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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자연 우주만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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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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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연구, |
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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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회 |
4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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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신 |
• 분 • 의 •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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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탐욕•나•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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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을 때 그 서원이 성불제중의 서원, 일원상의 서원 또는
제생의셍의 서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비로소 그것이 서원이라고 할 수 있고 신이 제대로 확신이 듭니다.
정산 종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이법으로만 하면 반드시 부처를
이룰 수 있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확신하겠다’
바로 이것입니다.
원불교법 좋네… 서원 잘 모르겠는데..?
그냥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고… 이것은 서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원은 확신이 들어서야 합니다. 관심 있는 사람 백 명보다
신념 있는 사람 확신 있는 사람 한 명이 낫습니다. 백 명의 교도보다
한 명의 확신 있는 사람이 낫습니다. 백 명 없어도 됩니다.
있으면 낫겠지만 비교해 보면 한 명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교단을 살리고 직장에서 기업도 나라도 사회도 살리는 사람은
신념 있는 그 몇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영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0%의 사람이 선도자로 성공한다. 20% 안에서도 3%가 끌고 간다.’
그 사람들은 바로 어떤 사람이냐?
목표가 있는 사람이고 신념이 있는 사람이고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가니까 따라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시간을 내서 온다는 것은 그것에 확신이 서야 합니다.
내가 설사 아직 습관이 안 떨어지고 욕심이 안 떨어지고 부족하고
잘 모르더라도 목표, 신념과 서원만큼은 크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양도 해보려고 노력하고 연구도 알려고 의두 연마를 하고
교전도 죽어라 읽고 써보고 해봐야 합니다.
‘시간 아깝다. 바쁘다. 살기 힘들어요.’ 가 아니라, 모든 것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훈련을 2~3일 또는 일주일 또는 보름이라도 가봐야 합니다.
실행을 해봐야지 사은 사요를 알아 수양 연구를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아! 이법이야말로 내가 영생을 통해서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 는 신념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아까 대성교우가 7일간의 출가 여행을 이야기 했습니다. 7일간의 출가
여행을 가기 전 마음과 갔다 온 후의 마음이 달랐을 것입니다. 본인이
이야기 했듯이 사심이 정심으로 바뀝니다. 맞습니다. 훈련을 나면 자기
스스로 점검이 되면서 핑계가 적어집니다.
그런데 훈련을 안 나거나 또 이법이 멀어지면 자꾸 자기를 합리화
합니다. 그것은 나태 속에 빠지고 탐욕 속에 빠지고 불신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 우는 어두운 사람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심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심이
주인이 되어서 온갖 핑계거리를 찾고 합리화를 찾고 자기 스스로
미워하거나 예뻐합니다. 자동으로 그렇게 됩니다.
서원과 신은 출발이자 끝입니다. 신앙의 극치만이 신이 아니라,
사실 수행의 극치도 신입니다. 내가 설사 잘못을 했고 내가 설사
욕심이 남아있고 아직 습관이 안 떨어져서 죽을 것 같아도 이법만큼,
이 스승님만큼, 이 교법만큼, 또 나의 방향만큼은 놓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경계가 와도… 어떤 경계가 와도… 집안이 망해도 자식이
죽어버려도 회사에서 잘려도… 갑자기 일이 다 막혀버려도 나의 서원과
신만큼은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그 사람이 기어코 만사 성공이라는 원동력, 그 힘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만사 성공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원과 신이 약하면 누가 조금만 옆에서 기분 나쁘게
‘누가 어쨌단다’ 고 뒷소리를 들으면 확인도 안하고 꼴아 버립니다.
‘잘 있거라. 원불교 좋았는데..’
누가 나를 해코지 하든지 아니면 어디서 원불교가 망한다는 소리가
들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서원과 신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원불교 학과에 들어갔는데 저는 신이 좀 있었나 봅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종사님이 와서 ‘너희들에게 지금 내가 혈인
법인을 하려고 기도를 하는데 너희들은 칼을 가지고 와서 자결을 하라고
하면 하겠느냐?’ 고 하면 대답할 사람은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자결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총부 정문을 지나가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원불교에서 ‘제원이 너 나가라. 네가 실수를 했으니 나가라’
라고 나에게 말한다면? ‘너희들이 나가라.’
또 하나 든 생각은 ‘내가 정문에 텐트 치고 안 나간다고 데모하겠다.’
내가 설사 잘못을 했더라도 내가 왜 나가냐?
교당에서도 보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둘이 언쟁이 붙었습니다.
B가 잘못을 해서 둘이 싸웠습니다. B가 잘못을 했으니 B가 나가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A가 나가버립니다. 잘못한 B는 남았습니다.
누가 잘 한 것 같아요?
- …
둘 다 잘못했지요. ㅎㅎㅎ..
그런데 잘못한 B가 안 나갔잖아요? 결과적으로는 B가 더 이익을 봅니다.
결국 나간 사람만 손해입니다. 왜 둘이 언쟁을 했는데 원불교를
나갑니까? 왜 일원상의 진리 인광의 진리를 벗어나느냔 말입니다.
