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함성을 듣다 (1)
윤연모
바쁘던 일상을 뒤로하고 서울을 떠나 드디어 오랫동안 꿈꾸던 모스크바의 쉐르메티예보 공항이 보이는 하늘에 떠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이 마치 신선인 양, 푸르른 하늘바다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비행기 옆에서 인형처럼 생긴 러시아 남자 넷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웠을 뿐, 오랜 세월 동안 TV와 인터넷으로만 보고 듣던 러시아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속삭여줄지 어떤 감흥을 안겨줄지 궁금하다.
러시아 하늘 아래로 붉은 지붕을 가진 집들과 높은 아파트들이 모여 있어 상당히 반가웠다. 모스크바에서 고풍스런 작은 건물만 보게 될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머릿속에 그리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구소련의 폐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면, 배급 받은 작은 규모의 똑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보며 이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 지구 마을의 일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모스크바에서 서민들이 공산주의 국가 시절에 국가로부터 아파트 한 채와 별장 한 채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일반 가옥들이 놀랍게도 별장이란다.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잠시 냉전 시대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였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동안, 한없이 이어지는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여행자를 반겨 주는 듯,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인사하였다. 위도가 높아서 그런지 침엽수림이 많이 보인다. 저 숲속에서 과거에 왕들이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오기 위해 비행기로 약 아홉 시간을 날아서 왔다. 그 동안, 최신 영화 두 편, ‘천재 소녀[Gifted]’와 ‘아름다웠던 날들[Their Finest]’을 보았는데 감동적이었다. 인상 깊어서인지 가끔 두 영화의 주인공인 꼬마 수학자와 여주인공을 길거리에서 만날 것 같았다.
‘아름다웠던 날’들은 1940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정보부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광고 문구를 쓰던 여성을 작가로 채용한다. 그녀가 영화 대본을 쓰며 여류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녀는 사랑하던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그와 헤어진다. 사랑의 아픔을 간신히 극복하고 함께 일하는 정보부 요원과 사귀게 되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며 드디어 연애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에 연인에게 무거운 장비가 떨어져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을 잃게 된다. 잔혹한 그녀의 운명에 감정이입이 되어 가슴이 아팠다. 그 내용이 영화에서 본 허구일지라도 그녀가 아픔을 극복하고 또다시 사랑을 맞이하길 기대해 보았다.
기내에서 두 끼 식사를 맛있게 먹어서 뱃속도 편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알파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그대로 방에 두고 나와서 환전을 하고 호텔 주변을 둘러보며 모스크바를 느껴보기로 하였다. 주변에는 나와 같은 여행객들이 많았다. 동양인이 혼자 산책하고 있으니 한국 여성인 듯한 두 여성이 다가와서 중국말로 중국인[쭝꿔런]이냐고 물어서 한국인[한꿔런]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젊었을 때에 대만 여행용으로 중국인에게 이십여 일 동안 배웠던 중국말을 이번에도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내게 중국인이냐고 묻는데 이곳에서도 자주 듣게 되니 재미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보다 한국인 관광객이 더 많아서 여기저기에서 한국말이 들렸는데, 이제 묻지 않고 가만히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다려본다. 여지없이 한국인처럼 생겼는데 그 입에서 중국말이 튀어나오다니 중국인의 여행 물결, 현대적인 의미에서 더 나아간 개항의 증거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1루블이 한국의 20원이다. 가게를 둘러보니 물가가 우리나라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비쌌다. 사고 싶은 헝겊인형이 약 육만 오천 원이고 꽃값도 조그만 부케 하나가 인형 값과 맞먹었다. 게다가 거리의 상점이나 이정표, 심지어 가게의 물건 가격 표시, 어느 것 할 것 없이 러시아로만 쓰여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을 배려한다고 거의 모든 것을 한국어로 표기하고 그 아래에 영어는 기본이고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함께 표기하니 정체성을 잃은 것인지 과다한 친절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러시아로만 표기하고 있다. 알파벳이 대문자와 소문자가 섞여 있거나 바로 있거나 뒤집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 글자가 멋대로 섞여 있는 것처럼 러시아도 자신의 글자처럼 거만하여 보이고 언어에 있어서 국수주의라도 표방하듯 마치 ‘러시아어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듯하다. 또한 ‘여기는 러시아 땅이니 러시아어를 쓰렴. 우리는 배려하지 않아. 너희가 알아서 쓰렴. 우리가 너희를 반기기 위해 영어나 다른 나라의 말을 쓰지는 않겠어.’라는 인상을 풍긴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를 느끼고 로마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러시아어가 러시아인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인들의 대륙의 기질 같기도 하고 그들의 국가 차원의 자신감 같다.
