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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여행을 하게 되면 소위 그곳의 핵심부분만 들러서 찍고 가는 경우가 많게 되는데 두브로브니
크의 관광도 대부분이 그렇게 된다. 성안의 플라차 대로를 한 번 걷고, 다음에는 유람선을 타고 바다
에서 구경을 하고, 스르지 산의 전망대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성벽을 걸어보는
것으로 두브로브니크의 관광을 끝내게 된다.
그래서 역사적인 건물이라든가 역사적인 장소 등도 그냥 지나가게 되다가 보니 그 도시의 역사 등도
그냥 지나가게 된다.
성 블라이세 축제.......유투브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면서 아쉬운 것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Saint Blaise)와 관련된
건물인 블라이세 성당을 보지 못한 것과, 1391년에 문을 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으로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박물관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 이곳을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올 수 있다면 동유럽의 다른 바닷가 도시들을 다 생
략하고 이곳에서 적어도 며칠을 머물고 싶은 곳이다.
성 블라이세 성당..
4세기의 살았던 블라이세...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두브로니크 성이다.
블라이세(블라호) 성당은 두브로브니크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당으로 1368년에 건립되었
으며 1369년에 화재가 났고 1667년 대지진 때 파괴되었다. 지금의 바로크 양식 건물은 1706년에
시작하여 1717년에 완공되었으며, 베네치아의 건축가인 마리노 그로펠리(Marino Gropelli)가 지었
다. 1971년에 지역 예술가들이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몄다. 정면 계단에서는 도시의 주요한
행사인 새해 전날 행사 또는 여름 페스티벌의 오프닝 등이 개최된다.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페스티
벌은 1972년부터 매년 열리는데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오랜 전통이라고 한다.
불라이세 성당 앞에 있는 '롤랑의 뿔피리' 라는 서사시의 주인공인 롤랑의 기둥... 이곳에서의 이름
은 오를랜도(Orlando)로 롤랑은 전설속의 기사(騎士)로 피레네 산맥에서 사라센의 침입을 막아낸
프랑스의 기사이다. 롤랑의 석상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블라이세 성인이 두브로브니크를 베네이차
에서 지킨 것처럼 두드로브니크를 사라센의 후예인 오스만터키로부터의 침략을 지켜달라는 의미로
세웠을 것이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1234년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이 두브로브니크에 정착한 뒤 1317년 성벽
안에 수도원을 세웠지만 17세기 중반 대지진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유일하게 입구만 파괴되지 않아
1498년 제작된 피에타상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면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든 회랑과 정원이 나오고 성 로브레와 성 블라디슬라브의 뼛조각이 보관되어 있는 박물관이 자리
한다 그리고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1391년에 문을 열어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약국도 있다고.....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피에타 상
1391년에 문을 연 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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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움에 도착을 하니 7시로 아드리아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으로 가이드가 말하
기를 이번 여행에서 트로기르의 숙소와 더불어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네움은 보스니아 영토로 불가가 싸기도 하거니와 가파른 해안 도시이다 보니 대부분의 숙소들은 바
다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에 왔던 길...햇빛이 많이 부드러워져 있다.
네움의 숙소에 도착하고...두브로브니크의 관광객들 대부분이 네움에 와서 숙박을 한다고
숙소에서 바라본 바다...보스니아의 유일한 해변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숙소들...
오늘 들러야 할 곳과 이동해야 할 거리
다음날은 이틀 전에 들렀던 트로기르에 가까운 스플리트(Split)라는 해안 도시를 들러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Palace of Diocletian)를 둘러보고 이번 여행에서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인
플리트비체를 구경하는 날이다.
500㎞ 정도를 이동하고 두 곳을 구경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7시 반에 출발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5시 반에 일어나야 하니 패키지 여행에서는 이런 강행군이 늘 있는 일이다.
같은 곳을 아침에...
아드리아라는 우리가 묵었던 호텔...우리 말고도 한국 팀이 두 팀이나 있었다.
이곳에서도....
아직 보스니아의 바다이다.
어제 통과했던 검문소...
아직은 바닷가로..
이제 내륙으로 들어가는데 귤 농사를 많이 짓는 아푸젠이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아푸젠 귤 밭
네레트바 강...
길가에 보이는 석류...
오푸젠이라는 곳이다.
스플리트 가는 길...바닷가 쪽
고개를 넘어가면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스플리트로 가는 길은 메주리예에서 두브로브니크를 오던 길과 트로기에서 모스타르를 가는 길과
많이 겹치기 때문에 풍경이 익숙하다.
네움에서 스플리트까지는 164㎞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스플리트에 도착하니 10시로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이런 들판도 보이고...
산 비탈에 있는 동네도...
산 속에 있는 마을들
기름져 보이는 들판도 보인다.