원불교의 최고의 보루가 무엇인 줄 아세요? 법회입니다. 다른 것은
다 안 하더라도 법회만큼은 마지막 보루입니다. 왜? 법회를 참석해야지
이법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고 법회를 참석해야 반성을 할 수 있고
법회를 참석해야 일기를 쓰던가 유지비를 내던가 심고를 올리던가
교화를 하던가 연원을 대던가 훈련을 하던가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무님 제가 직장이 어려워서… 직장이 딱 겹쳐서 법회를
못 나오겠습니다.’ 그럼 제가 ‘아 그러십니까? 직장이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러면 유지비는 따로 보내십니까?’
일요일에 안 나온다고 왜 유지비를 안내요?
옛날에 시골에서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래도 자식 시켜서 유지비를 다 보냅니다.
우리 대종사님 당대의 제자들은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도들은 보면 법회에 안 나오면 유지비를 안 냅니다.
법회에 안 나오면 만사가 다 끝입니다. 법회 안 나오면 단비를 안 내야
합니까? 단비를 내야지요. 그래서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은 법회입니다.
그런데 아까 내 직장 때문에 법회에 안 나온다고 하면서 단비도 안 내고
유지비도 안 내고 5축 2재 때도 빠진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고
핑계입니다. 그것은 더 들어가면 신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해결책이 보이는 것입니다.
즉, 위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묘하게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분발심이 나고 분발심이 나면 의심이
걸립니다. 어떻게 해볼까? 아까 법회 날에 어쩔 수 없이 꼭 직장에
가야만 할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화요 공부방에
나오면 됩니다. 정기 훈련도 처음부터 못나니까 아예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의 이틀이라도 나와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서 합니다.
교화하는 방식을 교무가 꼭 알려주어야 합니까? 아니죠. 어떤 할머니는
믿음이 있어서 자신의 손자를 어떻게 교화해 볼까 생각하다가 교전을
책상 위에 놓고는 손자에게 ‘눈이 안 보인다 읽어주라.’ 자기가 개발한
것입니다. 왜? 이법에 믿음이 있으니까 어떻게 손자를 교화를 할까
연구하고 의심을 건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죠.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이 결혼을 하니까 함에다 교전을 보냅니다. 며느리가
보면 놀라겠지만 말을 좀 들을 때 강하게 나간 것입니다.
법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신 있게 내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신이 있는 사람은 원불교 다닌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신이 없는 사람은 꽁무니를 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불교도라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원을 대고 어떻게 실생활에서 원불교 법을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법위 등급에서 특신급만 되도 주위에서 다 알게 되어있습니다. 특신급만
되어도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 데려오고 싶고 막 한 번 해보고
싶어합니다. 삼학 공부에 대한 욕심이 적어도 문제이지만 오히려 과해도
문제입니다.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다가 자빠집니다. 뜨겁게 달궈지다가
사라진 사람 많이 보았죠? 그것도 삼학 공부의 탐욕입니다.
아까 대성교우님이 삼학의 성패는 신분의성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아주
정확한 말입니다. 불신•탐욕•나•우가 일상 생활에서 불신•탐욕•나•우의
얘기지만, 삼학 공부에 대한 불신•탐욕•나•우로 생각 하는 것이 일단은
더 효율적입니다.
나는 삼학 공부, 즉, 정신수양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얼마나 분발심을 내고 있는가?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얼마나 까닭 있게 의심을 내고 있는가?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얼마나 정성을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별로 신심이 없는가?
또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과한 욕심을 내지는 않는가?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나태하지는 않는가?
나는 정신 수양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는 않는가?
사리 연구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사리 연구에 대해서 어떤 확실한 어떤
일과 이치에 대해서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까지 가 보겠다는 신념이
있는가? 그러면 나는 어떤 분발심을 내고 있는가?
누구는 교전을 50독, 100독도 했다는데 나는 몇 번이나 읽었는가?
제가 옛날에 원남 교당에 가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원불교를 대학
입학하고 나서 입교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천주교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야 원불교에 입교를 하고 군대
갔다 와서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원불교 학과는 휴학 한 번도 안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불교의 법납이 얼마 안 됩니다.
30대 청년들이 원불교를 나보다 더 다녔습니다.
교무들을 나보다 더 많이 압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 보았죠.
‘교전을 몇 번이나 보았느냐?’
- 법회 때 한 번씩 보면 됐지 뭘 봅니까?
법회 때 둘레둘레 본 것이 답니다. 그래서
‘그럼 성질 날 때 어떻게 마음 공부를 하냐?’ 고 물으니..
- 참아야죠.
세상에 원불교를 15년을 다녔는데 경계에 따라서는 원불교 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고 사리 연구에 대한 신분의성이 아니라 그 안에
불신•탐욕•나•우가 꽉 차 있었습니다. 경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봐도
둘레둘레 본 것이 전부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면 우입니다.
그러니까 학생회가 대학생으로 올라갑니까? 대학생이 청년으로
올라갑니까? 청년이 일반으로 올라갑니까? 이것이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교당에 가보면 전부가 다 평균 나이 60세가 넘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저는 그것을 이렇게 봅니다. 이 삼학 공부를 신분의성으로 했느냐?
