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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ch liebe Den, dessen Seele übervoll ist, so dass er sich selber vergisst, und alle Dinge in ihm sind: so werden alle Dinge sein Untergang.
나는 사랑한다,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지고서 자기 자신을 잊고 모든 것들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그의 아래로-감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화시키는 것. 그렇게 할 때에 자기 안에 모든 것들이 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혼자서 아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아래로 가게 된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넘쳐흐르는 영혼’이다. 넘쳐흐르는 영혼은 자기를 잊게 한다. 자연스러운 아래로-감이 곧 초인의 길이 될 수 있는 것. 모든 것들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것들의 무게로 자연스럽게 아래로 가는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따르는 자가 아닌가.
Ich liebe Den, der freien Geistes und freien Herzens ist: so ist sein Kopf nur das Eingeweide seines Herzens, sein Herz aber treibt ihn zum Untergang.
나는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해서 그의 머리는 그의 심장의 내장이 될 뿐이지만, 그의 심장은 그를 아래로-감으로 이끌어간다.
자신을 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흘려보내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있게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정신’ 뿐만 아니라 ‘심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심장은 ‘사소한 체험’을 통해서 가지게 된 것. 이 심장과 정신이 모두 자유로운 사람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이 된다. 머리는 심장의 내장이 됨으로써 심장의 정신이 된다. 심장과 머리가 온전히 하나가 된 상태. 심장 안에 내장이 된 머리가 있고 심장은 그를 아래로 가도록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머리도 역시 같이 아래로 가게 되는 것.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은 하나가 되어서 아래로 가는 것은 아래로 가지 않는 것이 없는 상태. 자기 자신이 온전히 아래로 가고 있다는 것.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온전한 사람이 된 것인데 온전한 사람이 곧 초인으로 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약은 한 걸음 내딛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인데 차원이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 요컨대 아무것도 아닌 듯이 초인으로 화하는 것.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초인이 되는 것, 이렇게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사람은.
Ich liebe alle Die, welche schwere Tropfen sind, einzeln fallend aus der dunklen Wolke, die über den Menschen hängt: sie verkündigen, dass der Blitz kommt, und gehn als Verkündiger zu Grunde.
나는 사랑한다, 인류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검은 구름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모든 사람들을. 그들은 번개가 칠 것을 알려주고, 예고자로서 역시 땅으로 간다.
검은 구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 이 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검은 구름이 끼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윽고 번개가 치게 되는 것.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순환 가운데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이들이라는 것. 이 빗방울은 번개가 칠 것을 알려주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예고자’라는 것. 번개는 곧 초인인데, 이 빗방울과 같은 사람들은 초인을 예고하고 있다. 이 물방울들은 땅으로 가고 있는데 이 물방울들은 초인을 예고하고 몰락하는 것. 자기가 땅으로 감으로 해서 초인을 예고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엣 초인을 볼 수 있다는 것. 땅으로 사라지면서 번개를 예고하는 이들의 행위는 헛된 것이 아니라 미리 알려주는 데 의미가 있다. 미리 알려주는 것은 참된 지헤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물방울(Tropfen) 혹은 바보 얼간이(Tropf)이 곧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기가 초인을 예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이 순수한 영혼만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어설프게 몇 가지 앎을 가지고, 헛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이비 지식인들이나 성자들은 절대로 이 물방울(Tropfen)과 같은 바보(Tropf)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초인의 모습은 그들에게서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줄타기 묘기에 열중하고 있는 이 시장의 사람들에게서 초인을 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Seht, ich bin ein Verkündiger des Blitzes und ein schwerer Tropfen aus der Wolke: dieser Blitz aber heisst
Übermensch. -
보라, 나는 번개의 예고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러나 이 번개야말로 초인이라고 불린다.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번개의 예고자라고 한다. 자신이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초인이 아니라 초인을 예고하는 자라는 것.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들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자신도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그래서 그 사람들과 함께 초인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 그 사람들이란, 이 시장바닥의 사람들, 줄타기 묘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차라투스트라가 역설하는 초인에는 무관심한 이들과 함께 초인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이들과 함께 초인으로 나아가는 것. 혼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사람이 초인이라는 것. 시장바닥의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이 바로 초인이라는 것.
