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면허를 꺼내며 4
신호등이 있는 대로로 가는 것이 제일 편한 줄 알았는데
따라 가기도 바쁜 초보에게 위험하지 않은 길이 있으랴.
앞차 꽁무니만 따라 가다 보면 신호등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마전 사무실 정면에 있는 교차로에서 비교적 여유 있게 앞차를 따라 가는데
난데없이 반대 방향의 차가 움직이며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닌가.
속수무책. 오도 가도 못하고 도로중앙에 멈춰서고 보니 신호등이 붉은 색이었다.
버스 기사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갔다.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자마다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데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곱지 않은 시선임을 어찌 모르랴. 진정으로 나를 얌체족이라 여기는 것일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진땀은 고사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가 야속할 뿐이다.
나는 내가 운전을 잘 할 줄 알았다.
학원 한 번 안가고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는 점도 그랬지만
10년만에 장롱속에 넣어 두었던 면허를 꺼내 주행연습을 시작했을 때도
사부는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었다.
" 운전을 하다가 그만 두셨죠?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모든 사람 중에 제일 잘해요."
나는 그 말이 정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을 진리처럼 여겼기에 되도록 가능한 것만을 취해 왔고,
한 번 선택한 것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왔다. 오히려 극성스럽다 했다.
성격상 그랬다. 그러기에 나는 분명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로 연수를 끝내고 운전석에 혼자 앉아야 했던 그 첫날은
정말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옷을 벗어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만 해도 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이 연실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진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머릿속이 근질거리는가 싶으면 귀밑으로 굴러 떨어지던 그 절망 같은 땀방울.
교통 사고에 실수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으랴마는 그저 야속할 뿐이다.
"운전대 앞에서 차가 무서운 건 세 달쯤 지나니 괜찮아 지더라구요."
때 맞추어 동료가 내게 해준 말이 아니었더라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나는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료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다른 방법도 없는 터였다.
운전이라는 것이 다른 것과 달라서 피눈물나게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3개월이라고 하는 선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말이다.
"에~이 사기!"
동료가 정해준 그 시간은 이미 다 까먹은 뒤였다. 주차장 앞에서 만난 동료에게 내가 푸념처럼 뱉았다.
그러자 그가 이 번에는 내 속을 이해하겠다는 듯 싱긋이 웃었다.
후진을 잘하려면 6개월은 가야 한다나 어쩐다나 말을 바꾸면서 말이다.
또 한 번 속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운전이라는 것은 욕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외에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 번 만 더 속아 주리라.
꼭 남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처럼 혼자 생각했다.
" 난 무서워서 운전 못해."
이미 어두워진 퇴근길이었다. 또 다시 3개월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사실은 무척 기다린 시간인데 내게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운전석에 앉으며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나는 왜 운전을 못할까. 슬그머니 부와가 났다.
'내일부터 이 깟 운전 안해.' 미련을 꺽고 나니 배짱이 생긴다.
사무실 앞을 돌아 나오자 교차로에 늘어선 간- 차량의 행렬이 보이고 신호등은 푸른색이었다.
나는 속도를 조금 낮추며 제일 뒤에 선 차량의 후미를 향해 이어 달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기선 안으로 막 진입하자마자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언제 노란 색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멀리서 따라오던 차량이 정지선에서 멈추는 순간
내 뒤는 자유의 공간. 비어 있는 우주가 되어갔다.
단정한 옷차림처럼 곧게 뻗은 중앙선이 너무나 선명하다.
하늘을 날고 있다는 표현이 이런 것일까?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않는다.
행복하다. 나는 왕이다.
새로 산 이불솜에 손을 묻었을 때처럼 가슴이 포근하다.
행복이란 그런 거다. 이보다 큰 즐거움이 있으랴.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순간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니 지금 나는 꼴찌가 아닌가.
쫒기다가 겨우 적군을 따돌린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잠시 넋을 놓는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꼭 앞질러야 한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아도 행복은 내가 서있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