삼학 공부를 불신탐욕나우로 했느냐? 입니다. 원불교와 인연관계를 맺고
적당히 다녔느냐? 그냥 ‘교무님이 따뜻하니 좋아요. 밥을 사주니 좋아요.
교문님이 음식을 맛있게 드시니까 너무 좋아요.’ 이런 것도 좋습니다만,
진짜 해야 할 것은 이 삼학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그 사람이
신분의성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무이고 또, 그것을 하는
교도인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씩 하겠습니다. 먼저 신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이죠?
‘내가 부처라는 것은 믿는 것, 내가 일원상이라는 것을 믿는 것.’
일원상이 모시는 대상만이 아니라 일원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저것이 나다.’
그 믿음입니다. 일원상을 보면서
‘저 부처님이 나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냥 모시고 받들고 경건한 대상만이
아니라, 저 일원상은 그대로 내 자성 자리다. 그것을 믿자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은의 위력으로서
부처님도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실체로서 대상입니다. 참나의,
내 본래 자리로서의, 내 고향 자리로서의 부처님으로 믿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요?
어떤 사람이 시험을 봤는데 몇 번 떨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칠전팔기로 일어선 사람도 있지만 포기를 해야겠죠.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일원상의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포기를
해도 다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는 할 수 있는데, 나의 역량은 전생부터 닦은 것이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구나, 내가 과거에 잘못했구나.’
라고 하면서 포기를 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나는 멍청한 놈인가 보다’
이렇게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 스스로 무시하면서 포기를 하게 됩니다.
시험 하나를 똑같이 포기해도 일원상을 신앙한 사람과 신앙하지 않는
사람은 포기하는 마음의 심법이 다릅니다. 그것을 그대로 자기에게만
적용 할까요?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합니다.
떨어진 사람을 바라보면서
‘너는 자식아 안돼..’ 이렇게 바라보는 것과
‘너는 일원상인데 네가 이생에 노력한 것과 또는 출발지가,
아니면 전생에 닦은 바가 그래서 그런가 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릅니다.
여기에서 처처불상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나는 본래 삼대력을 갖출 수 있다는 신입니다. 그것이 같이 연결이
됩니다. 하면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신념입니다.
자존심 센 사람이나 멍청한 사람들은 신심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배우려는 열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신심이 빨리 납니다. 배우다 보면
나거든요. 그런데 배우지도 않으면서 똥 고집 세고 자존심 센 사람들은
배울 기회가 없으니 신심이 날 기회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불공이 참 중요합니다. ‘일단 알고 보자.’ 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것만 확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에
적합한 소리를 하면 잘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모른 것이 나오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법회가
끝나면 자기가 아는 것만 확인하고 갑니다. 그것은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배우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귀를 열고 추구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이 있거나 교만하면 자기가 아는 것만 확인하고 자가가
모르는 새로운 것은 다 거부합니다.
이 세상에 제일 쉬운 것은 뭘까요?
용환 : 강급
아. 쉬운 것은 강급 하는 것이다. 어려운 것은 진급하는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쉬운 것은 뭘까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영어가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은 다해도 수학은 못하겠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학이 어렵다고 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네가 수학을 얼마나 해보았느냐? 수학과 가는 사람도 있다.’
수학이 어렵거나 쉬운 것이 아니라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또 하려고 하는 사람은 쉽다. 하려는 사람은 어려운 일도 쉬워집니다.
그런데 안 하려는 사람은 쉬운 일도 어렵습니다.
‘어떻게 2박 3일 훈련을 가아~?’
만덕산에 가면 매년 10일간 훈련을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인가요? 안 하려는 사람은 2박 3일 훈련을 못하는 것입니다.
‘집안은 어떻게 하고 남편은 어떻게 하고 우리 새끼는 어떻게 하라고…’
쉽고 어려운 일이 따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하려고 하면 쉽고 안 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까
용환 교우의 말도 옳습니다. 진급은 어렵고 강급은 겁나게 쉽습니다.
아이리스에서 나오는
나옵니다. 40대가 그 정도로 되려면 운동을 오랜 기간 동안 하루에
몇 시간씩 빠지지 않고 해야 한답니다. 만일에 그 사람이 나태해서
일 주일만 운동을 안 하면 백일 이상 운동한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간답니다. 우리 선허 교우처럼 젊을 때는 며칠 안 해도 왕자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들어갑니다. 근육을 만들기는 어렵고 풀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하려면 독종이고 대단한 의지력입니다.
영화 배우 중에 역도 선수로 나온
김명민. 제가 그 두 사람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프로 의식을 가지고 과감히 살을 찌웠다가 빼기도 하고
뺐다 다시 찌기도 하는 구나. 그런데 우리는 내 수행이 저 사람들 보다
약한 것인가? 삼학 공부를 하고 신분의성을 공부하는 우리가 저 직업인
보다 살을 못 빼고 수양하는데 더 나태해서 못한다면 저 사람보다
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인가?’
저는 솔직히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저하고 비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 안 해보았습니까?
‘저 배우들은 프로의식이 있다’ 고 생각하고 말았습니까?
