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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더독(Underdog)의 성공 스토리에 환호한다. 올해 프로야구에서 넥센은 그 전형을 보여줬다. 한국시리즈 승자는 삼성이었지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팀은 넥센이었다. 선수들 평균 연봉은 9개 구단 중 7위였지만 정규 시즌 성적은 1위(삼성)에 0.5경기 뒤진 2위였고, LG·롯데 같은 대기업 계열 구단도 10년 이상 밟지 못한 한국시리즈 무대를 창단 6년 만에 밟았다. 4~5년 전만 하더라도 우량 자산(우수 선수)을 팔아 운영 자금을 마련하던 부실기업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시장 1위를 넘보는 알짜 회사로 성장한 셈이다. 한국판 '머니볼(Moneyball)' 신화로 부를 만하다. '머니볼'은 적은 예산으로 탁월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미 프로야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이야기를 그린 책과 영화 제목이다. 넥센이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빌리 장석'이라 불리는 이장석(48) 대표와 '염갈량'으로 통하는 염경엽(46) 감독의 이인삼각(二人三脚) 리더십이 있었다. 빌리 장석은 머니볼 실제 주인공인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이름에, 염갈량은 삼국지의 제갈량에 빗댄 애칭이다.
①SWOT 분석으로 실행력 있는 전략을 세운다
어떤 조직이든 장단점과 외부 여건을 분석하는 작업, 즉 SWOT(Strength· Weakness·Opportunity·Threat) 분석은 필수다. 그래야 전략이 실행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조직은 많지 않다.이 대표와 염 감독은 SWOT 분석을 기초로 한 전략에 능통했다. 그들은 "우리에겐 돈이 없고 일류 선수도 없어"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성적이 나쁘니 더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선수들 장단점과 외부 상황을 분석해 그에 맞는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세웠고, 전파했다.
이를테면 넥센은 다른 구단에 비해 우수한 투수가 부족했다. 자연히 볼넷도 많았다. 염 감독은 단순히 "볼넷을 적게 던지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무조건 3구 이내에 승부하라. 맞아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주문했다. 이처럼 목표와 성과 지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자 투수들은 자신감 있게 공을 던지게 됐고, 볼넷이 줄기 시작했다.
넥센에는 스타 타자가 부족했다. 선구안도 약했다. 염 감독은 그냥 "공을 잘 보고 치라"고 말하지 않았다. 타자들에게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볼을 치는 특별한 연습을 시켰다. 타격 연습 때 쓰는 피칭 머신을 스트라이크 존에서 빠지는 커브볼이 날아오도록 조정해 치도록 했다. 실전에서 중요한 타이밍일수록 상대 투수가 좋은 공을 던지지 않는 점을 감안해 나쁜 공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안타로 만드는 요령을 익히자는 취지다. 이런 연습 방식은 염 감독이 코치 시절 일본 전지훈련을 갔을 때 이치로 선수가 연습하는 광경을 보고 착안했다고 한다.
넥센의 안방인 목동구장은 담장까지 거리가 다른 구장보다 비교적 짧다. 이에 코치진은 홈런을 많이 칠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유리하다고 보고 박병호를 비롯한 중심 타자들에게 근력 운동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넥센이 팀 홈런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독립 구단인 넥센은 다른 구단과 달리 모기업 지원금 없이 외부 스폰서를 모집해 운영하다 보니 항상 자금 압박에 시달린다(넥센은 회사 이름을 쓸 수 있는 타이틀 스폰서다). 이는 위협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결국 거액이 필요한 자유계약 선수는 포기하고, 트레이드를 통해 가능성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내부에서 유망주를 키우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②전략은 포기를 수반한다
전략적 의사 결정은 본질적으로 선택과 포기를 내포하고 있다. 전략이란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결정인데, 일단 한 방향으로 선택해서 자원을 몰입하면 다른 방향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넥센은 선수들 장단점을 파악한 뒤 약점을 보완하기보다 장점에 더 집중하게 했다. 가치 집중에 충실했던 것이다.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박병호 선수는 전 소속팀 시절부터 파워는 원래 뛰어났지만, 정확도가 다소 떨어졌던 타자였다. 전에는 두 마리(파워와 정확도)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나 넥센으로 이적하고 나서 코치진은 강점(파워)에 집중하게 했다. 그러자 나쁜 공도 억지로 안타를 짜낼 수 있는 파워가 갖춰지면서 타율까지 높아지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 포수 허도환은 수비에 재질이 있었지만 타격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타격에 신경을 쓰다 수비까지 불안해지자 코치진은 "넌 잘하던 것(수비)만 잘하면 된다. 타격은 신경 쓰지 마라"고 격려했다. 그는 이후 수비형 주전 포수로 자리를 굳혔다. 장세진 KAIST 경영대 교수는 "넥센이 선수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주고 관리하는 점이나 경영 자원의 장단점을 잘 알고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③지시하지 않고 이해하게 한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저자인 경영학자 사이먼 사이넥씨는 "리더란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를 조직원들에게 이해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넥센에서는 투수들에게 "초구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라"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래야 다음 2구는 유인구를 던져 볼이 나와도 타자와 승부를 할 여유가 있다"는 것.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투 스트라이크 원 볼(타자들이 가장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로 진전될 가능성이 70%가 넘는다는 통계도 제시한다.
