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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2 [1964년] 국회. 언론윤리위원회법안 통과
← 1964년 8월 2일 국회를 통과한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를 위한 전국언론인대회 모습.
국회가 1964년 8월 2일 밤10시15분경 야당측이 거의 퇴장한 뒤에 재석 1백49명중 가 96표, 기권 53표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가결했다. 이에 언론인들은 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 8월 10일 전국언론인대회를 열고 17일에는 일간신문 등 19개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한국기자협회를 설립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서둘러 언론윤리위원회를 소집하자, 한국일보사와 서울경제신문, 코리아타임즈, 서울신문사, 대한공론사가 투쟁위원회 탈퇴 통고를 해온 데 이어 윤리위원회 마지막날인 28일에는 동아, 경향, 조선, 대구매일 등 4개 신문사를 제외한 21개 신문사가 탈퇴했으며 대한일보는 결정을 미루었다.
정부가 신문구독을 방해하고, 언론사의 각종 이득을 박탈하는 보복 조치를 취하자 이를 규탄하는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10월 8일 투쟁위원회 위원들은 언론 자율규제 강화, 법 시행의 보류, 윤리위원회 소집중지 등을 건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언론파동은 막을 내렸다.
[1921년]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사망
← 세계 성악사에 신화적인 존재인 이태리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
전설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가 1921년 8월 2일 그의 고향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48세였다.
화려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카루소는 1873년 나폴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인 카루소가 그나마 노래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곳은 나폴리 성당의 소년 성가대였다. 여기서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굴리엘모 베르기네였다. 그의 도움으로 카루소는 1894년 11월 모렐리의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할 수 있었고 1900년 마침내 스칼라 무대를 밟았다.
그는 무대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명성은 유럽전역을 열광시켰다. 결국 카루소 붐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전해져 메트는 카루소와 1902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해서 계약을 경신했다. 이 기간 동안 무려 607차례의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카루소 신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20년 12월 24일. 늑막염이 심해 더이상 노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카루소는 1902년 3월 세계최초로 음반을 녹음, 본격적인 오디오 시대를 열었다.
[1830년] 프랑스 샤를 10세 퇴위
← 샤를 10세, Francois Gerard가 그린 초상화(부분)
1830년 8월 2일 7월혁명의 여파로 프랑스의 샤를 10세가 왕위에서 물러났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샤를 10세는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정책으로 일관해 7월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샤를 10세는 극우적 성향의 폴리냐크 내각이 자유주의자·개혁주의자 등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의회를 해산하고 1830년 7월 26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국민들은 항의시위를 벌였고 7월 27~29일 3일간 왕정군과 국민군 사이에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왕정군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으며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으나 결국 중산층의 뜻대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다. 7월혁명이 끝난 뒤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국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도 끝이 났다. 7월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해방전쟁이 일어났으나 결과는 미미했다.
[1984년] 김원기, LA올림픽 레슬링종목에서 금메달 획득
1984년 오늘 미국 L.A.에서 열린 제23회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대회!
이 종목 62kg급으로 출전한 김원기 선수가 우리 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줬다. 김원기의 금메달은 이 대회의 첫 번째 쾌거로서 우리 선수단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한국은 LA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메달순위 10위라는 역대 올림픽 참가 사상 최고성적을 거뒀다.
[1990년]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침공함으로써 페르시아 만 전쟁이 유발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국경 분쟁을 겪었다. 분쟁지역 가운데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부비얀 섬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의 국경선 확정 협상에서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협상 자체를 포기하면서 무력침공을 시도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기습했으며, 8월 8일에는 쿠웨이트를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이에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8월 3일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8월 6일에는 무역금지 조치를 선포했다. 뒤이어 미국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 여러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주변국에 파병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경고했음에도 이라크 군대가 철수를 거부하자, 다국적군은 1991년 1월 16~17일 페르시아 만 전쟁을 개시해 2월 27일 쿠웨이트 시를 탈환했다. 전쟁은 이라크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쿠웨이트는 독립을 되찾았고, UN이 이라크에 가한 무역규제 조치는 종전 뒤에도 계속되었다.