경계 경계, 그 일 그 일에 다 공부잖아요. 대종경에만 공부 있는 것
아닙니다. 그들은 불신탐욕나우가 아닌 신분의성으로 살을 빼고 찌우는
것입니다. 직업상 프로 의식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종사님의 교법을 만나고 인과와 영생의 진리를 만나고 큰 일원상의
서원을 가지고 성불제중을 하겠다고 하지만 좌선과 헌배와 사경도
제대로 못하는데 배우
김명민은 환자가 살이 있고 근육이 있으면 안되니까 운동을 안 해서
몸을 야위게 한 것이랍니다. 그대로 환자 같이 만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정성을 드리는데
대종사님을 만난 우리가 그 사람보다 정성이 없다면 신분의성을 배운
의미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1. 불신을 보겠습니다. 신의 반대이죠?
< 불신이라 함은 신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 >
모르고 믿으면 미신이요. 또 믿지 않고 앎만 하면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오히려 지식이 자기를 잡습니다. 믿음과 앎, 이것이 조화를 이룬 것이
비로소 제대로 된 신이고 정신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것을 불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이니라. >
결정을 못 얻게 합니다. 결정을 할 때 해야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못
합니다. 제가 많이 봤습니다. 나이가 35세가 전무출신 턱걸이입니다.
35세가 되었는데 전무 출신을 할지 안 할지 결정을 못하다가 나이를
넘겨 버립니다. 엄마를 탓하거나 자기의 능력을 탓하기도 하겠지만,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이 법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 내놓지 못합니다. 이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약하니까 결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툭 내놓지 못하는 겁니다.
대종사님은 유무자리로 바뀐다고 하셨는데 상담하는 쪽에서는 평균
69%는 절대로 안 바뀌고 나머지 31%만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답니다.
어떤 사람의 습관이나 특성이 안 바뀌니까 나머지 69%는 포기를
해야지 잘 산답니다. 이건 평균치고 여기서 강자와 약자가 나뉩니다.
강자는 바꿀 수 있는 유무 자리가 많고 바꿀 수 없는 부분이 적습니다.
약자일수록 변화되는 부분이 적습니다. 신분의성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즉, 악인이 선인으로 강급자가 진급자로
중생이 불보살로 어두운 길에서 밝은 길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이 있는 사람은 69%나 되는데 안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는 불신이 있는 사람은 부처의 씨가 박멸된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진리와 법화 스승과 회상에 대해서 비방을 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심화 기화
인화라는 말이 있는데 기운으로 화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라든가
심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가 있겠어?’ 라고 불신하거나 의혹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별로 안 할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확신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반드시 효과가 있다.’ 고 확신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확신이 없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가서 불신도 상호간의 불신인가? 또는 이 사회에서
경험한 불신인가? 를 같이 연결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은 몇 번
속고 넘어지고 상처를 입으면 중생들은 부정적인 것이 강합니다.
백화점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7~8명에게 기분 나빴던 일에 대해
말을 한답니다. 그러나 만족을 했다면 3명에게 말은 한답니다. 중생은
부정적인 것이 강하게 각인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을 은혜로 보기
보다는 불신의 세계로 바라다 봅니다. 설사 그 사람이 못된 짓을 했어도
다시 변화될 수 있고 죄가 잘못된 것이지 그 사람의 본성 자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본성 자체까지도 불신해
버립니다. 그러면 부처의 씨가 박멸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는 못된 사람이 더 변화를 해서
큰 사람이 된 경우도 의외로 많습니다.
사람의 신념에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열정입니다.
도둑질을 열정 있게 화끈하게 하는 사람이 방향을 바꾸면 그쪽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불교에 와서도 착하기는 한 것 같은데 열정이
없어서 물에다 술 탄 듯, 술에다 물 탄 듯하고 뜨듯미지근 해서 임원을
맡아도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은 이루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해보지도 않고 믿지 않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발 해보고 안 된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는 80%의 사람은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합니다. 또는 조금
해보았을 뿐입니다. 조금 해보고 안 된다고 합니다. 참 웃깁니다.
미안하지만 세상 일에 조금 해서 되는 일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니까 자기가 해본 일에 대해서는 알아요.
여자는 엄마가 김장을 할 때 얼마나 돈이 들고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들어가는지 압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것에 대해 잘 모릅니다.
왜? 어떤 일이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잘 안다는 사람도 자기 분야만 아는 것입니다.
불신자를 가만히 보면 상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중간한 겉똑똑이도
불신이 많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만 믿고 아는 것만 주장하고 아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아만심에 의한
불신 때문에 이 신앙길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팔타원님이 일제시대 때에 춘원
교화하려고 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안 만나주었습니다. 그래도
팔타원님이 계속 말하니까 대종사님께서는 그 사람은 나한테 올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을 낼 사람이 아니니 시간이 아깝다. 나는 그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팔타원님께 그만 말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모습입니까? 대종사님께서는 바쁘기 때무에 시간을
조절하신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 사람은 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가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자만 자족하고 아상이 있고 교만이 있는 사람은
신이 얼른 안 섭니다. 그리고 너무 몰라도 신이 안 섭니다. 지혜가 약한
사람은 신을 세우기가 어렵고 지혜가 있어도 상이 있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2. 탐욕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탐욕이라 함은 모든 일을 상도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이름이니라. >
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히 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죠?
