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忠(충)의 고장 만인의 총.........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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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만인의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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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8월 추석 보름달이 뜨면 조국을 지키는 만인의 함성이 들려오는 곳,이있다. '남원 만인의 총' 슬
픈 보름달이 기억하는 그날을 아십니까?? 유랑자는 오늘 역사 와 미래가 함께 묻혀있는 만인의 총을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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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역사를 담은 도시는 여러 도시가 있지만, 남원은 조선왕조 500년의 이야기를 고루 담고
있는 도시이다. 최근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행지 또한 역사 유적지를 찾는 경우
가 많아졌다. 1300여년의 세월동안 남원이라는 지명은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을 정도로 남원의 역사
는 깊고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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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사랑이야기보다 깊숙이 담겨진 조선의 또 다른 이
야기 역시 충분히 들어볼 법 하다. 남원성을 지킨 조상들의 묘, ‘만인의 총’,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임진왜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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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
다. 남원성 전투가 벌어지던 때는 추석날이낀 8월13일~16일!. 온 가족이 함께하는 추석명절 임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온 가문이 전쟁의 아비귀환의 속에서 죽어가야만 했던 이 역사를 일본놈들은 어
떻게 보상할것인가를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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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 힘없고 나약한 역사속의 우리네 조상들, 당파 싸움에만 목숨을 걸었던 역사의 죄인들은 이
처절한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것인가에 대한 반성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놈
들의 차를 타고 다니고 물건을 사고 개처럼 처 먹는 놈들, 친일 행각을 일삼고 있는 친일파 새끼들은
일본놈들의 똥싼 똥구멍이나 빨아 먹어야 될 놈들이 우리땅엔 아직도 무수히 많다는게 문제다. 참으
로 개탄(慨歎)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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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차 문을 여는 순간 뜨더운 피비린내 같은 묘한 여운의 바람이 훅 하
고 가슴을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문을 향해 걸어본다. 가벼워야할
발걸음은 천근만근마냥 무겁기만 하고 즐거워야할 마음은 어느새 굳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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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지나 순의탑에 다다가 묵념부터 한다. 날씨마져 우중충한게 그냥 짜증스러운 날씨다. 다시돌
아서 홍살문을 지나 고개를 떨구운채 돌계단을 오르는데 돌계단마져 이유없이 마음에 안든다. 충의문,
성인문, 충렬사까지 다다르자 한층 더 엄숙한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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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먼저 충렬사 앞에 향불을 피우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군관,병졸들과 죄없이 희생
된 농민들을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에 들어갔다. 그리고 뒤로돌아 돌계단을 올라 만인의 총에 다
다르게 된다. 다시한번 예를 갖추고서 무덤을 한동안 바라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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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총을 덮은 잔디 속에 자라나는 작은 야생화를 보고 있노라니, 그 속에 잠든 슬프고 가여운 영
혼이 이렇게나마 꽃으로 피어 세상을 보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스쳐간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만인의
총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 성을 지키고자 왜적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1만 여명의
민·관·군을 합장한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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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물러났던 왜군은 임진 때의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있
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남원은 전라도와 충
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군사 요충지로 나라에서도 이곳 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방비를 게
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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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곳에는 전라 병사 이복남,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의 군사가 이끄는 군사 1천여명 과
명나라 부총병 양위옌의 3천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때는 "선조 30년 7월 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1
만여 명이 좌·우군으로 나뉘어 침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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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우군(右軍) 5만4,000명은 전주성을,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左군 5만6,000명은 남원
성을 공격하기 위해 1597년(선조 30년) 8월 13일 추석을 2틀 앞둔 날 선봉대를 앞세워 침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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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음력 8월 13일의 이야기다. “나는 전라병사 이복남입니다. 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지
키고 있습니다. 8월 7일(음력)에는 왜군의 선봉대가 드디어 모습을 내보였고 12일에는 왜군이 성을 포
위 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명나라 중군장 이신방(李新芳)에게 동문을 맡기고, 남문은 장표(蔣表), 서문
은 모승선(毛承先), 북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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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명의 부총병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
청하였으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을 거부 하였고, 남원성의 앞날은 풍전등
화와도 같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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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남원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천혜의 요새 교룡산성이 있어 청야입보(淸野入保,들을 깨끗이 비
우고 성으로 들어감)하고 산성에서 적을 맞이한다면 승산이 있겠지만 명의 양원은 평지전투에 능하
다보니 남원성 사수를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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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간다면 모두가 죽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상황. 하지만 조선군은 죽음과 맞바꾸어서라도 성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사 앞에 주어진 조선군의 사명이자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8월13일에서 16일까지 나흘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
은 채 민 · 관 · 군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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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다음날인 16일 밤 조총으로 총 공격을 퍼부은 왜군은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안으로 들어왔
고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명나라 장수 양원은 50여 명의 심복 부하만을 거느리고 군졸로 변장하여 명
나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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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전라병사 이복남 이하 3,000여 명의 장병들
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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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 4천여 명과 주민 6천여를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모두 장렬하게 죽음을 맞
이하였다. 광한루를 비롯한 남원의 관아와 누정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 즐비하던 민가가 17동만 남고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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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혹한 장면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코베기도 이 전투에서 본격화 되었다
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왜군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남원성 함락은 전세에 큰 위기를 가져
왔고 명나라가 14만 대군을 급파하여 조선은 다시 전면 전을 재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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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남원성 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전쟁의 동력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 하면서 정유재란은 종막을 예
고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들의 시신을 한곳에 모시고 합장한후 만인
의총(萬人義塚)이라 이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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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선조 30년 8월 을해)에는 남원성 전투에 대해여 ‘남원 주변의 주민 과 부녀자들에 이르기
까지 참전하여 용감히 싸워 많은 왜군을 죽여 충절을 다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광해군 4년(16
12년) 충렬사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8 충신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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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묘는 남원 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무덤은 위치도 옮겨졌지만 정화
사업을 거쳐서 지금은 마치 공원처럼 잘 단장되어 있으며 '만인의 총'은 피비린내 났던 역사를 묻어
둔채 무심히도 유랑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유랑자는 이제' 만인의 총' 기념관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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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충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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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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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향교동 636
(주차장):전북 남원시 향교동 719-1
영업중:매일 09:00 ~ 17:00
063-636-9321
홈:www.cha.go.kr/agapp/main/index.do?siteCd=MA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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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못가본 곳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코로나 더욱 조심하시고요.
감사 합니다.
님꼐서도 돌아오는 설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보다더 많은 여행 하시길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