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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여러 이름.....
지리산은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두류산이라고도 하고 남악이라고도 하며 망당산이요 화악이며 덕산이라고도 합니다.
지리산은 덕산德山이다. 즉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리산을 '덕산'으로도 불렀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내옹乃翁 안치권(1745~1813)이 5박6일의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기록을 담은 내옹유고乃翁遺稿 2집(유두류록, 1807년)에 관련 글이 나온다.
영남과 호남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산이 구불구불 수백 리, 우뚝 선 높이가 수천 길이다. 새, 짐승, 구리, 철이 저장되어 있고, 사찰에는 스님들이 살고 있다. 명칭은 넷인데, 지리산智異山,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덕산德山이다. 덕산이라는 명칭이 가장 유명한 것은 대개 남명 조식선생이 공부를 하신 장소이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로 미학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서산대사가 지적했듯이 “지리산은 한국의 산에서 산세의 장중함과 후덕함의 대표 격이라 하여 덕산德山이라고 불릴만하다.”는 얘기는 한 폭의 그림처럼 들린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85쪽
그 지리산 하고도 남부지리의 깊숙한 곳.
그곳의 한 암자에 선종 제62조 서산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원통암圓通庵입니다.
그 원통암을 20년 넘게 지키고 계신 스님.
노옹이라는 법호를 가지고 있는 스님이십니다.
한자로는 僧 老翁이라고 쓴다 합니다.
이 법호만 놓고 볼 때 이 스님은 상당한 고승이라는 느낌을 갖기 십상입니다.
늙을 老에 노인을 얘기하는 어르신 翁을 썼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노옹 스님이 출가를 한 시점은 20대였으니 그 법호로 큰스님들의 입에서 회자될 때마다 호통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중놈이 어디 이름을 지을 게 없어서 큰스님들을 능멸할 법호를 쓰는 게야!"
그 시절. 노옹스님은 쇠락해 가는 한 절집을 보고 들어와 눌러앉은 게 벌써 20년이 넘었다 하니 스님 스스로 인생무상이라는 것도 겪었을 법 합니다.
그 절집이 원통암이었습니다.
사실 노옹 스님께서 보신 것은 쇠락해 가는 절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절집이 바로 원통암이었기 때문이었고 그 원통암이 바로 휴정 서산대사의 출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옹스님은 불가에 들기 이전부터 휴정 서산대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원통암이 바로 서산대사와 관련된 곳이었기에 대사의 흔적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큰절의 재가를 얻어 이곳에 들게 되었고 .....
휴정 서산대사는 지리산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그러니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 부용 영관대사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죠?
지리에 대해 얘기하자면 반드시 고운 최치원도 등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유학의 비조 고운이 유불도를 통합한 사상가였다면 휴정은 이 삼가三家를 회통하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선종과 쌍계사
이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것이 선종이다. 선종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살폈다. 다만 혜소는 중국 선종 제6대 조사인 혜능의 남종선을 신라 곧 쌍계사로 들여오면서 선종을 활성화시킨 인물이 된다. 그는 이 포교활동을 하는데 범패를 이용하였으며 또 중국에서 차나무를 가지고와 지리산에 재배하기도 하였다.
이런 혜소를 고운은 높게 평가했던 것이며 결국 한국 유학의 종조宗祖이지만 쌍계사에 머물면서 혜소의 성품과 선사상을 충분히 공감하여 유학과 불교가 함께 융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는 훗날 선종사상을 중심으로 교종 불교를 이해하고 있던 조계종 승려 혜심(1178~1234)이 13세기 초 송광사에서 ‘유불儒彿은 결국 하나에서 나왔다.’라는 유불동원사상儒彿同源思想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마침내 서산대사 휴정에 이르러 “유불선은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라는 ‘3교 일치설’이 등장하게 된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292쪽
아울러 휴정 서산대사의 삼가회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죠?
바로 진양지의 저술로 유명한 부사 성여신 이야기입니다.