러시아가 오랫동안 중국과 공산국가로서의 우방국이어서 그런지, 호텔에 러시아어 밑에 중국어를 표기하여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옛날부터 그랬는지 요즈음 중국인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그런지 정확히 알 수 없어 궁금하였다. 아마 둘 다 가능한 이유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호텔에서 구시대의 진기한 유물을 발견한 듯이 반가운 글씨들의 조합을 발견하였다. 출입문에 러시아로 환영하는 말을 쓰고 한가운데에 “호텔 알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한국어로 노란색으로 크게 쓰여 있고 그 아래에 중국어가 쓰여 있다. 아마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이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새벽 네 시인데 이곳 모스크바의 백야현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벌써 날이 밝았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던 새벽녘의 풍경은 어젯밤 아홉 시 반의 거리 풍경과 비슷하다. 단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어젯밤에 이리저리 산책하다가 신나는 음악소리가 나서 군중들 틈 속에 들어가 보니 싱어 한 명,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 세 명과 드럼 한 명, 드럼 치는 흉내를 내는 어린 소년이 모여서 밴드를 구성하여 온 열정을 다 쏟아 공연한다. 옆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춤을 추던 러시아 여대생 다이애나와 함께 음악에 맞추어 몸을 살살 흔들며 그 분위기에 빠져보았다.
러시아 전통음악이나 인도 노래를 연주하였는데 뮤지션의 연주에 맞추어 청소년부터 장년까지 그 음악을 즐기며 엄청난 호응을 보였다. 한쪽에서는 같은 그룹의 멤버인 젊은 여성이 관객들 사이를 계속해서 돌며 모자에 자신들 밴드의 열정에 대한 답례를 받았다. 나도 조금 전에 환전한 러시아 돈을 기분 좋게 투척하였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할 것 없이 유럽은 길거리 음악회를 즐기는 듯하다. 큰돈이 들지 않고 예약하지 않아도 되고 찾아가지 않아도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는, 괜찮은 수준의 자유로운 콘서트는 유럽 문화의 특징이다.
연주된 러시아 음악은 우리로 치면 가요였는데 유럽의 강렬한 느낌과 아시아의 정서를 함께 품고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주로 정복한 나라이었기 때문인지 애달프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저 열광하는 군중 속에서 음악 감상을 하다가 다이애나에게 사진을 함께 찍자고 청하여 예쁜 그녀의 모습을 내 휴대전화에 담았다. 오늘 저녁의 수확은 러시아의 대중음악을 대중과 함께 느끼며 러시아의 아름다운 소리, 러시아인의 함성을 들어본 것이다.
내일을 위하여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해야겠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러시아의 젊은 아가씨와의 짧은 만남이 러시아에 대한 나의 인상을 밝게 만들어 주었고 길거리 음악회에서 러시아의 함성을 들었다. 길거리 음악회가 세계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상으로의 탈출구가 되어주어 러시아 시민은 물론, 한국에서 온 여행자도 기껍게 환영하여 주었다. 러시아 함성 속에서 바야흐로 나의 러시아 탐구가 시작되었다.
자료사진 해설
20170725-211212-모스크바의 길거리 밴드의 모습
20170725-212859- 길거리 음악회를 감상하던 러시아 여대생 다이애나와 필자
20170727-065402 중국어와 중국풍으로 장식한 호텔 출입문
20170727-075847 한국어가 쓰여 있는 호텔의 환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