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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Britsh museum)
주소; Great Russell Street London WCIB 3DG)
-가는 방법 : Central Line, Nothem Line역 하차, 3번 출구
-시간 : 10:00-17:00(월-토), 14:30-18:00(일)
-Close : 12월 24-26일, 1월1일, 5월 첫째 주, 부활절 전 금요일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런던의 블룸스버리 지역에 있다.
왕립학사원 원장을 지낸 의학자 한스 슬론경(Sir Hans Sloane)의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古美術)·메달·동전·자연과학 표본류 등 방대한 소장품을 1753년 정부가 매입할 것을
의회에서 의결하고, 로버트 코튼경(Sir Robert Cotton)의 장서와,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수집품들을 합하여 1759년에 설립,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초기에는 17세기 프랑스 고성풍(古城風)의 진귀한 건물로 그레이트 러셀가에 있던 몬터규(Montagu)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소장품이 증가하자, 1824년부터 로버트 스머크경(Sir Robert Smirke)의 설계로
동쪽에는 장서용, 서쪽에는 이집트 조각 전시용의 새로운 갤러리가 먼저 세워지고, 1852년 중앙부의 옛 건물 자리에 44개의 이오니아식 원기둥이 당당히 떠받치고 있는
현재의 그리스 양식(新古典樣式) 건물이 완성된 1853년 이후에도 계속 소장품이 늘어갈 뿐 아니라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키프러스 등지에서 발굴된 귀중품들,
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수집품들이 94개의 전시실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대영박물관은 1년에 4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세계 최대의 인류문화사 자료를 수집해 놓은 인류문화박물관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에 신축한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박물관 내의 도서관은 몇몇 주요 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대영도서관으로 독립하였다.
또한 1970년부터 민족학 부문 소장품들은 웨스터민스터의 벌링턴가든스에 있는 인류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주로 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인도·그리스·로마·중국 등 각국 각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독특한 전시법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802년 프랑스에서 얻은 이집트의 고고학 자료를 비롯하여, 1806년에 수집한 타우네레, 1816년에 수집한 엘긴 대리석 조각, 이 밖에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小形像), 페리클레스의 반신상(半身像),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로마 제왕들의 흉상 등이 유명하다.
영국의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전 세계인의 박물관이다.
(출처: 다음 지식 )
□ 이집트관 □
『 로제타스톤(Rosetta Stone) 』
1809년부터 1813년 사이에 프랑수아 조마르가 쓴 ‘이집트 기(記)’ 24권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수집해 온 자료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쓰여진 책이다.
나폴레옹이 데리고 간 학자 175명이 이집트의 고대 유물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것이다.
그렇게 모은 유물들은 프랑스군이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해 몽땅 빼앗겼지만,복사된 자료만으로도 학자들이 이집트를 연구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주 짧은 유럽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그리스·로마의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선 이집트 문화가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떠돌이 사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이집트의 수천 년 유산 가운데 피라미드 하나만 해도 2톤 짜리 돌 250만 개로 쌓은 것이다.
유럽인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눈으로 볼 수는 있으되 거기에 담긴 속뜻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상형문자인 것 같은 이상한 기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물론 심지어 잉크 스탠드나 지팡이에까지도.그런데 그것들을 단 한 가지도 해독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의 문화 유산을 뻔히 보면서 수백 명에 이르는 왕의 이름 하나도 알 수 없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00년이나 쓰였던 상형문자를 풀 단 하나의 열쇠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 꼽혔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수백 사람이 달라붙었어도 거기에 담긴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로제타 스톤이란 길이 1.25m,너비 0.7m,두께 0.28m인 검은 돌이다.
이 돌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요새를 쌓을 때 도트풀이라는 병사가 발견했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로,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民用文字·상형문자가 세속과 종교에 두루 쓰인 승용문자(僧用文字)로 바뀌었다가 더 단순한 흘림체로 바뀐 것.
일반 국민에게 널리 쓰임)로,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로.
셋째 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神官)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한 글이었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군에게 빼앗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졌지만,석고로 뜬 사본은 파리로 갔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같은 내용을 세 가지 글자로 써놓은 것이었다. 학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아는 이상
나머지 두 가지 문자를 푸는 일은 쉬울 것이니,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언어·역사·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뜻글자라고 못 박고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존 푸랑수아 샹폴리옹이 나타나기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풀지 못했다.
샹폴리옹은 1790년 프랑스 남부 피지에크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때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원정을 갔다.
그무렵 샹폴리옹은 여섯 살도 되기 전에 읽고 쓰기를 마친 천재소년으로서 책더미에 파묻혀 지냈다.