사실 벽송사는 실상사와 더불어 지리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러니 벽송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1520~1604) 휴정이다. 이 절집의 청허당은 강원講院으로서 휴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다. 위 벽송대사가 선종 60조이니 서산대사 휴정은 그의 법손격인 62조이다. 많은 선사를 배출한 절집이라는 얘기이다. 서산대사하면 빠뜨리기 어려운 게 바로 삼가귀감三家龜鑑이고 단속사며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삼가귀감三家龜鑑부터 볼까? 삼가三家란 동아시아의 가장 주요한 사유체계인 선가(禪家, 불가), 도가, 유가를 의미하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이들을 토대로 세 권의 귀감을 썼다. 하나가 선가귀감禪家龜鑑이고 둘이 도가귀감道家龜鑑이며 마지막 하나가 유가귀감儒家龜鑑이다.
서산대사는 이 세 개의 귀감을 통하여 삼가를 회통하고자 했던 바, 그 회통의 기준이 이심전심, 견성성불, 즉심시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이었다. 그는 이 선의 정신을 근거로 불교경전과 도가의 경전 그리고 유가의 경전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과 본성이 그대로 부처(선가), 성인(도가), 군자(유가)임을 깨닫게 하고자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삼가귀감과 단속사 그리고 성여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사 성여신이 혈기왕성한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이 삼가귀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삼가 중 유가儒家의 글이 맨 뒤에 편철되어 있는 것과 사찰에 형상이 괴이한 사천왕 등 불상을 조성한데 격분하여 불경을 간행하는데 쓰이는 목판은 물론 절까지 불 질렀다는 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24쪽
사실 이 삼신동하면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빠지면 좀 곤란해진다. 즉 이인로는 이 삼신동에서 무릉도원을 찾으려 했고 휴정은 그 법명을 얻기 전까지 20년 정도를 이 삼신동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신흥사에 머물렀던 휴정이 지은 ‘신흥사 능파각기’는 지리산을 제대로 묘사한 명문장으로 일컬어진다. 휴정의 불후의 명저 ‘삼가귀감’을 집필한 곳 또한 이 삼신동에 있었던 내은적암이다.
내은적암이 어딘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다만 휴정은 조실부모하고 안주목사 이사증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졌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공부도 이어가지 못하고 전주로 내려간 스승을 만나고자 했으나 만나지 못한 채 지리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숭인스님의 권고로 머리를 깎고는 여러 사찰을 전전하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와서는 남명 조식과 친교를 맺기도 했다.
휴정 서산대사 최고의 업적을 꼽으라면 우선은 다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즉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승군을 조직하여 선검일치禪劍一致를 주창한 일과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선교병수禪敎竝修를 창도한 일일 것이다.
-졸저 전게서 322쪽
오늘 산행은 서산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이 원통암에 들렀다가 시간에 맞춰 화산 이현상의 최후지인 산태골과 절터골의 합수부를 답사하기로 합니다.
오늘 답사에는 유목민 대장과 고남, 배완식 그리고 에델 등 5명이 함산합니다.
22:43
영등포역에 도착합니다.
그러고는 22:53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편으로 구례구로 이동합니다.
03:07
정시보다 2분 연착합니다.
지리산 신선 고남님은 남원역에서 타고...
함께 구례구역에 내려 기다리고 있던 유목민님과 합류합니다.
구례구역 앞의 풍경은 예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열차외에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지리산에 오르려는 산객들로 늘 붐비던 곳이었는데.....
평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시간에는 한 곳 외에는 문을 연 식당도 없습니다.
다슬기 해장국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기다리고 있는 배완식님을 만나러 화개면 삼신동으로 들어갑니다.
지도 #1
삼신동은 신흥 즉 목통마을을 포함한 범왕리, 의신 즉 대성마을을 포함한 대성리 그리고 영신 즉 덕평봉과 대성계곡 상류 일원 등으로 넓게 보는 게 맞겠다. 또 그게 지리를 여유롭게 보는 자세이기도 하다.