그 초인은 번개라고 한다. 번개는 어느 순간 번쩍이는 것. 이 사람들도 지극히 우둔한 바보 같은 자들이지만 번개와 같이 번쩍이는 순간 초인으로 변하게 될 것임을 말한다. 이 사람들 속에 지극히 작은 초인의 씨앗이 있음을 보고 거기에서 이러한 희망을 보고 있는 것. 이렇게 보는 것 역시 <번개 같은 봄>이 아닐까.
5. Als Zarathustra diese Worte gesprochen hatte, sahe er wieder das Volk an und schwieg. "Da stehen sie", sprach er zu seinem Herzen, "da lachen sie: sie verstehen mich nicht, ich bin nicht der Mund für diese Ohren.
Muss man ihnen erst die Ohren zerschlagen, dass sie lernen, mit den Augen hören. Muss man rasseln gleich Pauken und Busspredigern? Oder glauben sie nur dem Stammelnden?
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다시 군중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저기에 그들이 서 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저기서 웃고 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자들의 귀를 위해서 말하는 입이 아니다. 눈으로 듣는 법을 배우도록 먼저 저들의 귀를 부서뜨려야 할까? 큰 북으로 치듯이, 참회를 설교하는 사람처럼 고함을 쳐야 할까? 아니면 저들은 말더듬는 자의 말만을 믿는 것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시장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침묵하게 된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초인의 씨를 보았으므로, 이 사람들은 초인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이 사람들 앞에 선 자신과 그들이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차라투스트라는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입장에 놓여 있다. ‘나는 사랑한다’고 폭죽을 터뜨리듯이 이들을 향해서 사랑을 외치고 또 외친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침묵에 싸여 군중을 주시한다(ansehen). 그리고 첫 마디는 ‘저기에 그들이 서 있다’(Da stehen sie). stehen은 ‘서 있다’는 뜻도 되고 ‘존재한다’는 뜻도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거기에 저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저들의 존재 자체가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초인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탕을 보게 하는 것이 되고 있는 것. 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저들이 초인이 될 가능성을 넘어서 필연성이 있다는 것. 저기에 저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에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저들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차라투스트라의 존재 의의도 없는 것.
그런데 그 사람들이 웃고 있음을 본다. 자기를 향해서 비웃음을 날리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을 초인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인임을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차라투스트라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시장바닥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어떻게 초인일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자신을 그들이 비웃고 있다. 자기도 그들을 비웃으며 떠나가면 그만이겠지만 초인의 씨앗을 그들에게서 본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런 자들의 귀를 위해서 말하는 입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저들의 ‘귀’가 문제라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군중은 차라투스트라를 보지 않고 <듣고> 있을 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눈으로 듣는 법을 배우도록 저들의 귀를 부서뜨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귀가 저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 귀로 들은 풍문이 저들로 하여금 초인으로의 길에 나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의 귀가 돌이킬 수 없이 세상의 풍문에 고착화되었다고 본다. 자기들이 들은 풍문을 곧 진리로 믿어버리고 있다.
산에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자기들의 귀에 고착화된 세상의 풍문과 맞지 않으므로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말더듬는 자의 말만을 믿’고 있다. 말더듬이는 온전한 말을 하지 못하는 자인데 저들이 듣고 있는 것은 말더듬의 말과 같은 온전하지 못한 진리의 말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귀가 열리지 않게 되어 있는 저들에게 큰 북을 치면서 설교자처럼 고함을 치고 말을 해주어도 들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들을 귀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듣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듣는 귀 대신에 듣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Sie haben etwas, worauf sie stolz sind. Wie nennen sie es doch, was sie stolz macht? Bildung nennen sie's, es zeichnet sie aus vor den Ziegenhirten.
