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3월 18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탈출 32,7-14
복 음 : 요한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서품식 때가 되면 상당히 분주해집니다.
인천교구는 서품식 때 후배 신학생들이
전례, 성가는 물론 행사 진행 일체를 도맡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가대는 성가 연습을 하느라 참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가대를 지휘하는 음악부장 신학생은 늘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사람의 음에 귀 기울이세요. 자기 소리는 낮추어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소리만 크게 내면 절대로 아름다운 성가를 화음에 맞춰서 부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기만 잘 났다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멋진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듣고, 내 가정 구성원의 목소리를
서로 잘 들어 주어야 화목해질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동료의 목소리를 들어야 서로 도우면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 된다’라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뜻은 늘 아버지와 성령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은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들은 다른 어느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본성을 지니고 계심을 입증해 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좇을 때가 너무 많지 않았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인간이 주는 영광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명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이 주는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도당한 사람에게 관심도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강도당한 사람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치료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돈이 부족하면 나중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라 차별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차별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이 있었습니다. 노비와 백정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귀하고 천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최근까지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피부색에 의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쟁이 없는 것이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차별이 없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세리와 과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그런 사람들은 죄인으로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의 부하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이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혈연으로, 지연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는 너무나 외롭고 작은 별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에 벌을 하고, 심판을 하셔도 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털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공로와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순덩어리인
우리들 삶이다.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변하는
우리들 마음이다.
하느님보다
높아진
우리들 마음이다.
언제나
먼저
다가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무너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어리석은
우리자신에게
답을 주신다.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
그 마음은 무엇인가.
한 줄기 빛같이
하느님 사랑을
간절하게 갈망했던
그 순간은 어디 갔는가.
되살아나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 사랑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성찰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
성찰과 변화
결단과 실천이
필요한 사랑이다.
낡은 마음이
아니라
새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은
하느님 사랑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다시금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 사랑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일상 안에서 드러난다.
삶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사랑과
우리들
나약함 사이로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
사랑은
낮아지고
낮아지는 것이다.
마음 또한
낮아지고 낮아질 때
사랑은 더욱 뜨겁게
하느님을 향한다.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중성과
우리의 모순을
치유시켜 주소서.
에덴동산엔 옷 입고 못 들어간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믿으려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핑계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요한의 증언이 있었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을 증언해주고,
또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이 당신을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으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자기 영광’은 ‘자존심’과 같은 말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하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맞서는데,
결국엔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
자존심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그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부잣집에 시집 온 가난한 여인이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사람들도 다 돈 좋아하는데, 뭐?’라는 마음으로 달랬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은 사실을 왜곡하게 만듭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우리 재산은 다 너희 재산이 될 거야. 너는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이미 부자야.”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존심을 세우려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영광을 받으면 나 자신을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 영광은 바라지 않고 자존심만 세웠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방식은 자기를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가해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다고 여깁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거짓으로 포장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미 다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아야 하기에 ‘역지사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데 역지사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매우 철저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앞길을 막을 정도로 심한 망나니였습니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아들을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일단 집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역할극을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하던 대로 아들을 자신처럼 철저한 모습으로 키우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고,
아들은 처음엔 잘 해 보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이 술과 마약으로 망가지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이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의사는 아버지가 아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으면 좋았을 따듯한 말들과 위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에요!”라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처지가 되어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혹시라도
자기 자존심에 금이 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처지가 되어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위 아버지와 같은 상태까지 오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처지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남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은 하나의 자기 합리화 방법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멈추면 자기 식대로 남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습관도 멈춥니다.
아담이 자기 몸을 가리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하와를 심판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 껍데기를 벗어야 상대의 진실도 보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믿으려면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느님도 믿게 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성경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또 하느님도 그런 분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쉽게 믿는 이유는 그들에겐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라도 끊임없이 나의 치부를 드러냅시다.
껍데기를 벗어야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옷 입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눈 먼 열심
반영억 라파엘 신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 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