어쨌든 지리의 이 삼신동은 멀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구한말의 의병들의 항전 등으로 하루도 마음 편히 살날이 없던 동네였다. 그래서 그런가? 주민들은 이 염증나는 지역의 이름이 ‘神’자 때문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확신이었다. 그래서 한 것이 개명작업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개명 작업에 착수하여 의신은 이미 ‘信’으로 바꿨으니 신흥은 ‘新’으로 바꿨고 영신은 아예 ‘덕평’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민들의 바람과 노력도 헛되이 근세사에서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두 차례 더 피바람이 몰고 지나갔으니 이 삼신동은 아름다운 자연과는 달리 역사는 수난의 연속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의신마을 입구의 솟대가 평화 혹은 평온을 염원하는 주민들의 간절함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매년 정월 대보름과 섣달 그믐날에 치러지는 당산제 역시 이런 의식의 반영이리라.
- 졸저 전게서 321쪽
04:52
신흥교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완식님을 만납니다.
그러고는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놓고 의신방향에서 왕성분교 방향으로 다리를 건넙니다.
이 신흥교 아래로는 화개천이 흐릅니다.
바로 옆에 그 유명한 고운 최치원의 세이암도 있고 탁영대도 있는 곳입니다.
이 화개천은 신흥3거리에서 목통골에서 내려오는 범왕천을 흡수하여 쌍계사 앞을 지나 화개장터 부근에서 섬진강에 합류하게 되죠.
그러니 좀 더 눈을 넓혀볼까요?
이 화개천은 토끼봉 ~ 명선봉 ~ 삼각고지 ~ 덕평봉 ~ 칠선봉 ~ 영신봉 서쪽의 물들을 모두 모은 물입니다.
그러고는 신흥삼거리에서 날라리(삼도)봉 동쪽의 물을 모은 범왕천까지 흡수하는 물이니 곧 동으로는 낙남정맥을, 서로는 전라남도 구례군과 경상남도 하동군의 도계를 구분하는 물줄기입니다.
그러니 동으로는 낙남정맥 줄기를 그리고 서로는 날라리봉 ~ 불무장등 ~ 통꼭지봉 ~ 황장산 ~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화개단맥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참고로 여가서 황장산의 黃獐이라는 이름과 화개천의 花開라는 이름을 쓰지만 두 지명은 다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가는 게 나을 것입니다.
- 졸저 전게서 308쪽
- 졸저 전게서 97쪽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이정목이 하나 나옵니다.
예전에는 그저 옛길이라 불렀었는데 지금은 원통암과 연결하여 특히 서산대사길로도 부릅니다.
그 길을 따릅니다.
추석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가요?
약간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늘엔 둥그스름한 달이 별들과 함께 떠 있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쾌청한 날씨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단에서 탐방로로 연 곳이니 등로 사정은 양호합니다.
다만 이 등로 좌측 능선이 토끼봉에서 흘러내리는 줄기 중 반야봉의 기운을 받은 원 줄기는 칠불사 방향으로 가면서 완만하게 진행하는 반면 화개천 방향으로 가지를 친 이 팔백고지 능선은 화개천 방향으로는 상당한 된비알입니다.
그런 절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깎아 조성한 길이다 보니 비오는 날이나 바람이 심한 날은 낙석의 위험이 상존할 것 같습니다.
되도록이면 이런 날은 이 길의 이용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서산대사 길은 곧 신흥 ~ 의신을 걷는 옛길입니다.
가다보니 옛 민가터도 나오고 개짖는 소리도 멀지 않으니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민초들은 열심히 삶을 이어갔을 겁니다.
넉넉한 지리의 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05:16
서산대사가 의신사 범종을 의자로 바꾸는 도술을 부렸다고....