저들에게는 저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바로 세움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염소치는 사람들과 구별시켜주고 있다.
저 시장의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있는데, ‘세움’(Bildung)이라고 한다. ‘세움’이란 무엇인가. 이 사람들을 염소 치는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것. ‘염소 치는 사람’(Ziegenhirten)이란 무엇인가. 염소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다. 염소 치는 사람은 염소의 고집을 꺾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 염소 치는 사람은 그것 밖에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염소 치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염소 치는 사람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 이 염소 치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게 하는 근거는 이들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세움’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염소 치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여길 정도의 자부심이다. ‘세움’이란 무엇인가. 구성 능력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 염소와 같이, 염소 치는 사람과 같이 하나만 알고 그리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세울 때에 하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재료를 적절히 배합하고 기구를 활용하면서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세움의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세움’의 능력은 비록 간단한 것들만을 구성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서 초인으로 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
Drum hören sie ungern von sich das Wort `Verachtung`. So will ich denn zu ihrem Stolze reden.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경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기를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부하는 것을 향해 말하리라.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경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한다. 자연스런 인간의 마음의 흐름. 이들이 경멸을 받아들여야 초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들은 경멸이라는 말 자체를 듣기를 싫어하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는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들에게 경멸을 말하는 대신 ‘자부하는 것’을 향해서 말하기로 다짐한다. 이들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겠다는 것. 이들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잘 받아들이는 것을 향해서 말하겠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초인의 씨가 있음을, 아니 이미 이들이 초인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 그 자부하는 것을 향해서 말하는 것은, 그 자부하는 것 속에 초인의 씨앗이 있음을 뜻하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낮은 곳으로 내려와 시장 바닥의 인간들이 자부하는 것과 함께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곧 이 시장바닥의 사람들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초인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So will ich ihnen vom Verächtlichsten sprechen: das aber ist der letzte Mensch.“
그러므로 나는 가장 경멸스러운 자에 대해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것은 다름 아닌 최후의 인간이다.”
‘경멸’이라는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하는 이 시장의 사람들에게 경멸을 말하지 않고 그들의 자부하는 것을 향해서 말을 하는데, ‘가장 경멸스러운 자에 대해’ 말하겠다고 한다. 가장 경멸스러운 자를 보여줌으로써 경멸의 최고치를 알게 해주어서 이들의 경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 가장 경멸스러운 자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한다. 최후의 인간 이후에는 인간이 없다. 인간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초인이 오는 것. 최후의 인간을 지나서 초인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겠다는 것. 경멸의 최고치에 이를 때에 곧 초인으로 화하는 것. 이 시장의 사람들은 경멸스러운 자들인데 이 시장의 사람들의 경멸이 최고치에 이를 때에 이들은 초인으로 화하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보고 있다. 고상한 척 하면서 경멸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초인으로 화할 수 있는 씨가 없는 자들인데, 여기 이 시장의 사람들에게는 경멸이 무엇인지 아는 그 초인의 씨앗이 있으므로 이들에게 경멸의 최고치를 보여주고 그리고 나아가게 하려고 한다. 아니, 자기도 이들과 함께 초인으로 나아가려 한다.
Und also sprach Zarathustra zum Volke:
Es ist an der Zeit, dass der Mensch sich sein Ziel stecke. Es ist an der Zeit, dass der Mensch den Keim seiner höchsten Hoffnung pflanze.
Noch ist sein Boden dazu reich genug. Aber dieser Boden wird einst arm und zahm sein, und kein hoher Baum wird mehr aus ihm wachsen können.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이다. 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이다.
