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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金昌淑]한국 독립운동가·유학자 | 브리태니커
태어난 때 | 1879(고종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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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962 |
소속 국가 | 한국 |
직업 | 독립운동가·유학자 |
독립운동가·유학자·교육자.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種錫)·이승희(李承熙)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에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보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국내의 향교에 배포하고, 이를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 등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교통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쟁을 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1920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 四民日報〉를 발간하여 그중 일부를 국내로 우송했으며, 신채호(申采浩)를 도와 베이징[北京]에서 잡지 〈천고 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연명으로 발표했다. 그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교섭,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8월 국내에 잠입, 모금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유림단사건'이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나석주(羅錫疇)로 하여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상하이[上海] 공공조계(公共租界)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왜관경찰서에 다시금 구금되었으나, 일제패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 일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반대와 임시정부 지지, 신탁통치 반대 등 우익 정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한민당 및 이승만 계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비상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을 거쳐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아니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일 뿐이라 하여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이 해 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써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어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는 등 유림의 재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隣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그해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학교설립 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8월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1년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과 투쟁했다. 1953년 2월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 죽었다. 그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심산만초〉·〈벽옹만초〉 등이 있으며, 〈벽옹칠십삼년회상기〉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심산유고 心山遺稿〉로 간행했다.
朴千佑 글
파리 장서사건 [巴里長書事件]한국 역사 | 브리태니커
1919년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과 파리 강화회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곽종석은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여 3·1운동 때 유림이 제외되어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며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의논,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했다. 곽종석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초 의병운동에 나서기보다는 이승희와 함께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성토하고 토죄(討罪)하도록 호소했을 만큼 국제여론을 중시했다. 장서의 핵심적 내용은 ① 여러 나라 여러 겨례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② 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으며, ③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④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며, 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했다. 김창숙이 이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아 상경했을 때 호남의 전우(田愚)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호남지방의 김복한(金福漢)은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확인하고 서로 공동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양쪽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채택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연명한 유림단의 파리 장서를 김창숙이 휴대하여 국경을 넘게 했다. 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기초의 책임은 곽종석으로 되어 있다. 김창숙은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자 손진형(孫晉衡)·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상의한 끝에 이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며,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한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했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와 있을 때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국권회복단의 대표들이 유학자 조긍섭(曺兢燮)에게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문안을 초안하게 했다가 곽종석의 허락을 받고 김창숙이 가져간 장서와 같은 내용의 글을 김응섭(金應燮)에게 휴대하게 하여 상하이에 보냈다. 이는 일제강점 이후 유림들의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다. 장서사건이 드러나자 여기에 서명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들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곽종석은 74세의 노령에도 옥중에서 일본의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포로로서 잡혀왔다는 전사(戰士)의 의지로 대응했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도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그해 8월에 죽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3p0644a#ID2
김창숙(金昌淑, 1879년 7월 10일 ~ 1962년 5월 10일)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유학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며, 교육가,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김우(金愚)'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편집] 생애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고, 1909년 성명(星明)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5원흉 매국성토사건(乙巳五元凶賣國聲討事件)'으로 피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진정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우송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광복운동모금중 체포되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임정의정원(臨政義政院) 등에 관계하다가 1927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다롄(大連)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곧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었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경상북도 성주 대가면 사월리에서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며, 선조 때의 정승 김우옹(金宇顒)의 12대손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학혁명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 김호림은 서당에서 친구들과 학습중이던 김창숙과 학동들을 불러내 농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농사일을 도울 것을 지시하였다. [1] 이날부터 아버지 김호림은 귀천을 따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농업에 동참하게 하였다. 또한 여자아이를 시켜서 밥을 보냈는데, 늙은 종과 일꾼들에게 먼저 주고 그와 학동들에게는 나중에 주었다.[1]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군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발송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김창숙은 입을 열기를 거절하며 시 한수를 지었는데, 한시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형사는 조선인에게 한시를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고, 한시의 뜻을 해석한 일본인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이라 부르며, 고문형을 완화시켜 주었다. 법정 예심이 끝나자 일본인판사는 그가 수감된 감옥에 직접 찾아와 개인적으로 만나 시국을 논할 것을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2] 가족들은 그에게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다.[2] 그러나 그는 변호사 선임을 거절하였고, 변호사 김완섭이 세번이나 면회를 왔으나 뜻을 바꾸지 않았다.[3] 징역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를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 한다.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임시정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孫文)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 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만나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합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김원봉, 이극로, 신채호,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선전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류하여 '한국독립후원회',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 등을 결성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만주와 몽골의 황무지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의 모금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들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의 나석주가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1927년 5월 병으로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에 입원 중에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뒤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옥중 투쟁을 벌였고,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였으며, 이해 모친 인동장씨가 사망하여 21년 만에 다시 고향인 성주로 돌아왔다. 1943년 아들 김찬기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한다.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었다. 왜관 경찰서에 구속되어 수감 중, 일제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운형·박헌영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비판을 가하였다. 이후 중경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자신을 당수로 추대하려는 군소정당들의 손길을 모두 거절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주위에서 이승만을 찾아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4]
10월 21일 미국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외교정치위원회 회합에서 한국은 지금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신탁관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신문에 보도되자, 김창숙은 이승만을 찾아 여러번 물었으나 이승만은 답변을 회피하고 건국사업에 급한 재정문제를 들고 나왔다. 김창숙은 민족의 단합이 시급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으나, 이승만은 금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여[4]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5]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5]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6] 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7]
1946년 1월 비상국민회의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23일 김구가 정국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소집한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의에서 좌파계열 임정 국무위원인 성주식·장건상·김성숙 등이 탈퇴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8] 중경 임정 측이 과도정부 역할을 하려고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재보선할때 김창숙도 오세창·박열·조만식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선출되었다.[8]
1945년 10월 28일 김성수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9]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회의에서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10] 이후 민주의원에서 활동하며 정당난립과 신탁통치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 등으로 다른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유림계 재건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창숙은 이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0]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했고 김창숙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으로 선발되었다.[10]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주한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김창숙은 여운형,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10]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10]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미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던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 기존의 성균관을 정비하고,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기치로 명륜전문학교를 병합, 1946년 9월에 성균관대학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의 향교를 규합해 성균관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오세창, 조만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8] 9월 5일 임시정부가 다시 국무위원을 보궐선거하여 김성수, 김승학을 추가로 국무위원에 선출했을 때, 김창숙도 국무위원으로 재선 연임하였다.[8]
1948년 3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며, 4월 김구·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려 할 때 남한의 이승만의 협조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는가 하며 김구의 남북협상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뒤 이승만 정권 때는 야당활동을 하며 독재와 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1]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12] 그러나 선거 결과는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표를 받았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 조병옥. 김성수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6년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강제 사임하게 되었다. 1957년 성균관 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어 출마하였다.[13]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9표를 얻어 낙선, 208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하였다.[13]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병중에 박정희의 방문을 받았으나 외면하였다.
그 외에 의성김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14]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5월 10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 청천서당, 청천서원 등 동강 김우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다. 김창숙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는 청천서원 200m 아래쪽 사도실마을 어귀에 있다.[15]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화재를 당하여 안채는 1901년, 사랑채는 1992년 중수한 것이다. 현재 김창숙 생가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손씨가 집을 지키고 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고단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택했다. 이런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달라면서 시아버지 김창숙은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다.[15]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6]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8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