어떤 사람은 워낙 신심이 장해서 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이 아니라
과히 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과過’자가 문제입니다.
과過
과속, 과음, 과식, 전부 과자가 문제입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이 대개
잡기를 좋아합니다. 요행심, 사행심이 강합니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똘똘하면서 탐욕이 많은 사람은 잡기에 백발백중으로
빠져듭니다. 어느 고대 법대생이 있었는데 내가 보니까 머리가 준
천재였습니다. 게임 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법대에 들어가서
결국 고시도 못보고 부산의 중소기업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는
좋은데 욕심이 있어서 게임에서 다른 사람 이기는 맛에 거기에 쑥
빠져서 삽니다. 자신이 게임에서 이기면 인정 받고 다른 사람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데 그 안에는 탐욕이 들어있습니다.
법문에는 무명이 착심을 일으키고 그러면 글러집니다. 그래서 죄가 되고
결국엔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무명과 착심의 관계에서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명無明 -> 착着 |
-> 비非 -> 죄罪 -> 고苦 |
욕심 |
|
사람이 동물보다 감각적으로나 인식 작용이 제일 뛰어납니다. 그리고
욕심이 가장 많습니다. 돼지 같은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더 먹지
않습니다. 로마가 망하기 전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막 먹습니다.
배가 부르면 토하고 또 먹습니다. 그러다가 거식증 걸리죠.
우리 사람이 뛰어난 감각과 인식 작용 때문에 탐욕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수양을 하는 것은 이 탐욕을 상당히 제거 하는 것입니다.
수양은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수양을 하면
탐욕이 깍아진다고 할까요? 비워진다고 할까요? 제거된다고 할까요?
닦아진다고 할까요? 맑아진다고 할까요?
수양을 하는 사람은 기운이 맑아집니다. 기운이 탁한 사람은 수양을
별로 안 했고 욕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검은 기운, 붉은 기운, 탁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도 안 좋고 장사도 안 됩니다.
대종사님이 제시해 주신 것이 이소성대죠? 제가 보니까 직업적으로
공무원들은 큰 돈을 못 법니다. 그럭저럭 삽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거나
무역을 하거나 부동산을 하거나 주식을 하면 한꺼번에 큰 돈을 만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무원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한 방이면
일 년치 월급이 나오거든요. 통이 작은 사람은 그것을 하라고 해도
못하는데 통이 큰 사람은 한 방을 노려서 어렵습니다.
제가 보니까 부동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탐욕과 요행심이 많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속입니다. 신문에 보면 일면에 나오죠? 경기도 가평에..
용인에.. 땅이 나왔다는 광고. 여러분들 그것 다 사기인줄 아세요?
신문에 나왔다고 믿으면 안됩니다. 거의 사기입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쉽게 벌려고 그런 것에 달라 듭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탐욕이
많은 사람을 노립니다. 탐욕이 없는 사람은 그것에 달라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탐욕이 많은 사람은 미끼를 던지면 그대로 걸려듭니다.
핸드폰에 갑자기 당첨되었다고 문자가 날라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탐욕을 잘 길들인 사람은
‘에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어?’ 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화로 부동산 좋은데 있다고 한 번씩 오죠? 탐욕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걸립니다. 평소에 담담하게 이소성대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공짜가 어디에 있다고? 좋으면 네가 벌지 왜 나에게 전화를 하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탐욕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에 그런 전화가 계속 오기에 누가 여기에 걸려 들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많이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다단계가 뭔지 아세요? 내가 교화상 다단계를 몇 군데를 가보았습니다.
기가 막히게 양장을 입고 와서 이것을 잘하면 좋은 집, 좋은 차, 세계
여행 맘대로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서 돈이
통장으로 쏙쏙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것이 되겠어요? 젊은 대학생도
거기에 앉아 있습니다. 젊은이가 이소성대로 지금부터 실력을 양성해서
땀 흘리고 창조적으로 미래의 글로벌 사회를 개척할까?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안에는 무명과
착심, 탐욕이 딱 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그런데 쫓아가는 것입니다. 다들 한번씩 가보았지? 내가 TV를 보고는
놀랬습니다. 다단계에 대학생이 꽤 많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쉽게
벌려고 하는 것입니다.
< 나라 함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하기 싫어함을 이름이니라. >
저도 이게 참 힘든 것인데, 여러분은 이렇게 안 하시죠?
저는 지금도 죽겠습니다. 우리 일반 어른들이 대체적으로 나이 핑계,
건강 핑계를 대면서 나태하기 쉽습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탁 일어나서 해버렸는데 요즘은 제가
안하고 있습니다. 체력도 달리고 회복력도 더딥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든지 분발심으로 그것을 챙겨서
바꾸자는 것입니다.
잘 하다가도 서원이 약한 사람은 나태하기도 하는데 살짝 핑계거리가
나오면 나태의 뿌리가 확 도집니다. 아프다, 출장을 갔다. 아니면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 바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는 단장의 눈치를
보면서 핑계거리를 찾느라고 사리 연구를 활용합니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것은 불신이나 탐욕보다는
나태입니다. 나태는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방바닥에 꿀이
발라져 있죠? 참 대단합니다. 죽을 때까지 위력을 발휘합니다.