아직도 인간의 토양은 충분히 그럴 만큼 비옥하다. 그러나 이 토양은 언젠가는 피폐하고 활력을 잃을 것이며, 더 큰 나무들은 거기에서 다시는 자라 나오지 못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울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금 가장 고양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토양은 비옥한 상태에 있지만 시간은 이 비옥한 토양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고 인간은 활력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큰 나무들이 그 토양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장의 사람들의 상태가 절망적이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이 상태 그대로는 초인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없어져버릴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군중들은 지금 상태로 만족해하고 있다. 지금 상태에서도 나무들은 자랄 것이다. 하지만 이 군중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이 비옥한 토양이 피폐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간을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재만 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현재와 함께 미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이란 지금이라는 비옥한 토양에 뿌리는 것. 이 씨앗으로써 시간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씨앗이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나 나무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지금 씨앗을 심으면 나무들이 나오겠지만 이 비옥한 토양은 시간이 지나면 큰 나무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는 이 땅에 씨앗을 뿌려도 헛된 일이 될 것임을 뜻하는 것. 이 씨앗은 무엇일까.
현재를 미래와 이어주는 것.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 시간을 넘어서는 것. 씨앗 속에는 나무 전체가 들어있으므로 씨앗을 심는 것은 곧 나무를 가지는 것. 지금 인간이 초인이 되기 위해서 씨앗을 뿌려야 하는데 그 씨앗은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망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과 같은 것. 꿈과 희망을 가질 때에 지금이라는 토양은 충분히 비옥하므로 그 꿈과 희망을 큰 나무처럼 자라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씨 뿌리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 그러니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Wehe! Es kommt die Zeit, wo der Mensch nicht mehr den Pfeil seiner Sehnsucht über den Menschen hinaus wirft, und die Sehne seines Bogens verlernt hat, zu schwirren!
슬프다! 장차 사람이 인간들 저 너머로 자신의 동경(憧憬)의 화살을 쏘아 보내지도 못하고,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 때가 오리라!
차라투스트라의 슬픔은 어디에서 말미암았는가. 현재 이 사람들의 상태는 충분히 비옥한 토양과 같은데 미래는 금세 병들고 길들여진 상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차라투스트라를 슬프게 한다. 미래의 인간은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인간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아 보내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활시위도 당기지 못하는 상태. 미래를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상태가 곧 차라투스트라를 슬프게 하는 것.
차라투스트라가 이 사람들에게 지금 말해주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러한 ‘때’가 오리라는 것. 그래서 지금 이 비옥한 토양에 씨를 뿌려야 함을 역설한다. 이 사람들과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같은 상태에 있다고 보면, 자기도 역시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향해 씨를 뿌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말을 함으로써 씨를 뿌리고 있다. 이 말들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나무가 초인이 아닐까. 사람들은 어떻게 씨를 뿌려야 할까.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말을 함으로써 씨를 뿌리게 될 것. 사람들은 어떻게 말을 하게 될까.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꾸만 말을 하고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고 말하고 또 말하고 있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을 하게 하고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씨를 뿌리고 미래를 열게 하고 초인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
Ich sage euch: ma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Ich sage
euch: ihr habt noch Chaos in euch.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인간은 하나의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그대들은 여전히 그대들의 내부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다.
‘춤추는 별’은 각자 가지고 있는 것. 자기만의 춤추는 별을 가진다는 것은 각자의 가슴에 별을 가지는 것. 그냥 ‘별’이 아니고 ‘춤추는 별’이어야 하는 이유는, ‘춤’과 ‘별’이 합해진 무엇임을 뜻하는 것. 춤과 별이 만나는 지점은 자신의 내부도 아니고 저 하늘도 아니고 자신의 내부와 저 하늘 혹은 우주 사이의 전체. 그 전체가 초인이 아닐까. 그 전체로서의 초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각자의 내부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혼돈은 곧 충만한 초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필수적인 것. 혼돈이란 무엇인가. ‘춤’과 ‘별’이 떨어져 있는 상태. 별은 별대로 춤은 춤대로 나뉘어져 있을 때에는 혼돈의 상태이므로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그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나침만이 있을 뿐. 별과 춤이 만나 ‘춤추는 별’이 될 때에 혼돈은 충만함으로 하늘을 채우고 자신의 내부를 채우고 초인으로 나아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시장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 ‘내부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다’고 언명한다. 아직 이 사람들에게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들이 초인이 될 가능성, 아니 초인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므로, 초인의 씨앗이므로 이들은 이미 초인이라는 것.