1801년이 되자 맏형 자크가 열한 살 난 샹폴리옹을 그르노블로 데려가 사립학교에 넣었다. 자크는 훌륭한 언어학자였지만,
동생이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쉽게 익히는 것을 보고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동생이 가문의 이름을 빛내도록 샹폴리옹이라는 성으로 불리게 하고,자기는 피지에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도록 애썼다.
그해 어느 날 대학자 장 푸리에가 학교를 찾았다가 천재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의 뛰어난 지능에 탄복한 푸리에는 샹폴리옹을 집으로 초대해 자기가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에 갔다가 가져온 유물들을 보여주었다. 어린 소년은 파피루스와 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자 금세 거기에 빠져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로제타 스톤의 사본을 보자 보석처럼 빛났다.
“누가 저것들을 읽었나요?” 소년이 묻자 푸리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제가 읽겠어요.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거예요.”
소년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뒤로 로제타 스톤이 그의 머리에서 떠난 적은 없었다.
샹폴리옹의 머리는 아주 뛰어나 그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열두 살 때 처음 책을 썼다. 열세 살이 되자 아랍어·
시리아어·칼데아어와 옛 이집트 말인 콥트어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위한 자료는 모두 형이 마련해 주었다.
1807년 9월1일,열일곱 살 난 샹폴리옹이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빼어난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되어,발표가 끝나자마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샹폴리옹은 도서관이나 연구소에 파묻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페르시아어를 공부했다.
중국어와 콥트어도 익혔는데,특히 콥트어 실력은 그가 콥트어로 쓴 일기를 본 어떤 학자가 옛 이집트 문헌으로 착각하고 주석을 붙이기도 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샹폴리옹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가난에 시달렸다. 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아주 작은 방을 월세 8프랑에 빌려 살았는데,툭하면 형에게 방세가 밀렸다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구두는 다 떨어졌고,
셔츠는 넝마 같았다. 어찌나 남루했던지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다.
혹심한 겨울 추위와 굶주림이 샹폴리옹의 몸을 병들게 했다. 습기 차고 지저분한 방에서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는 그의 병약한 몸은 눈에 띄게 여위어갔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동자가 한 가지 집념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샹폴리옹은 한시도 로제타 스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추기까지 상형문자 풀이를 미루었다.
스톤이야말로 그에게 마지막 도전이 될 터이고,그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반드시 이기리라고 믿었다.
1816년 샹폴리옹은 왕당파 교수들로부터 나폴레옹 숭배자라는 모함을 받아 봉급의 4분의 1을 감봉당했다.
그는 몹시 어려운 처지가 되었지만 상형문자 해독의 전 단계인 콥트어 사전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그 무렵 엘바 섬으로 쫓겨갔던 나폴레옹이 다시 돌아왔다. 1817년 3월7일 나폴레옹이 그르노블에 입성하자 온 시민이 그의 편에 섰다.
나폴레옹이 그르노블 시장에게 유능한 비서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시장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피지에크를 추천했다.
시장이 발음을 약간 잘못해 피지에크 샹폴리옹을 샹폴레옹이라고 소개하자 나폴레옹은 몹시 좋아했다.
“아주 좋은 징조로군. 내 이름과 세 글자나 같다니!”
황제는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동생 샹폴리옹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황제는 콥트어 사전이 출판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이 젊은 학자에게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다음날 다시 학교로 찾아와 콥트어를 이집트의 공용어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샹폴리옹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얼마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센트 헬레나 섬으로유배되자 샹폴리옹은 반역자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집트 문자의 해독
1822년 샹폴리옹은 마침내 상형문자 푸는 기초 원리를 발표했다. 상형문자가 소리글자 ‘表音文字’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가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 즉 뜻글자 ‘表意文字’로 보고 거기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 해석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자세는 5세기에
그리스인 호라폴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300여년간 답습돼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쓰인 시대에 자기들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폴론의 방식을 믿었다. 언뜻 보기에 그림이나 다름없는 부호들을 그림문자 즉 기호나 상징으로 보아,굽이치는 선 3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神)’을 나타낸다고 풀이한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이집트 상형문자와 로제타 스톤을 풀었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하룻밤에 로제타 스톤의 글을 다 해독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중국의 한자와 이집트 상형문자가 유사하다며 중국이 이집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 멋대로 해석했다. 가령 수염이 난 사람 위에 연꽃이 여섯송이 피고 그 위에 매가 올라앉은 기호는,왕(매)이 시리아(파도치는 선으로 채워진 네모꼴을 바닷가에 있는 나라로 해석함)를 정복하고,
포로 6,000명(연꽃 한 송이를 포로 1,000명으로 봄)을 잡았음을 나타낸다는 식이었다. 그것은 몽땅 엉터리였다.