[1932년] 영국의 연극·영화 배우 오툴(Peter O'Toole) 출생
1932년 8월 2일 태어남 ~ .
오툴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1962)로 유명한 영국의 연극·영화 배우이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런던에 있는 왕립연극예술원에서 공부했다. 1956년 <바버라 소령 Major Barbara>으로 런던 무대에 데뷔했다. 1960년 셰익스피어 기념극장 극단에서 샤일록 역을, 1963년 런던에 있는 국립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햄릿 역을 맡았다. 이밖에 <주노와 공작 Juno and the Paycock>(1967)·<인간과 초인간 Man and Superman>(1967)·<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1973)·<바냐 아저씨 Uncle Vanya>(1973)·<약탈 Plunder>(1973) 등의 무대에 올랐다. 영화에는 <유괴 Kidnapped>(1960)로 데뷔했다. 이후 오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T. E. 로렌스 역을 맡아 국제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데, 그는 특히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연기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밖에 <로드 짐 Lord Jim>(1964)·<겨울 사자 The Lion in Winter>(1968)·<지배계급 The Ruling Class>(1972)·<스턴트 맨 The Stunt Man>(1980)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05년] 시인 박팔양(朴八陽, 김여수) 출생
1905. 8. 2 경기 수원~1988.
사회현실에 관심을 보인 경향시와 감상적인 서정시를 썼다. 호는 여수(麗水 : 如水).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김기진·나도향·박영희 등과 사귀었고,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해서는 김화산·박제찬·정지용 등과 사귀면서 동인지〈요람〉을 펴냈다. 1924년〈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고, 1926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했다. 1928년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34년 '구인회'에 참여했으나 많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을 지내고 그곳에서 8·15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신의주에 정착하여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평안북도 당위원회 기관지 〈바른말〉신문사 편집국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49년 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정로 正路〉의 편집국장 및 그 후신인 〈노동신문〉의 편집국장·부주필 등을 지냈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신문학과(新文學科) 강좌장, 1950년 6·25전쟁 초 종군작가로 활약한 공으로 국기훈장 3급을 받았으며, 1951년 대학으로 복귀했다. 1956년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8년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으며 한때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있었다. 1966년 한동안 사상 검토 대상으로 곤욕을 치러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송가 서사시 〈눈보라 만리〉(1961) 등의 창작 기여를 인정받아 복권되었다.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신(神)의 주(酒)〉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해방 때까지 발표한 시들을 그 성격에 따라 3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민족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쓴 경향시로서, 〈여명 이전〉(개벽, 1925. 7)·〈밤차〉(조선지광, 1927. 9)가 대표적이다. 둘째,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수법을 바탕으로 쓴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서, 1928년 〈조선지광〉 8월호에 발표한 〈도시정취〉·〈태양을 등진 거리에서〉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 자연과 인생을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읊은 시로서,〈승리의 봄〉(문학, 1939. 1)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감상적인 시에 대해서 임화·신고송·권환 등은 '소부르주아적이며 회고적 낭만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밖에 노동자의 참담한 생활을 그린 콩트 〈오후 여섯시〉(조선지광, 1928. 9) 등이 있으며, 평론에도 관심을 가져 한국 시문학사를 주체적·근대적으로 바라본 〈조선신시운동개관〉(조선일보, 1928. 2. 28~3. 1)을 발표했다. 서정시 〈노래는 강산에 울려 퍼지네〉(1956)·〈밀림의 5·1절〉(1959), 장편서사시 〈눈보라 만리〉(1961)·〈인민을 노래한다〉(1962) 등을 썼으며, 시집으로 〈여수시초〉(1940)·〈박팔양시선집〉(1949)·〈박팔양선집〉(1956) 등이 있다.