넥센에는 '1일 휴식권'이란 제도가 있다. 전지훈련 기간 중 도저히 연습을 소화할 수 없는 몸 상태일 때 아예 하루를 쉬도록 배려한 것이다. 염 감독은 "선수 시절 강압적 분위기에서 몸이 아픈데도 억지로 연습하다 보니 결국 팀으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역효과만 나더라"면서 "쉬고 싶을 때는 쉬고 그다음 날 연습에 더 집중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신참 선수들은 감독 재량으로 1일 휴식권을 강제 사용하도록 한다. 잘 쉬어야 더 잘 일할 수 있다. 구글이 직원들에게 하루 중 20%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마련한 것도 비슷한 취지다.
④야구는 지식산업이다: 끊임없이 연구한다
염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습관처럼 기록한 '메모 노트'가 5권 있다. 글씨가 빽빽한 이 노트에는 선수별 특징과 버릇, 장단점, 경기하면서 느낀 점, 다른 팀의 작전 성향 등이 적혀 있다. 그는 "선수 시절 주전 경쟁에서 탈락하면서 후보로서 1등을 할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매일 감독·코치·선후배가 연습하고 경기하는 광경을 보면서 뭐가 잘된 것이고 잘못된 것인지 적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목동 야구장 감독실 책꽂이에는 '야구 마스터 가이드' '야구의 심리학' 등 야구 관련 서적을 비롯, '승자의 안목' '관찰의 힘' '혼창통' '하루 10분 독서의 힘' '삼성 출신 CEO는 왜 강한가' '세종처럼' 등 다양한 분야 서적이 가득 꽂혀 있었다.
넥센 코치진은 이긴 날보다 진 날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왜 졌는지 연구해서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대비책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치면 복기하는 작업이다.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교훈이 나온다.
빠듯한 예산으로 좋은 선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선수의 숨은 가치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통계와 평판, 태도 등 다양한 접근법을 동원한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코리아 대표는 "야구를 지식의 축적이란 관점에서 바라본 운영 방식은 귀감이 될 만하다"고 덧붙였다.
⑤헝그리정신에서 싹튼 케미스트리
넥센은 단단한 케미스트리(chemistry·화합)가 강점이다. 홈런을 치고 선수와 감독이 장난을 치는 팀은 넥센밖에 없을 것이다. 재능과 실력만 믿고 팀워크를 해치는 '독불장군'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팀보다 뛰어난 선수는 없다'는 신조다. 연습생 출신으로 올해 MVP를 수상한 서건창 등 무명에서 스타로 발돋움한 선수가 많다 보니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한 것도 무시 못할 요소다. 염 감독은 "바닥까지 내려가 본 선수가 많아 그 심정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알아서 열심히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염 감독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리더에게 맞추라고 하기보다는 구성원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고 생각을 바꿔 즐겁게 실천하는 조직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희석 베인앤컴퍼니 파트너는 "넥센은 기업 마케팅 수단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절실함과 절박함에서 남다른 경쟁력이 창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