나태한 사람들이 핑계를 합리화 하는 것은 자동으로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또 나태한 사람들은 정(靜), 안(安). 이 두 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나태한 사람은 편안하고 고요한 안정을 찾으면서 분발심을
내는 사람을 비방합니다. 또 상대적으로 자기가 뒤쳐지니까 그런 사람을
잡아 당깁니다.
어떻게 보면, 살•도•음이라는 계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태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데 밥 먹는 송장이
있는데 그것은 나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식충이, 살고도 죽은
송장이다라고 했습니다. 나태의 핵심은 습관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서원과 목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에게서 전화가 안 오나?'
'오늘 무슨 일이 없나?' 그러면서 시간 때리기, 시간 죽이기 이런 것을
합니다. 쉬는 날 보면 압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TV를 멍하니 두세
시간을 봅니다. 일주일간 죽어라 일하고 두세 시간 TV를 보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20대 30대 초반의 사람이 게임 죽어라 하고 있다. 아니면
아침에 퍼 자고 있다. 또는 쉬는 날 누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바로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나태의 표상이요 목표가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면 같이 닮아갈
것입니다. 실패라는 우리 안에 같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짝지로 고르지 마시고 가까이 하지도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나태가 제일 힘든 것입니다. 조금만 꼬셔도 넘어갑니다.
예를 들면 훈련을 갔는데 조금 쉬고 싶을 때 아래층에서 프로그램이
시작합니다. 옆에서 누가 ‘야 조금만 쉬었다 가자.’ 라고 합니다. 갑자기
동료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교무님 눈치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끈끈한
정이 붙습니다. 가장 꼬드기기 좋은 것이 나태입니다. 나태라는 마귀가
달라 붙어서 몇 번만 꼬시면 거의가 다 넘어갑니다. 그런데 확실한
서원과 비전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아플 때는 어떻게 할까요? 아플 때도 악착까지 해야 합니까?
그때는 융통성이 있게 해야 합니다. 나태와 다릅니다. 그런데 정말로
나태하지 않은 사람은 잘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태한 사람에게는
병이 많이 오고 법회에 빠질 핑계를 잡습니다.
우리 몸은 무리해서 아프기도 하지만 운동을 안 해서 아픕니다.
직장인들이 피곤하면 쉬어야 하지만 대체적으로 운동을 안 해서
더 피곤하답니다. 피곤하니까 운동을 해야 하는데 피곤하니까
그냥 쉬어버려서 더 피곤합니다. 즉, 나태해서 더 피곤한 것입니다.
‘피곤한데 무슨 운동이냐?’ 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은 피곤하니까
운동을 해야 합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잠이 부족하거나 피곤하면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곤하게 되는 이유는 일이 많아서 피곤 하겠지만
자신의 기운 자체가 약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심이 있거나 분발심이 있는 사람은 아플 때도 묘하게 풀리는 이치가
있습니다. 덜 아프고 다른 방법이 떠오르거나 해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아플 때 핑계를 잡는 사람은 거기에 파묻힙니다. 직장에서
나태하다가 늦게 오는 사람은 대게 핑계를 아팠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초상 났다고 핑계를 많이 대는데.. 그것을 써먹으면 습관이
됩니다. 직장 상사는 잘 속지 않습니다. 해본 사람은 안 속습니다.
자, 마지막 우愚입니다.
우와 치가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우를 뭐하고 하셨어요? 같이 읽죠..
< 우라 함은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자행 자지 함을 이름이니라. >
치(痴)는 뭐죠? 한자를 보면 답이 조금 나옵니다.
치痴
치자는 ‘알 지’자에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병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침에 좌선해야 하는데..?’ 하면서 그냥 자는 것..
이것이 치입니다. 아침에 좌선하는 줄도 모르면 우입니다. 뻔뻔하게
‘좌선? 그게 뭐야?’ 이것은 우입니다.
지혜가 있는 우가 있는데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렵워서 자기의 좋은
뜻이 통하지 않으면 은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가 아닙니다.
어리석음을 우라고 하는데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쉽게 말해서 하근기입니다. 치는 중근기로
중근병이 든 것을 말합니다. 중근병이 들면 모르는 것도 같고
아는 것도 같은데 하지는 않습니다.
우는 전혀 모르는 것이어서 마치 봉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봉사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도 모르고 일과 이치에 대해서도
모르니까 자기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와 치는 똑같이 자행자지를
하는데 치는 눈치를 보면서 자행자지를 하고 우는 눈치도 안 보고
자기 맘대로 합니다.
우리는 핵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대해서도 얼마나
아는가? 천지 자연 환경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사형 제도와 낙태의
문제에 대해서 이치적으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의 정치와
경제에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산 종사님께 사람들이 와서 일러 바칩니다.
‘종법사님 종법사님. 누구 교무는 이것을 잘못 했대요.’
‘누구 교무는 쫓아 내야 합니다.’ 이렇게 고해 바칩니다.
