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토 Arrigo Boito (1842~1918)
이번 고찰에서는 보이토를 대본작가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잘 알려져 있듯 그 또한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 해야 하겠다.
베르디 또한 그의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1868년에 라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보이토의 대표격인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를 관람하고 난 뒤였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보이토는 일찍이 밀라노 음악원에서 수학하며 작곡가로서의 정규 교육을 남달리 충실히 밟아온 인물이다.
그는 마치 바그너처럼 작곡가뿐 아니라 문필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한때 바그네리즘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에 필적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쓰기 위한 시도를 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완전한 성공을 보지는 못하지만, 이후에 남아서 전하는 오페라 <네로네>는 바그너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베르디 만년의 협력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마지막 두 걸작인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낳게 하는데 산파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 것으로 베르디 애호가들의 칭송을 받는다.
물론 두 작품의 대본을 그가 직접 썼을 뿐 아니라, 만년의 베르디가 창작의 의욕을 북돋을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1876년 피아베의 죽음 이후로 뚜렷이 정을 쌓으면서 공동작업을 해나가던 대본작가가 베르디에게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후로 뜸하게 작곡해나가던 베르디는 특별한 부탁이 없는 한 작곡을 게을리하며 자신의 농장에 칩거를 하게 된 것이다. 솜마, 메이, 뒤로클, 기슬란초니 등이 베르디의 창작 의욕을 그나마 부추길 대본을 제공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함께 하지는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에 몇 번 대면한 적이 있던 보이토가 그의 협력자로서 서서히 떠오르게 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하였듯, 작곡가로서 그와의 첫만남이 베르디에게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881년 개정 초연 <시몬보카네그라>에서 대본작가로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보이토는 기대 이상으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게 되었고, 베르디의 그에 대한 인식 또한 서서히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 과정에서 <오텔로>의 작곡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는데, 이에 관한 한가지 일화가 전한다. 실제는 보이토 자신이 <오텔로>를 오페라화 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이 작곡이 완성되기도 전에 신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보이토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이 영국 극작가의 대작을 오페라화할 사람은 베르디 밖에 없다는 여론이 음악계에서 형성되기에 이른다.
<오텔로>잔인한 신을 믿나니
그렇기에 타의에 의해 한동안 보이토는 <오텔로>의 오페라화를 단념하게 된다. 한때 바그너의 악극이론에 심취해 있던 보이토가 대본개정작업으로 인해 베르디와 교분이 두터워지고, 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의 능력에 서서히 경도되기 시작할 무렵, 베르디가 이전에 관심이 있어왔던 세익스피어의 희곡들에 대해 언급을 하게 된다.
보이토는 기꺼이 베르디에게 자신이 이전에 계획하던 대본을 제공할 것을 제의하며, <오텔로>를 오페라화 하는 것에 협력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그제서야 '오텔로'는 오페라로의 환생을 위한 진정한 주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베르디와 보이토는 이러한 부활의 노력 속에 각자 자신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드디어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대가의 결심은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아 가며 작업을 무리 없이 착착 진행시켜 나간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이 <오텔로> 작곡에는 있어서 그 기간은 엄청나게 소요된다. 무려 3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는데, 연로해진 베르디의 건강도 문제였지만, 항상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모색을 겸한 진지한 작업을 해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전의 그랜드한 스타일을 탈피하면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적 정신으로 일관된 새로운 양식의 오페라인 <오텔로>는 1887년에서야 초연을 보게 되는데, 작품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평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언급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이 작품으로 인해 당시의 관객들은 베르디의 나이를 잊은 듯했다는 것이다. 색다르면서도 힘찬 기백과 원작에 충실한 감동이 느껴지는 이 작품에 매료된 나머지 베르디가 일평생 그들과 함께 할 듯 여겼슴 직도 하다.
관객들의 이러한 기대 못지않게 베르디의 세익스피어 극에 대한 만년의 관심은 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텔로>의 작곡을 시작할 무렵에도 그는 훗날에 최후의 오페라 원작이 되었던 '팔스타프'와 '헨리4세'에 대한 언급을 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물론 이를 극적 흥미에 머무르지 않고 창작의 계기로 삼기에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던 보이토는 항상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디는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두었던지, 그냥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냥 여흥(?)삼아 작곡하고 있다는 표현을 남기고 있다. 또한 이 당시 개인적인 작곡에 몰두해 있던 보이토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는데, 노대가의 보이토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로 변했는지를 살펴보더라도, 보이토의 존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여하튼 베르디 유일의 성공(?)한 희극 오페라인 <팔스타프>는 보이토와의 3년 여에 결친 공동작업으로 1893년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팔스타프>사랑의 이중창
베르디는 이후에 약8년간을 더 향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오페라가 아닌 다소 색다른 작품을 최후로 남기게 된다. 물론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서도 또 다른 보이토(?)는 일익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보이토는 만년의 베르디에 엄청난 협력을 하였다라는 표현은 다소 미흡함이 있다. 보이토 형제라든지 보이토 가문은 베르디를 위한 아낌없는 노력을 제공하였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도 베르디가 영면하고 있는 '음악가 휴식의 집'이라는 양로원을 그는 생전에 자신의 최대의 걸작이라고 언급하고는 했다고 한다. 물론 건축물이기에 대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사람이 보이토의 형인 카밀로였다~ 밀라노의 마젠타 광장의 한 모퉁이 자리 잡고 있는 베르디 최후의 걸작의 설계도 작가(?)는 보이토의 형이다!
베르디의 임종까지 지켰다고 전하는 최후의 보이토는 이렇게 작곡가 뿐으로서 만이 아니라 훌륭한 대본작가로서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구할 수 있는 자료에 의하면 그가 당대의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에게도 대본을 많이 제공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물론 폰키엘리의 <라조콘다>의 대본작가라고 전하는 고리오Tobia Gorrio는 보이토의 필명이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문필과 음악에 관한 재능으로 많은 오페라들을 탄생시키지는 않았더라도 극소수의 대본과 작곡으로도 당당히 이름을 남긴, 효율성에서는 남다른 성과를 남기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 본다. 베르디와 보이토의 관계를 면면히 돌이켜 볼 때, 보이토가 베르디의 덕을 입은 것인지~ 베르디가 보이토의 덕을 입은 것인지는 아리송해지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은 보이토의 비명에는 <오텔로>, <팔스타프>의 대본작가라는 경력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베르디의 비명에는 보이토에 관한 언급은 없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외 여러 대본가가 있었지만 2편이상의 협력한 대본가를 소개를 해드렸습니다, 베르디의 주요 대본가를 여기서 끝내고, 이제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오페라를 주제로 새롭게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
첫댓글 Verdi - Falstaff - Taddei, Kabaivanska, Panerai, Ludwig, Araiza, Karajan Live 1982
https://youtu.be/nHFxW1BXT3A?si=d7s5GxIy8ggaSgYA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