[1872년] 독립운동가 이명룡(李明龍) 출생
1872. 8. 2 평북 철산~1956. 11. 12.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 호는 춘헌(春軒). 아버지는 창엽(昌葉)이다. 고향인 철산에서 정주로 이주한 뒤 상업에 종사하다가 1892년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장에 피선되었다. 그해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매점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한국인의 주권(株券) 소유를 역설했다. 1903년 정주 서면교회(西面敎會) 집사가 되었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16년 덕흥교회(德興敎會) 장로가 되어 교회 설립에 노력했다. 1919년 2월 선천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와 만나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기로 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에 민족대표로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종교·교육 등에 종사했다. 8·15해방 후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고문에 추대되었으며, 평동중학교(平東中學校)를 설립해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7년 월남한 뒤로 반공연맹 고문, 평안북도도민회 고문, 3·1정신선양회 고문, 이준선생기념사업회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20년] 영국의 물리학자 틴들(Tyndall, John) 출생
1820. 8. 2 아일랜드 칼로 릴린브리지~1893. 12. 4 잉글랜드 서리 힌드헤드.
하늘이 파란 이유를 설명했다. 1853년 런던 왕립연구소의 자연철학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M.패러데이의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초기에는 결정의 자기적 성질에 관해 연구했지만, 1859년 열을 흡수하고 복사하는 다양한 기체의 능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열을 흡수할 때 온도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틴들 효과로 알려진 큰 분자와 먼지에 의한 빛의 확산을 연구했다. 하늘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은 대기 중의 분자에 의해 태양광선이 산란되어 일어나는 현상임을 증명하는 실험도 수행했는데, 이 현상은 후에 J. W. 레일리 경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되었다. 1881년 무균(無菌) 공기에서는 음식이 부패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오랫동안 받아들여져오던 자연발생설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16권 이상의 책과 145편 이상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그중에는 〈운동 양식으로서의 열 Heat Considered As a Mode of Motion〉(1862)·〈빛에 관한 6편의 강의 Six Lectures on Light〉(1873)·〈물의 형태 Forms of Water〉(1872) 등이 있다.
[1835년] 미국 발명가 그레이(Gray, Elisha) 출생
1835. 8. 2 미국 오하이오 바니스빌~1901. 1. 21 매사추세츠 뉴턴빌.
전화기의 발명을 놓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법정투쟁을 벌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많은 전신기계를 발명했으며, 1869년 웨스턴일렉트릭회사를 차렸다. 1876년 2월 14일 벨이 전화의 발명특허를 신청하자, 그레이는 3개월 안에 똑같은 발명특허를 신청하겠다면서 특허권에 대한 일시정지를 요청했다. 벨은 전화선을 통해 인간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전달할 때 그레이가 먼저 발명했던 마이크로폰 타입의 부드러운 송화기를 사용했는데, 이는 특허신청서에 기술한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가 쓴 전자기식 금속진동판 수화기는 몇 달 전에 그레이가 만들어서 널리 쓰이던 것이었다. 그레이는 벨과 특허권을 놓고 법정투쟁을 벌였으나 패소, 결국 특허권은 벨에게 돌아갔다. 1880년 그레이는 오하이오 주 오벌린에 있는 오벌린대학의 동전기학(動電氣學) 교수가 되었다.
[1922년] 전화발명가 그레이엄 벨 사망
← 전화기를 시험하고 있는 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영어: 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 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과학자 및 발명가였다. 전화기의 발명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 역시 논쟁의 여지가 되고 있다. 안토니오 뮤치가 전화기의 진정한 발명가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이 영예를 일라이셔 그레이에게 기인하는 의견도 있다.
'전화의 아버지' 그레이엄 벨이 1922년 8월 2일 사망했다. 75세였다. 그가 사망하자 미국의 전화시스템은 1분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로 새로운 통신문화의 역사를 만들어 낸 그의 일생에 미국인들이 전화시스템을 잠시 정지시키면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벨의 전화 발명에 대한 열정은 농아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 농아자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기기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184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870년이었다. 26세에 보스턴 대학 발성생리학과 발성학 교수가 된 그는 농아자에게 '소리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얇은 막을 이용,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기기개발에 전념했다.