그러면 대산 종사님께서는 사람에 따라서 주로 두 마디를 하셨습니다.
‘야! 몰라서 그랬단다.’
이것은 우죠? 똑똑하고 잘 나가던 사람이 이렇게 했다고 하면?
‘야! 어쩌다 그랬단다.’
그렇게 해서 용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대산 종사님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신지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보통 양반은 아니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 속에서 그분이 ‘여래위’ 라는
인정은 너무 늦게 한 것 같아요. 대종사님과 정산 종사님은 확실히
여래위라고 생각을 하였으나 대산 종사님은 제가 직접 뵙고 안마도
해드리고 법문을 보기도 했는데도 좀 그러신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분이 여래위셨는데 몰랐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좀 더 가까이 못해서 죄송한 생각도 들고 법문 하나하나 봐도
정말로 성자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서
성질이 납니다. 그런데도 대산 종사님은 ‘몰라서 그랬단다’ 라고 하시고,
알면서 하면 더 밉다고 하는데 ‘어쩌다 그랬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그렇게 하시겠어요?
자. 전체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복사한 것 나눠 드렸죠?
먼저 박스로 된 것이 있죠? 이것은 대산 종사님의 교리 실천도에
나온 것입니다.
팔조가 나오죠? 오른쪽에는 진행사조, 왼쪽에는 사연사조,
그 다음에 신분의성과 불신탐욕나우가 나옵니다.
신은 정신과 미신, 분도 정분과 객분, 의도 정의와 사의, 성도 정성과
우성에 대해서 설명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불신탐욕나우도 설명이
나왔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자력신과 타력신을 병진해서 전탈전여, 전신전수.
이렇게 나오죠? 전탈전여 전탈은 ‘빼앗을 탈’ 자입니다.
전부 빼앗아서 다시 전부를 주는 것이다.
대산 종사님은 폐가 없었잖아요?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신도
포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법위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90세 넘게
살다가 가셨잖아요? 세 분 중에서 가장 오래 사셨습니다.
때로는 건강까지 빼앗지만 큰 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 다음 전신전수. 전체를 믿으면 전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만 믿으면 반신반수라고 합니다. 무신이면 무수입니다.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 둘을 대신근大信根이라고 합니다. 신근.. 신을 뿌리라고 합니다.
아무리 땅이 비옥해도 뿌리가 땅에 확실히 박지 않으면 좋은 땅에서도
그 나무가 크지 못하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머리가 좋고 능력 있는
사람도 신의 뿌리가 내려야지 그것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만 신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그 똑똑함이 사장됩니다. 그래서 신근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근은 결정의 원동력입니다. 그 옆에
고정(固定), 정정(靜定), 안정(安定)이라고 썼는데 탁 정하는 것은
고정하는 것이고 정정하는 것이고 안정하는 것입니다.
분발도 정분正忿과 객분客忿 이다. 대분지大忿志 이다. 뜻을 분발한다.
뜻이 딱 서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촉진 시켜준다.
의(疑)는 대의단大疑團이 됩니다. 의가 이 의심 저 의심. 왔다 갔다 하면
안 된다. 하나의 의심을 모으고 모으고 모으다 보면 마치 투망 끝을
잡은 것과 같이 하나의 의심이 단으로 형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의심도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의심이 들었다가도 훈련 끝나면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의심은 써 놓고 아침 저녁 좌선이 마지막에 계속
굴려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보통 2~3년 굴리면 대부분 열립니다.
빠른 사람은 한두 달에도 열립니다.
저는 멍청해서 한 20개월 하니까 의두 요목이 다 틔었습니다. 계속 하다
보면 낮에도 한 번씩 챙겨보고 특히 선 후에 맑은 정신에 번뇌가
가라앉고 나서 조금씩만 탁탁 비춰보면 효과가 더 빠릅니다.
불교에서는 의심을 간화선이라고 해서 계속 들입니다. 그런데 의심도
안 든 사람은 번뇌에 놀아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묵조선 후에
간화선인 의두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성(誠). 그리고 대정성. 성공의 어머니다.
왼쪽을 보면 불신은 성공의 길을 막는 장벽이다. 장벽을 만난 것과 같다.
탐욕은 모든 죄악의 싹이다. 나태는 살고도 죽은 송장이다. 우는 진리에
어두운 마음의 소경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맨 왼쪽에 보면 법륜상전法輪常轉 영겁불휴永劫不休다. 법의 바퀴가
항상 굴러가서 영원토록 쉬지 않는다.
맨 오른쪽을 보면 헌심영부獻心靈父 허신사계許身斯界다. 마음을 영부께
다 바치고 이 몸은 사바세계에 다 바치겠다. 이것은 주산 종사님께서
대종사님께 16세 때 써서 올린 시입니다. 우린 쓴 것을 읽기도 어렵죠?
자 뒷장을 보십시오. 뒷장은 신분의성을 종합적으로 해 놓은 것입니다.
신의 반대는 불신이요, 분의 반대는 나태, 의의 반대는 우고
성의 반대는 나태다.