시도 때도 없이 침략을 하는 저 왜구들에 대한 지겨움을 하나의 설화로 만든 것이겠죠.
저 징그러운 왜놈들.....
지금도 이렇게 우리를 못 살게 구는 놈들이니.....
05:36
등로 좌측으로 민가가 한 채 나옵니다.
이런 곳을 독가獨家라고도 부릅니다.
평일이면 진주에서 생활하다 주말에만 올라와 간단한 농사도 지으면서 쉬다가 가는 곳이라 합니다.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집은 시세가 얼마나 가나?
유목민님이나 고남님 曰, "쓸데없이 그런 것을 물어볼 때마다 1,000만 원씩 올라갑니다."
동쪽 능선 위로 어렴풋이 붉은 기운이 돕니다.
간간이 이정목도 보이고....
안내판....
늘 밋밋하지만은 않습니다.
된비알과 평이한 길을 교환하며 걷고....
이른 새벽에 보이는 상사화.
상사화相思花는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라고 합니다.
주로 꽃이 필 때에는 잎은 이미 말라서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여 상사화라 이름 지었다고 하는군요.
사람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꽃도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동병상련.....
그런데 이 이쁜이는 주로 산과 들의 습한 곳에서 자라는데 이 붉은 색깔을 사찰의 단청을 칠하는 소재로 사용하다 보니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하고.....
지리산 일대에서 자생하던 이 이쁜이들을 선운사와 불갑산 부근에서 여러 용도로 이용하고 있다 하고.....
오늘 산행 내내 이 이쁜이와 함께 했습니다.
06:11
드디어 의신마을이 보이는군요.
음택이 있는 모퉁이를 돌아,
무슨 쑥부쟁이라고 하던데....
06:24
그렇게 신흥 ~ 의신 옛길을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바로 베어 빌리지 bear village라는 곰 두 마리가 살고 있는 사육장을 나오게 됩니다.
이곳에는 지리산 정착에 실패한 반달곰 두 마리가 살고 있는데 하도 잘 먹어서 그런지 지리산에 살고 있는 다른 곰들보다 몸집이 더 크다고 하는군요.
현수교로 화개천을 건너 의신으로 나옵니다.
06:28
의신마을입니다.
주민들은 벌써 일어나 또 하루를 준비하는군요.
1023번 도로.
아주 중요한 도로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이 루트는 예전 상권商圈과 관련하여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원래 지리산 상권은 남강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시장이 발달하였다. 그러니 남강 쪽으로는 함양, 산청의 읍내장 그리고 진주의 주내장 등이, 섬진강 쪽으로는 남원의 부내, 곡성, 광양의 읍내장, 하동의 하두치장 등 무려 50여 개의 장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중 지리산 길목에 위치한 화개장은 하동 상권의 중심지였다. 이 화개장은 벽소령을 따라 삼각고지에 이른 다음 여기서 지리북부능선(삼각고지 ~ 실상사)을 타고 인월장으로 연결이 되었다. 팔량치 아래에 있는 인월은 어떻게 보면 산간벽지의 마을일 수도 있을 것이나 남강과 섬진강을 통해 올라온 해산물이나 반대로 산간의 임산물이 거래되는 상권의 중심지였다. 그러니 남원의 운봉, 함양의 마천이 그 중심에 있는 곳이었고 이는 곧 내륙을 통한 민초들의 발걸음이 이곳처럼 잦은 루트도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역할을 한 이 길은 자연스럽게 의병이나 동학농민군 그리고 빨치산이 오고가는 길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이 의신의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일이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군사정권에 의하여 군사비상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졸저 전게서 321쪽
삼정과 세석.
삼정은 바로 윗마을이고 세석은 세석대피소를 이름이겠죠?
