사자가 내려와서 사람을 해친다고 앗수르 왕에게 보고를 하니까 이 보고를 받은 앗수르 왕은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 ‘없었다고 합니다’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이 노해서 그런단다’ 그래서 포로 중 제사장 하나를 선출해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라고 앗수르 왕이 부탁을 합니다.
이름은 이스라엘이요, 영토도 이스라엘이지만 그 속에서 주장하는 운전자는 앗수르입니다. 간판은 교회이지만 그 속에는 세상천국을 위한, 지상천국을 위한 현실목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수목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민감하게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지자’ 하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껍데기는 이스라엘이지만 속에는 앗수르라 그 말이요. 그러니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앗수르 왕의 명령대로 제사장이 올라와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워 가지고 이 법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섬기고 있으면서도 목적은 재난을 피하자는 거지요. 하나님 섬기는 목적이 재난을 피하자! 이것은 모두 육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신의 성품을 진하게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수목적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특수목적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수목적이고 특수계시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법이지요. 그러면서도 시내산 밑의 이스라엘은 애굽의 풍속 습관대로, 애굽의 법대로 살고 있더라 그 말이요. 그들이 애굽을 탈출했지만 노예의 위치에서 살고 있더라 그 말이요. 혈육적으로 명칭적으로 선민이지만 너무나 애굽성이 많이많이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의 법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나라법도 아닙니다. 옛날에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하므라비 법을 많이 공부를 한 고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내산에서 받을 때에 그 하므라비 법이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 말이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법은 다릅니다. 이거는 본질적 근본적으로 근원이 다르다 그 말이요.
혹 어떤 사람들은 모세 자기가 하므라비 법을 배운 거기에다 하나님의 법을 믹샤시켜가지고 가르쳤다는 말도 하지만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에 올라 갈 때에는 모세의 두뇌 속에는 애굽의 법전은 없습니다. 완전히 뽑혀서 올라갔다 그 말이요.
또 성경의 ‘제 5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그 말씀은 유교에도 있습니다. 유교도 효도를 가르치는 거지요. 그러나 성경, 하나님말씀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이것은 효도를 가르치는 거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개념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거라 그 말이요. 목적이 그렇다 그 말이요. 단순히 효도를 하게 하기 위한 그 목적이 아니라 그 말이요. 방편은 효도를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는 겁니다. 너도나도, 부모도 자식도 믿는 자는 다 나중에 천국으로 갈 터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일반도덕성 도덕법에다 기독교 성경의 도덕성으로 보충을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하면 기독교가 일반 도덕운동을 하게 됩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 법을 주신 목적은 당신의 성품을 입혀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갖게 하기 위한 그 법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율법조문이 새롭다가 아니고, 글자가 새롭다가 아니고 글자는 세상 도덕적인 말과 비슷하고 똑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목적이 새로운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나갑니다. 처음에 홍해를 건넜을 때에는 생활과 언어와 풍속과 습관이 애굽에 젖어 있던 것이 시내산의 법을 받고 법대로 사니까 조금씩 조금씩 이것이 달라져 나간다 그 말이요. 사람이 서서히 바꾸어져 나간다 그 말이요. 물론 아침 점심 저녁 사는 생활방식은 애굽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사는 생활방식은 불신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목적 방향 그것은 가나안으로, 천국의 사람으로 이렇게 새로워져 간다 그 말이요.
과거로 돌아가서 구약 때에 그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애굽성이 푹 젖어 있었다 그 말이요. 애굽성에 푹 젖은 그 사람들은 하나 둘 광야에서 다 죽어가더라 그 말이요. 사람이 속이 안 바꾸어지니까 땅이 갈라져서 죽이고, 또 불뱀이 와서 물어 죽이고 이렇게 해서 다 죽이더라! 이제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죽어버리고 광야에서 새로 출생되는 아이들은 애굽을 모르니까 시내산의 법으로 자꾸 채워져 들어가지요. 시내산의 사람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법의 사람이 된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의 그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성은 성품적으로 애굽성을 자꾸 죽이고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 거듭난 그런 사람으로 들어가는 것이 계시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겨드리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고 백성들을 바꾸어 주려고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거라 그 말이요. 말씀을 주신 거라! 그런고로 애굽성이 시내성(율법성)으로 바꾸어져야 하는 겁니다. 40년 만에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는 다 바꾸어졌습니다. 또 안 바꾸어진 것은 전쟁에서 죽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여기서 신학적으로 조금 보면 애굽에게는 외소와 내소가 없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애굽에게는 내적 감화성도 없고, 밖으로 오는 그런 명령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그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게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게 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부르심을 받고, 겉으로는 귀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홍해 이거는 중생을 의미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중생이고, 거듭나는 거고. 광야는 성도의 교회생활을 말하는 거고, 요단강은 죽음의 선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야지요. 요단강은 죽음의 선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체 이스라엘보다도 교인 하나를 가리키고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 그러면 그 속에 이스라엘 교인 하나 하나 다 있는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말을 할 때는 교인 하나를 가리킨다.