신은 믿음이요. 분은 용장한 전신심이요. 의는 알고자 함이요. 성은
간단없는 마음이다. 진행사조는 곡식이고 동력이고 밑의 사연사조는
잡초이고 장애물입니다. 삼학 공부에 대한 동력은 진행사조요 삼학
공부에 대한 장애가 되는 것은 사연사조입니다. 그리고 신은 정하는
원동력이고 분은 촉진하는 원동력이고 의는 알아내는 원동력이고
성은 목적을 달성하는 원동력이다.
그 다음 오른쪽을 보면 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 바르게 믿어서
전신전수 하여라. 온통 믿어서 은혜를 온통 받아라. 분은 정당한 법으로
용맹전진 하여라. 분발은 자기 내면에 일어나는 자기 혁명을 말합니다.
혁명이 내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다음 의심은 사리간에 바른 의심을
일으켜 대원정각을 하는 것. 마음계발입니다. 성은 한결 같은 정성으로
크게 성공하자. 이 성은 신과 분과 의에 성을 들이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의 정성, 분에 정성, 의에 정성입니다.
다음 불신탐욕나우는 믿지 않는 것이요. 과히 취하는 것이요. 하기
싫어하는 것이요. 사리를 모르는 것이다. 우 밑에 써있죠? 몰라서
그랬다. 어쩌다 그랬다. 만사를 이루려 할 때 원동력이 아니라 장애이고
장벽입니다. 그래서 결정을 못 얻게 하고 상도에서 벗어나고 하기
싫어하고 자행자지 한다. 그것이 성공을 막는 장벽이 되고 죄악의
씨앗이 되고 송장이 되고 봉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삼학 공부를 할 때 수양 연구 취사를 불신탐욕나우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신분의성으로 하고 있는가? 여기에 따라서 그 사람의
평상시의 아이큐 능력 학벌 지혜 등을 뛰어 넘어서 성공 할 수가
있습니다. 대종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능력도 없고 원불교에
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뭐라고 하셨죠? ‘신분의성으로 들이대라. 능력이 없고 온지 얼마 안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있으면 좋지만,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신분의성을 들이대면 그것은 큰 문제 될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위에 써 놓은 글을 보면, 저수.. 저수하는 것은 수양입니다.
불을 밝히는 것은 연구입니다. 그래서 취사로 활용해 쓴다.
물을 모으고 그 물로 전기를 일으켜서 불을 밝히고 그 불로 활용하는
것이 수양 연구 취사입니다.
자 질문 있으면 하세요.
n 질문과 답변 =========================================
Q_김법준 : 육조 대사의 무상선을 보게 되었는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부처를 본 사람’ 이라고 거기에 적혀 있는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는
말과는 반대로 ‘꽉 차다’ 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저는 마음이 꽉 차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A_교무님: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 의심은 낼 만 합니다. 누가 저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줄 사람?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부처를 본 것이다. 정답인데… 우리가 성품 자리를 뭐라고 하죠?
우리가 일원상의 대 자리는 흔히 성품, 진공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는 어떻게 알아가는 것이냐? 이것은 성리 공부와 의두 공부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인데 일념미생전 자리란 표현이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자리다.
대大 = 성품性品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분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 공부..
마음 공부.. 하는데.. 일어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을
마음 공부로 압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계교심 만 늘어납니다.
번뇌심 만 더해집니다.
마음 공부는 대소 유무의 종합적인 성리대전입니다. 마음 공부는
대 자리를 깨달아서 소 자리로 유무 자리를 운용하는 것입니다.
마음 이전 자리를 알고 거기에 바탕 해서 뿌리가 없이 나오는 것이 마음입니다.
아까 ‘내 안에는 가득 찼다’ 고 했죠?
그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이 아닌 꽉 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 자리 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 자리를 묘유妙有라고 합니다.
이 묘유가 유무 자리를 같이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공묘유의 수행문에 있죠?
우리 정전의 내용을 보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이 마음을 알자는
것이 먼저 나옵니다. 이 마음이 무량수각 임을 먼저 깨쳐서 염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상(觀想)염불, 칭명(稱名)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 성리 자리, 참 마음의 자리를 그대로 염불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의 기초가 견성입니다. 견성을 해서 성품을
봐야지 일념미생전 자리. 이 자리에서 이 마음도 나오고 저 마음도
나왔구나. 이 마음은 뿌리가 없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주인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 공부로써 원리로 대조 할 수 있습니다.
법문에 대조하는 것은 교법 반조이지 자성 반조는 아닙니다.
교법 반조는 초•중학생들에게 적용하면 딱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부의 다로 안다면, 오히려 큰 도인이 되는 길을
막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것은 한 마음이 나오기 이전 자리,
그 자리를 수양을 통해서 비우고 비워서 그 자리를 확인하고 그 자리를
투득해야지 비로소 마음의 원리가 대소 유무로 성리대전의 공부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다음에 하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구체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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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수고하여 주심에 편안하게 공부함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시는 부분의 염불공부는 觀相과 稱名과 實相염불로 구분되므로 심령염불이 아니고 칭명염불을 잘못 정리한게 아닌지요?
제가 불교의 염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는데 한자로 검색하니 정확하게 나옵니다. 교정교도님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