휴게소
스플리트 가는 길의 휴게소에서 본 길과 깍아지른 절벽이 있는 산...절벽 아래 스플리트가 있다.
일부러 깍아낸 것처럼 보이는 휴게소에서 보았던 산이다.
바닷가에 스플리트가 보이고
도착을 하니 열 시가 되었다.
스플리트 가는 길 산악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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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관심이 있는 분만...블라이세 수호성인과 롤랑의 뿔피리 줄거리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블라이세(Saint Blaise)
성 블라이세는 4세기 아르메니아 세바스테의 주교로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라틴어로는 블라시우스(Blasius), 비잔티움식 발음으로는 블라시오스(Vlasios),크로아티아어
로는 블라주(Blaž)이지만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이 지방 방언인 블라호(Vlaho)라 불린다.
그는 오늘날의 터키 지역인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세바스테(Sebaste)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
하여 그 마을 부근에서는 꽤 이름 높은 의사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리스도인으로 덕망 또한
훌륭하여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아 후일 사제가 되었다.
그가 사제가 되자마자 고향의 주교가 사망하게 되었는데 모든 사제들과 신자들이 그를 새 주교로 추
대하였다.
주교가 된 그는 2년 후 발생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8)의 박해 중에는 동굴에 숨어
지내며 은수자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는데 리키니우스 황제(재위:308년-324년)시기이던
316년 어느 날, 숨어 지내던 숲에서 사냥을 하던 귀족들에게 발견되어 세바스테의 총독으로부터 귀
환 명령을 받고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복음을 전파하면서 열심히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 나가 기독교 신앙을 저버릴 것을 강요받았다. 이에 그는 순응하지 않고, 기둥에 묶여 금속 빗으
로 몸이 찢겨나가는 고문을 당한 뒤에 참수 되었다.
블라이세가 순교한 이날은 316년 2월 3일로 추정되어 후일 그의 축일이 되었는데 그에 대한 공경은
8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축일에는 인후(咽喉)를 축성하는 예절이 있는데, 그것은 목에 가시가 걸려 사경을 헤맨 한 소년
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4세기적의 인물인 이 성 블라이세에 대하여 두브로브니크에서 숭배가 시작된 것은 성 스테판 대성
당의 성직자인 스토이코(Stojko)에 관한 전설 때문이다.
그 전설에 의하면 971년 베네치아에서 온 배들이 항해에 필요한 물과 음식을 공급받는다는 조건을
세우며 두브로브니크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었다.
그날 밤, 스토이코 신부는 성 스테판 성당으로 가고 있었는데 성당 문들이 활짝 열린 것을 발견하고,
급히 성당 안에 들어갔다. 성당 안에는 천상의 군대에 둘러싸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스토이코 신부에게 베에치아 인들이 도시를 곧 침공할 계획이니 이를 시 의회에게 경고하
라고 일러주면서 자신은 며칠 밤 동안 베네치아 인들을 방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스토이코 신부가 그에게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천국에서 보낸 사람
이라고 했다.
스토이코 신부는 곧 시의회에 베네치아 인들의 침공 계획을 경고하였으며 시의회는 도시로 통하는
성문들을 굳게 걸어 잠그고, 곳곳에 군인을 배치하여 공격에 철저히 대비했다.
이에 베네치아 군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배를 철수하여 돌아가게 되었으며 도시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그 노인이 성 블라이세였다는 것을 알게 된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그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게 되었으며 당시 스토이코가 자기 앞에 나타난 블라이세는 ‘긴 수염을 한 노인이었으며, 주교의
관을 쓰고 주교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고 자세히 설명한 까닭에 그 모습 그대로 동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루자광장에는 바로 이 성 블라이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당이 세워지게 되
었다. 성인 조각상의 한 손에는 대지진 전의 구시가 성벽의 모습을 나타낸 조각품이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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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의 노래(롤랑의 뿔피리)의 줄거리(니벨룽겐의 반지와 더불어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던 기억이...)
카를 대제는 두 차례에 걸쳐 에스파냐 정벌을 행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이슬람교도인 사라센의 지배
를 받고 있었다. 제1회 에스파냐 정벌은 778년에 있었는데, 이때에 있었던 전투의 이야기를 적은 것
이 바로 〈롤랑의 노래〉라는 유명한 서사시였다.
〈롤랑의 노래〉는 카를 대제가 에스파냐의 모든 도시들을 다 함락시키고, 사라고사라는 한 도시만
을 남긴 상황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도시들을 잃은 사라센 세력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이렇게 된 바에야 더이상 버텨 봐야 소용없다."
그리고 사신을 카를 대제에게 보내어 항복의 뜻을 밝혔다.