그런데 이런 임도 수준의 길은 누가, 왜, 뭐 하러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고 보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는 이 벽소령 대피소 코밑까지 아주 넓게 이어져 있음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길의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 작은 트럭이나 사륜 구동 차들이 오고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일까?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핑계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나마 지리 북쪽의 양정, 음정 주민들은 이 도로를 산간지대 경작이나 토봉土蜂 등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면 지리 남쪽의 삼정마을 주민들에게는 신흥~삼정 약 7km의 거리 정도만 생활 편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아가 삼정삼거리에서 벽소령대피소로 오르는 지름길(4.1km)마저 1995. 9. 5.부터 영구 폐쇄되어 ‘벽소령 종단도로’는 이제는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 졸저 전게서 438쪽
의신마을 흑백사진관 앞에서 짐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관에서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배완식 님은 2년 전 친구들과 이곳을 들렀다가 그냥 심심풀이로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모델이 워낙 좋아서 인가요?
이 사진관 사장님은 이 사진을 특별히 선별하여 걸어놓으신 것 같습니다.
배완식님 본인도 오늘 처음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아침 첫 차.
이런 버스들은 기다리면 안 오고 이렇게 불필요할 때에는 약올리듯 지나가니....
자, 그만 일어나시죠.
지도 #2
06:38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골목을 따라 들어갑니다.
그 루트는 약 100m 정도 세석길과 함께 합니다.
우측으로 세석길을 버리고 원통암 길은 직진합니다.
세석까지는 약9km.....
대성리를 가쳐 큰세개골 ~ 남부능선으로 올라 세석으로 진행하는 루트입니다.
반면 원통암은 직진하여 골목 막다른 집 우측으로 틉니다.
이정목이 잘 되어 있으니 원통암 가는 길은 아주 순조롭습니다.
전봇대만 따라 오르면 됩니다.
그러면서 원통골로 들어섭니다.
사방댐?
뒤를 돌아 보는데 토끼봉 능선의 지선이 무지 높게 보이는군요.
시심마是甚麽?
말 그대로 "이 뭤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을 이르는 말.
좀 더 깊이 얘기하자면 "네가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본선으로부터의 거리나 위치 등을 알려주는 고유번호.
07:14
원통암으로 들어섭니다.
원통圓通이란 지혜로 부처님의 이치를 깨달은 상태를 말한다고 하니 이 문을 들어서면서 잠시 그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문 상단에는 서산선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니 이제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좇는 선문으로 들어섭니다.
서산선문으로 들어서자 조경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스님의 깔끔한 성격을 대변해 주는 듯 싶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티끌 하나 없는 절집입니다.
모든 게 울력이 아닌 스님 혼자 하신 거라고 하니.....
원통암에서의 조망.
정면으로...
아!
정면으로 좌측에서는 지네능선이 내려오고....
그리고 그 중앙에 호남정맥의 맹주 백운산1222.2m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그 우측으로 한재를 지나 도솔봉1153.2m이 나란히 솟아 있으니 그 흐름을 도솔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군요.
이곳의 지형이 말 그대로 청학포란靑鶴抱卵형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미륵보살의 정토로 느껴지는 이 감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요?
하지만 오늘따라 공허하면서 불안해지는 이 속인의 마음은 온갖 번뇌로 들끓고 있으니....
이게 진정 오뇌懊腦의 무도舞蹈라는 말인가요?
방랑의 노래/예이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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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킨 케이드가 프란체스카에게 읊어주던 에이츠가 생각나는군요.
신발을 벗고 법당으로 들어가니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군요.
삼배를 올리고 나옵니다.
원통암 편액과 주련은 제월당 통광선사의 작품이라 하고....
서산대사 영정.
그 영정이 있는 청허당.
노옹 스님이 올라와 불사한 것이고....
벽송사에도 선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 청허당이죠.
노옹스님께서 직접 쓴 글....
07:32
아름다운 절집 원통암에서 18분 정도 머무르다 나옵니다.
원통암을 나와 원대성을 거쳐 대성리로 나와 다시 의신으로 원점회귀하기로 합니다.