호라폴론처럼 뜻글자로 보아서는 500개가 넘는 기호 중에 단 하나도 풀 수 없다는 것이 샹폴리옹의 믿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라폴론에게서 등을 돌림으로써 샹폴리옹은 성공했다. 천재적인 영감(靈感)을 떠올린 데 그치지 않고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집트의 기호들이
‘그림’이 아니고 ‘발음기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때야말로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린 위대한 순간이었다.
샹폴리옹은 로제타 스톤을 풀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 스톤의 그리스어는,기원전 196년 이집트 신관들이 멤피스에 모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이 신전과 신관을 위해 애쓴
젊은 왕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미) 5세를 칭송하는 글을 채택하고,그것을 새긴 똑같은 돌들을
모든 신전에 바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로 쓰여진 글이 프톨레미왕을 칭송하는 것이므로 이집트 상형문자로 쓰여진 글에도 프톨레미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떤 기호가 ‘프톨레미’를 나타내는지만 알면 적어도 서너가지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샹폴리옹은 기호들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기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역시 옳았다. 그는 상형문자와 그리스어가 함께 새겨져 있어
제2의 로제타 스톤이라고 불리는 필레의 오벨리스크를 통해 그것을 증명했다.
오벨리스크란 돌 한 개를 깎아서 높이 세운 기념탑이다. 네모꼴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 꼭대기가 피라미드처럼 뾰족해지는 방첨탑(方尖塔)이다. 여기에는 대부분 국왕의 공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진다.
1821년 고고학자 조제프 뱅크스가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필레섬에서 영국으로 가져간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미왕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로제타 스톤의 상형문자와 필레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에는 똑같은 기호가 타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미왕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여러 단계에서 첫 번째 성공이었다.
위대한 발견은 계속된다. 필레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미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기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로 쓰인 글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기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었다.
샹폴리옹은 프톨레미를 나타내는 기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단어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프톨레미와 클레오파트라 두 단어에 다 나오는 발음기호는 P,O,L이니,
그 기호들이야말로 P,O,L을 소리내는 발음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년 9월14일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왕)의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다 밝혀냈다.
그날 아침까지 그는 파라오 이름 25개를 풀었다.
마지막 남은 2개를 놓고 씨름하던 그에게 점심 때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SS와 M까지 풀고 나서 문득 콥트어에서 태양신을 Ra(라)라고 하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MSS 앞에 RA를 놓고,거기에 이집트어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RAMSES가 되었다.
“아, 이것은 저 유명한 람세스대왕의 이름이 아닌가!”
곧 이어 토트메스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집트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보다 닷새 앞서 그는 132개 문자로 이루어진 상형문자 알파벳을 발표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하나였다.
연구실에서만 지낸 샹폴리옹이 마침내 이집트를 탐사한 때는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의 상형문자 풀이가 옳음을 확인했다.멤피스의 폐허에서 그는 각각 다른 때의 건축물들을 한눈에 구별했다.
사카라에서는 오노스라는 왕의 이름을 발견하고 즉시 초기 이집트시대에 속한다고 정확하게 연대를 짚어냈다.
신전·왕궁·무덤의 비문들이 샹폴리옹의 풀이와 딱 맞아떨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하자 원주민들이
‘오래된 돌에 쓰인 이상한 기호’를 잘 해석한다는 사람을 보려고 무리를 이루어 찾아오기도 했다.
샹폴리옹이 프랑스로 돌아가자 샤를 10세가 이집트학 강좌를 열도록 칙령을 내렸다.그러나 샹폴리옹은 초대 교수로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1832년 3월4일 “너무 이르다.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그의 나이는 마흔하나였다.
그 때는 아직 샹폴리옹의 이론이 세계 학계에서 공인되기 전이었다.그가 죽자 곧 영국과 독일 학자들이 그가 단순한 상상력에 의존해 어거지로 상형문자를 풀이했다고 비방했다.
샹폴리옹이 죽은 지 64년이 지난 1866년이 되어서야 독일인 렙시우스가 그의 이론을 지지했다.1896년에는 레어프가 영국 학사원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연설을 했다.
현대의 이집트 문자 해독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밝힌 이론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다.상형문자는 4,000년 동안 계속 변해 왔기 때문에
한 가지 비명을 해독했다고 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것을 똑같이 풀어낼 수는 없지만,
샹폴리옹의 이론을 응용해 조금씩 조금씩 해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한 비문을 읽을 때 첫 번째 줄은 오른쪽부터 읽고 두 번째 줄은 왼쪽부터 읽으며 세 번째 줄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쓴 ‘이집트어 문법’을 밑거름으로 하여 옛글을 해석할 뿐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다
.이집트의 수정궁 정원,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기제의 피라미드에는 현대인이 상형문자로 쓴 헌정사와 기념문들이 붙어 있다.