"저희가 갖고 있는 모든 보물을 있는 대로 바칠 터이니, 강화를 맺도록 합시다."
그러자 카를 대제는 부하 장군들을 소집하여 이 일을 논의하였다. 그 장군들 중에서 롤랑이 제일 먼
저 입을 열었다. 그는 카를 대제의 조카로서 그 원정에서 가장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우리는 화약을 맺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라센을 멸망시킬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이전부터 롤랑과 사이가 나쁘던 가느롱이라는 장군이 반대했다.
"적이 항복하겠다고 하는데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백성들도 한시라도 빨리
화약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회의는 롤랑과 가느롱의 두 파로 갈라졌다.
"화약을 맺고 사라센과 휴전을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사라센의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 저들의 항복이란 술책일 뿐이다."
서로 흥분한 나머지 끝내는 분쟁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카를 대제는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 번만 더 사라센의 희망대로 해 주기로 하지."
휴전을 위한 대표로는 가느롱이 임명되었다.
가느롱은 사라센의 왕과 무사히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롤랑을 마음 속 깊이 미워하고 있던 가느롱
은 사라센의 힘을 빌어 롤랑을 처치할 것을 계획하였다. 가느롱은 회담을 마치고 물러나면서 사라센
왕의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우리의 왕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롤랑이라는 옹고집쟁이가 있어서 그 자가 자꾸만 전쟁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자만 없앤다면 당신은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가느롱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사라센의 왕은 낯을 찌푸리며 말했다.
"롤랑이라는 자는 훌륭한 용사라던데 어떻게 처치할 건가?"
"문제없습니다.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가느롱은 다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군대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때에 롤랑의 부대를 맨 뒤에 돌려놓겠습니다. 그때
롤랑을 공격하십시오."
이 계책을 들은 사라센의 왕은 몹시 기뻐하며 가느롱에게 후한 사례를 하였다.
이윽고 화약이 성립되어 사라센과 휴전을 하였고, 카를 대제의 10만 대군은 고국으로 개선하게 되었다.
그런데 카를 대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롱스보라는 고개에 막 당도했을 때였다. 그 고개
에는 매우 가파른 비탈 사이로 좁은 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카를 대제의 군대는 한 명씩
일렬종대로 고개를 넘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성이 많은 카를 대제는 만일의 위험에 대비했다.
"만일 여기서 적이 뒤로부터 습격해 온다면 우리는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무래도 후위대를
두어 뒤를 지켜야 하겠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임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카를 대제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가느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런 염려는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사라센 왕은 휴전 약속을 배반하는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음모를 의심받지 않기 위한 간사한 계책이었다.
가느롱의 흉계를 알지 못하는 카를 대제는 근엄하게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나도 알겠다. 그러나 무슨 일이나 조심하는 게 제일이지."
그러자 한 장군이 나서며 말했다.
"폐하의 염려는 지당하십니다. 역시 후위대를 두시는 편이 안전할 것입니다."
회의 결과는 후위대를 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누구를 지휘관으로 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때 가느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똑똑히 말하였다.
"그 임무에는 용맹한 롤랑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듣고도 카를 대제와 다른 장군들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롤랑 같은 훌륭한 장군에게
위험한 임무를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롤랑으로서는 자기의 이름이 일단 입에 오른 이상 잠자코 있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폐하, 그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후위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임무를 다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일단 말을 꺼내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를 대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일이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
의 활을 손수 롤랑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럼, 부탁하겠다. 절대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아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뿔나팔을 불어라, 그러
면 즉시 달려오겠다."
고개를 끄덕인 롤랑은 늠름하게 말에 올랐다. 이 광경을 지켜본 그의 친구들도 따라나섰다.
"잠깐만 롤랑, 우리들도 함께 가겠네."
그것은 올리비에를 비롯한 11명의 장군이었다. 그들은 롤랑과 함께 카를 대제의 12용사로서 일찍이
그 용맹을 날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롤랑을 비롯한 12명의 장군이 2만 명의 병사와 함께 후위를 맡게 되었다. 카를 대제도 이
것을 보자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만하면 롤랑이 개죽음을 당하지는 않을 게다."
그래서 카를 대제는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롱스보 고개를 넘어 본국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뒤에는
롤랑의 후위대가 늠름하게 전열을 갖추고 남았다.
한편 가느롱과 내통하고 있던 사라센 왕은 30만이 넘는 대군을 모아놓고 롱스보 고개를 향해 위풍
당당하게 진군해 갔다. 그들은 이윽고 고개 밑에 이르자 함성을 지르며 개미떼처럼 고개를 향해 올
라왔다.