07:36
암자터를 지나,
07:40
너덜지대도 지나,
07:42
표지띠를 모아 놓은 곳도 지납니다.
등로는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흔적을 찾아 충분히 진행할 수 있는 곳입니다.
07:59
지도 #2의 '가'의 곳에서 덕평능선에 오릅니다.
이 루트를 따라 능선을 오르면 1153봉 ~ 1188.8봉을 거쳐 선비샘으로 오를 것입니다.
여기서 막걸리 한 순배 돌리고 진행합니다.
이곳에서 좌측 사면을 따라 대승사터로 진행하는 길이 어렵습니다.
09:05
지도 #2의 '나'의 곳인 원대성으로 떨어집니다.
원대성 마을은 세 채의 가옥으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그곳의 기도터를 지나,
좌측 토굴로 사용되고 있는 집을 빠져 나옵니다.
우측에 있는 두 채의 가옥은 빈집 같고.....
좌측 토굴의 거사가 경작하고 있는 밭을 지나면,
09:11
옛 암자터의 절구의 흔적이 보이고....
09:12
그러면 이제 비탐 구간은 끝입니다.
정규 등로 표시죠?
여기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남부능선으로 이어지는 정규등로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이정목에는 세석까지 5.7k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루트는 중간에 큰새개골로 들어가 영신사터로 올라갈 수 있으니 그 루트도 한번 고려해 보아야 할 곳입니다.
지리산은 참 갈 데가 많아 좋습니다.
다시 정규 등산로로 들어오니 등로 사정은 갑자기 좋아집니다.
안전시설도 되어 있고....
좌측 대성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물은 많습니다.
09:29
대성석문을 지나면,
09:31
좌측으로 쉼터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정목 옆으로,
쉼터가 나옵니다.
대성주막입니다.
풍부한 물.
그리고 막걸리와 각종 안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이곳이 남부능선에서 의신으로 하산하는 길목에 잇는 지도 #2의 '다'의 곳의 대성주막입니다.
막걸리 한 통을 사서 마시고 가려하였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그냥 가지고 가기로 합니다.
09:44
호젓한 오솔길 같으나 아래는 바로 절벽입니다.
이곳에서 길이 갈립니다.
이정목은 아랫길로 유도를 하지만 우리는 윗쪽을 택합니다.
09:48
원통굴圓通窟을 방문하기 위함입니다.
토글이라는 이름의 이곳도 암자보다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수행처는 수행처입니다.
09:52
아까 헤어진 정규등로를 다시 만나고....
상사화 군락지도 지납니다.
10:00
이 정도면 다 온 겁니다.
10:10
대문을 빠져나오면,
좌측으로 토끼능선 지선을 보게되고....
음...
언제 다녀가셨소!
10:18
아까 들머리로 사용하였던 곳.
직진하면 원통암 가는길.
우틀하면 지금 빠져 나온 세석 가는 길입니다.
10:20
1023번 도로로 나오면서,
1라운드 원점 산행을 마칩니다.
여기서 장비를 재점검하고 삼정으로 올라 절골과 산태골의 합수부 부근에서 피살된 이현상 최후지를 지나 절터골로 올라 연하천대피소를 방문한 다음 명선남릉으로 하산하려 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최순희 수목장터만 보고 절터골에 눌러 앉게 됩니다.
삼정에서 벽소령 가는 길
산꾼들은 앉으면 안 됩니다.
일단 앉으면 이미 시간은 자기 것이 아니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 시간은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새벽이라도....
절골과 산태골 합수부의 너덜지대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오뇌를 떨치려 갔던 지리산 산행은 그저 또 숙제만 받고 돌아서고 맙니다.
이번 주말 도장골 혹은 칠선계곡 산행은 그것을 풀어줄 수 있으려나?
첫댓글 엣이야기를 들으면 산행하는 기분이 듭니다.덕분에 아는 산길도 모르던 산길도 달리 보이네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지리산에 푹 빠지셨네요...
지리산....역시 존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