그렇다고 이집트 상형문자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이집트학은 아직도 샹폴리옹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샹폴리옹은 이미 상형문자 가운데 어떤 것은 알파벳과 같은 소리(음가)를 나타내고 어떤 것은 부호 하나가 그대로 한 낱말이기도 하며 또 어떤 부호는 그 하나로 아주 복잡한 뜻(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수수께끼들이 다 풀리려면 또 다른 샹폴리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출처: 네이버, 다음지식)
『 람세스2세석상( Rameses 2) 』
람세스 2세 석상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1279~BC 1213).라메세스(Ramesses) 2세라고도 한다.
아버지 세티 1세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여생을 각지의 신전 건조에 바쳐 페르라메스.아비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장례전(葬禮殿) ·신문(神門) 등을 세웠다.
왕의 시대에 이집트왕조의 융성기는 끝나고,
제20왕조의 왕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왕은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彫像)을 각지에 남기어 자신을 과시하였다. 적어도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을 대표적인 전제 군주로 형상화한 조각상을 무수히 남겼다.
52명의 왕자를 포한해 100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으며, 흔히 모세 시대의 파라오로 이야기되곤 한다
오른쪽 가슴의 구멍은 프랑스 군대가 이 석상을 옮기기 위해 뚫은 것이다
프랑스 군대가 구멍은 내었는데 왜 영국에 있을까?
그 이유는 지네들끼리 치고받고해서 영국이 이겨 강탈해 간것이다
(출처: 다음지식, 네이버지식)
1822년 9월14일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왕)의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다 밝혀냈다.
그날 아침까지 그는 파라오 이름 25개를 풀었다.
마지막 남은 2개를 놓고 씨름하던 그에게 점심 때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SS와 M까지 풀고 나서 문득 콥트어에서 태양신을 Ra(라)라고 하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MSS 앞에 RA를 놓고,거기에 이집트어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RAMSES가 되었다.
“아, 이것은 저 유명한 람세스대왕의 이름이 아닌가!”
특히 투탕카멘 무덤입구에 있던 람세스1세의 나무입상은
이집트인들은 사람의 생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우리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 미이라』
영국과 이태리에서 너무 많은 미이라를 훔쳐와서 현재 이집트에는 미이라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중의 일부가 대영박물관에 있습니다.
미이라관에는 서민부터 귀족까지
다양한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는 보통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나뉘어져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들어가 썩게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사람을 "카와 바" 그리고 "아크트"로 구분하였다.
카는 성령, 바는 혼, 아크트는 육체를 뜻한다. 혼과 육체는 우리나라의 사상인 혼백사상과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없는카 즉 성령을 이해해야 이집트인들의 생사관을 이해할수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육체에 혼이 합쳐지면서 사람이 된다고 믿고 있는데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이집트 인들의 생사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이집트인들은 모든 물질의 본질을 카(성령)라고 생각했다.
물론 카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런 카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그 외 여러 물건들에게도 있다.
고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카라는 본질이 기본이고 그 위에 육체와 혼이 붙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사람이 죽게 된다면 카(성령)에서 바(혼)이 떨어져 나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아크트(육체)만 남게 되는데 만약 아크트도 땅으로 들어가 썩게 된다면 카는 머물 곳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카가 머물 육체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미라이다 꼭 보셔야 합니다.
그럼 이런 이집트인들의 사상때문에 미라가 많이 발견되는 것일까?아님 다른 이유도 또 있을까?
이집트의 뜨겁고 건조한 모래덕분에 수분이 증발되면서 아래 사진과 같이 자연건조되어 미라가 된것도 많이 발견된다
진저맨이라고 별명이 붙은 미라는 지금도 머리카락과 손톱등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다음지식, 네이버지식)
(출처:영국박물관 홈페이지)
첫댓글 미이라가 보기만하여도 소름이 ㅎ에구 멋지네요 좋은곳 사진으로 감사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미이라는 정말 볼만하더만... 중국에 갔을때 본 미이라는 살아 있는것 처럼 보이던데...^*^
좋은 구경하고 갑니다. 다시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 사진 감사합니다.
서유럽 여행때 박물관에 들려 미라를 보고 왔답니다
새롭게 기억이 나네요 잘 보고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새로운 경험이네요 언제나 가볼수 있으려나 ..참
이집트 미이라는 크레오파트라가 살아 걸어나올것 같은 착각이 들더군요....
잘 보고 갑니다.자료 올려주느라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