요단강을 건너서 사사의 치리를 받을 때에도 역시 시내산의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섬겼고, 또 사사시대를 지나서 통일군왕시대에도 역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다음에 통일군왕시대를 지나면서 남조 북조가 갈라지면서 남조도 역시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고, 북조도 역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올라왔을 때에도 역시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역시 앗수르 왕에게 정복이 되고 앗수르 왕이 시킴에 있어서도 시내산에서 받은 그 법, 광야에서 붙잡고 살던 그 법을 가지고 시켰습니다. 본문에 그렇게 돼 있지요. 앗수르 왕이 사람을 불러다가 제사장을 보내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잘 아는 자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치라’ 그랬다 그 말이요. 앗수르 왕이 그 소리를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껍데기는 다른게 하나도 없어요. 누가 왕이 되었던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섬기는 것은 다른 게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게 다 보이지요? 그런데 다른 것은 알맹이가 싹 바꼈단 말이요. 알맹이가 바껴져 버렸어. 주인이 바껴져 버렸어. 속에 주인이 바껴져 버렸어. 그런데 바뀌어진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이요. 오늘날 그거 볼 수 있잖아요?
시내산의 법은 온전자 만드는 것. 그러나 앗수르 왕이 하라고 해서 한 것은 육적으로 오는 재난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그랬단 말이요. 그러니까 주격이 달라졌고, 목적이 달라졌지만 방편은 같더라 그 말이요.
그런고로 ‘하나님을 섬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 때 내 속에 들어 있는 이것을 심사해야 되겠지요. 내 육신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느냐 그 말이요. 옛날엔 보이는 앗수르 왕이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보면 믿는 사람들 속에 보이지 아니하는 앗수르 왕의 그 명령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더라 그 말이요.
이스라엘 땅의 성도들 속에 아브라함의 신앙 즉,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져야 하는데 그것은 없고 앗수르 이방민족이 들어와 가지고 믿는 사람들 속에 거하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분명히 껍데기는 성도인데, 이름은 성도인데,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러나 이방민족이 거하고 있어. 그 마음속에 이방민족성, 세상 영웅심이 들어 있어요. 지금 교인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데 그 속에 왕이 누구냐 그 말이요.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없어지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대로 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뜻이 달라져 버리고, 목적이 달라진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북조이스라엘은 형체도 없어져 버리고 앗수르화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오늘날 교회에 그게 보입니까? 겉은 멀쩡해요. 그러나 속은 전부 다 앗수르화 바벨론화 돼 버린 이것을 여러분들은 볼 수가 있습니까? 성경에 보니 이렇게 하도록 하는 명령을 제사장이 앗수르 왕에게 받더라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후대의 교인들이 이렇게 될 줄을 미리 아시고 이 사건을 동원시켜서 계시성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종교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성화구원은 중단되어 버렸고, 완전히 이 성화구원 면에서 종말을 짓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요 호세아 왕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될 것 같고, 섬기면 될 것 같지만 목적이 전부 다 이탈이 돼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신앙이 허사가 돼 버린다 그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가견적인 것, 눈에 보이는 이것만 붙잡고 자기의 수지 결산을 따지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알맹이, 그 면에 신경을 쓰고 예수를 믿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껍데기는 그대로 있는데 속은 완전히 세상화 되어가지고 성경 찬송 부르고, 예배 올린다고 하게 되면 그거는 말짱 헛것이다 그 말입니다.
결국은 앗수르 왕에게, 세상 왕에게 명령받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입니까’ 하는 이런 식으로 묻게 된다면 이거는 세상성으로 예수 믿는 거나 같습니다.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온전성은 없고 성화구원은 없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구약 때의 앗수르 왕을 들어서, 호세아 왕을 들어서 우리의 신앙의 중심사상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지으심의 목적은 특수요, 또 역사하심의 그 진행도 특수요, 진리의 말씀 주심도 특수요, 특수한 하나님의 온전자로 만들어지라고 분명히 이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의 명령을 받는 자들은 이 성경을 가지고 앗수르 식으로, 세상 식으로 믿고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 성화구원으로 믿어 나가자니까 앗수르의 명령을 받고 성화구원이 없이 믿고 사는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예수 믿으므로 껍데기는 같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한 대립성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분명히 가르쳐주신 대로 저희들이 특수한 신앙사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