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에 대해서는 우선 삼국유사 1권 왕력편에 27대 선덕여왕조에 다음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 남편은 음갈문왕"
그 다음에는 29대 진덕여왕조에
"이상은 중고(中古)로서 성골의 왕이고, 이하는 하고(下古)로서 진골의 왕이다.
또 삼국사기에도 연표에 박혁거세거세간조에
"진덕왕에 이르기까지 성골이다."
또 진덕왕조에도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 왕을 성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학자들이 성골과 진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를 하여, 성골이 아님에도 왕이 된 김춘추와 진덕여왕의 차이를 연구하다 보니까, 피의 문제 즉 혈통의 문제가 이들을 나눈 것이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신라는 골품제 사회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것인가는 결국 혼인관계가 가장 결정적이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성골이 좁게 말해 진평왕(동륜)의 자손에게만 해당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진지왕(사륜)이 폐위되면서 진평왕 직계에 혈통의 순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불교적인 이름으로 성골을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성골이 안된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참고로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입니다. 즉 선덕여왕의 동생이지요.
화랑세기가 나온 이후에도 성골과 진골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를 크게 바꾸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학계의 정설이다 보니까 교과서에도 실린 것입니다. 성골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논문들이 있고, 연구성과도 풍부합니다. 일일이 참고논문을 제시하기 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그냥 실린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