그 소리는 이 산과 저 산을 울리며 고개 위에 있는 롤랑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롤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2용사 중에서도 영리하기로 이름난 올리비에가 곧 높은 언덕 위로 말
을 몰아 산기슭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창과 투구가 햇빛에 번쩍거리는
빽빽한 군사의 대열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라센의 내습이었다.
올리비에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진지로 돌아와 소리쳤다.
"적의 내습이다. 몇십만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이다."
"전열을 정비하라."
롤랑은 재빨리 전투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영리한 올리비에는 신중히 생각했다. 사라센군은 구름떼
같은 대군인데 비해 이쪽은 2만이라는 적은 숫자였다. 이런 전력으로는 아무리 용감한 병사라 할지
라도 승패의 결과는 뻔한 노릇이었다. 마침내 올리비에는 롤랑에게 말하였다.
"롤랑, 지금의 형세는 매우 위급하네. 자네가 가진 뿔나팔을 불어 주게. 그 소리를 들으면 대제께서
반드시 되돌아 오실 것이네."
그러나 롤랑은 올리비에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까짓 이슬람교도의 습격을 받고서 이 뿔나팔을 분다면 내 이름이 부끄러워
지지 않겠나? 아니, 우리 12용사의 이름이 부끄러워지네."
재차 올리비에는 정세의 위급함을 알리며 부탁했으나 롤랑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사
라센군의 선두부대가 맹렬히 밀어닥치고 있었다.
사라센군에서는 왕의 조카로 용맹이 높던 아엘로트가 프랑크 군대의 롤랑에게 소리쳤다.
"프랑크의 구더기 같은 놈들아, 빨리 나와서 알라의 창을 받아라."
이 소리를 듣자 롤랑은 분개하여 말을 몰고 나가려 하였다. 이것을 본 올리비에와 여러 장군들이 만
류하였다.
"잠깐만, 롤랑 서둘지 말게."
아엘로트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소리쳤다.
"이런 프랑크의 겁쟁이들아, 가느롱이 배반한 줄도 모르니 불쌍하다. 이 고개에 네놈들을 내동댕이
치고 가다니, 정말 네놈들의 왕도 바보 같은 녀석이구나."
이 말을 들은 롤랑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창을 움켜잡고 아엘로트를 향해 말을 내달렸다.
"바로 네가 롤랑이구나, 덤벼라!"
아엘로트도 지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러나 롤랑의 창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아엘로트의 방패를 보기 좋게 두 동강이 나고 창은 갑옷 깊
숙이 박혔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진 아엘로트는 즉사하고 말았다.
사라센 본대는 잠시 술렁이더니 왕의 아우뻘 되는 파르사론이 말을 몰고 나타났다.
"알라의 복수를 보여주마."
파르사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리비에가 말을 달렸다.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 주마. 비겁한 사라센 놈들아."
순식간에 두 사람은 뒤엉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파르사론마저 올리비에의 창에 쓰러지자 사
라센군은 일시에 대군을 몰고 공격해 왔다.
프랑크군도 2만의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12용사를 중심으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싸
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중과부적이라 프랑크군은 차츰 밀리기 시작하였다.
용감히 싸우고 있던 롤랑도 주위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올
리비에에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카를 대제에게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올리비에는 롤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대답하였다.
"이젠 늦었어. 이제 뿔나팔을 분다는 것은 오히려 더 부끄러운 짓일세. 이렇게 된 바에야 깨끗이 싸
우다가 명예롭게 전사하는 수밖에 없네."
영리한 올리비에는 이제 롤랑이 아무리 뿔나팔을 불어봤자 멀리 떠난 카를 대제에게까지는 도저히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 올리비에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됐구나. 나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개죽음을 당하다니···."
롤랑은 후회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롤랑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뿔나팔을 불고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 카를 대제의 본대는 이미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이었
다. 거기까지 롤랑의 뿔나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의 귀에는 미미하지만 그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아! 저 소리는 롤랑의 뿔나팔 소리가 아니냐?"
대제는 곧 말머리를 돌렸다. 10만의 대군도 뒤를 쫓아 롱스보 고개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카를 대제가 달려왔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후였다. 롤랑을 비롯한 그토록 믿음직스럽던 용사들의
시체를 보고 대제는 눈물을 흘렸다. 10만의 군사들도 모두 소리내어 흐느꼈다.
카를 대제는 배반자 가느롱을 처형하고, 롤랑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에스파냐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사라센군을 완전히 격파하여 사라센의 근거지를 없애버렸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여러가지 버전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롤랑의 노래〉는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신의를 버리지 않는 중세 기사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롤랑은 후대 봉건기사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롤랑은 소설 속의 인물이고 샤를마뉴대제는 피레네 산맥너머 현재의 스페인을 점령
한 사라센(이슬람)의 땅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이 소설은 십자군 전쟁을 고무하기 위해서 쓴 서사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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