Wehe! Es kommt die Zeit, wo der Mensch keinen Stern mehr gebären wird. Wehe! Es kommt die Weit des
verächtlichsten Menschen, der sich selber nicht mehr verachten kann.
슬프다! 장차 인간이 아무런 별도 낳지 못하는 때가 오리라! 슬프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춤추는 별’은 고사하고 ‘아무런 별도 낳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은 물론 있지 않고 또 무엇이 없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 없이는 혼돈도 없고 혼돈이 없으면 춤추는 별도 낳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가장 비천한 존재로 여기는 것.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 이 진짜 경멸이 그 사람을 혼돈으로, 그리고 다시 춤추는 별을 낳게 하고 초인으로 이끌어간다. 의도적인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짜 경멸. 이 경멸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이 진짜 경멸을 그냥 <하고 있는 자>에게 초인의 씨앗을 본다. 그 사람은 이미 초인이다.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닌, 인과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 그는 <그냥> 경멸을 <하고 있다>. 이런 존재가 초인이라는 것.
Seht! Ich zeige euch den letztenMenschen.
"Was ist Liebe? Was ist Schöpfung? Was ist Sehnsucht? Was ist Stern" - so fragt der letzte Mensch und blinzelt.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련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란 무엇인가? 동경이란 무엇인가? 별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물으면서 눈을 깜박거린다.
최후의 인간이란 마지막의 인간. 이 마지막의 인간 이후에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초인이 있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가 최후의 인간의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는 것은 이 사람들이 최후의 인간을 보아야만 한다는 것. 보여주는 이유는 또한 이들로 하여금 이 최후의 인간을 보고 자기를 보라는 것.
최후의 인간이 묻는 것은 사랑, 창조, 동경, 별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현상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질문. 본질에 대해서 묻고 있으나 이들은 이렇게 물으면서 눈을 깜박거린다. 눈을 깜박거리는 것은 적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무엇을 보려고 집중하는 자세가 아니다.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 답을 구하는 것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 이 최후의 인간을 넘어서지 않으면 초인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이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고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Die Erde ist dann klein geworden, und auf ihr hüpft der letzte Mensch, der Alles klein macht. Sein Geschlecht ist unaustilgbar, wie der Erdfloh; der letzte Mensch lebt am längsten.
그때 그 땅은 작아지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뛰어다닌다. 그 종족은 벼룩과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은 가장 오래 산다.
최후의 인간은 작아진 땅 위에서 모든 것들을 작게 만들고 그 위를 벼룩처럼 뛰어다닌다. 가장 오래도록 삶을 유지한다. 근절되지 않은 상태로. 그러니까 최후의 인간은 언제까지나 작아진 땅과 세계 속에서 작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가장 오래도록 삶을 살지만 그것이 <영원>은 아니다. 시간 속에서 가장 긴 시간과 영원은 다른 것. 최후의 인간은 시간이 지속되는 한에 있어서 계속해서 삶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에는 속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이 최후의 인간은 계속해서 삶을 사는 것이지 영원을 사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장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시간 속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작게 만들어서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시간 속에 놓음으로 해서 무한히 계속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시계가 돌아가는 인간의 시간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므로 이 최후의 인간은 오래도록 삶을 유지한다, 즉 무한히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영원에 속한 것은 아니다. 최후의 인간은 초인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이미 그 속에 있지만 그 씨앗을 이 시간에 뿌리고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무한히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안일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혼돈은 모든 것을 작게 만들어서 질서 정연하게 만들지 않는다. 혼돈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 에너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작게 만들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