마침내 1876년 3월10일 인류최초로 전화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2월 22일 전화기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이후 2백km 이상 떨어진 곳과의 장거리통화에 성공한 벨은 1877년 벨전화회사를 설립, 일반인에게 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1980년] 컬러TV 국내 시판 개시
국내 처음으로 1980년 8월 2일 부터 컬러TV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컬러방송은 여러차례의 시험방송 끝에 12월 1일부터 본방송이 시작됐다.
1972년 9월 상공부가 컬러텔레비전 생산계획을 발표한 후 8년동안 준비해 오다 1980년 6월 체신부가 컬러 텔레비전 방송의 표준방식을 미국식의 NTSC 방식으로 결정함으로 국내 컬러방송이 본격화됐다.
흑백 텔레비전용 브라운관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897년이며 1932년에는 상품화되어 관측용으로 쓰였다. 1933년 키네스코프가 발명되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기초가 마련됐다. 컬러텔레비전은 1940년 미국의 베아드가 그 원리를 개발하고, 1953년 미국의 RCA사가 컬러 브라운관을 개발한 후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1960년 7월에 처음 도입돼 9월부터 컬러방송이 시작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의 컬러방송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킨 계기가 됐다.
[1882년] 미국의 영화제작자 워너(Warner, Jack Leonard) 출생
1882. 8. 2 캐나다 온타리오 런던~1978. 9. 9 미국 로스앤젤레스.
4형제, 즉 해리(1881~1958)·앨버트(1884~1967)·새뮤얼(1888~1927) 형제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형제가 함께 할리우드의 5대 영화사 가운데 하나가 된 워너브러더스영화사를 세웠다. 폴란드에서 이민온 구두수선공이자 행상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들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자신들의 영사기로 영화를 보여주고 2년간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영화관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영화배급업에 뛰어들어 1923년 워너브러더스영화사를 세웠다. 제작책임자였던 부사장 잭 워너는 영화업을 공장처럼 규율과 질서로 운영했다. 그는 직접 영화소재·제작자·감독의 선택을 관리하고 배우 및 연출가 발굴에 관여했다. 제작비를 절약하려고 한 번 사용했던 세트·의상·소품을 다시 짜맞추어 계속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실성도 추구해 지역·국가의 복식(服飾)과 관습이 정확하게 표현되도록 노력했다. 잭 워너는 1956년부터 워너브러더스영화사의 제작책임자와 사장직을 겸임했다. 1965년 스튜디오가 세븐아트사로 넘어가자 그는 워너세븐아트영화사의 사장이 되었으나, 자신의 독립된 영화제작사를 계속 보유했다. 그는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64)·〈캐밀럿 Camelot〉(1967)을 직접 제작했고 1972년 은퇴했다.
[1905년] 미국의 영화배우 로이(Loy, Myrna) 출생
← William Powell and Myrna Loy - Libeled Lady (film, 1936)
본명은 Myrna Williams.
1905. 8. 2 미국 몬태나 헬레나 근처 레이더스버그~1993. 12. 14 뉴욕 뉴욕 시.
목장주의 딸로 태어났으며 1918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처음에는 합창단의 무용수로 일하다가 1925년 〈벤허 Ben-Hur〉에서 단역을 맡았다. 이때 맡은 이국적인 정부(情婦) 역은 이후 10년간 그녀의 고정배역으로 굳어져 그뒤 점차 중요한 미국 관객들에게 이국 출신의 요부로 이미지를 굳혔다. 1934년 윌리엄 파웰의 〈그림자 없는 사나이 The Thin Man〉에서 배우의 부인 역으로 출연하면서 비로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노라 찰스 역으로 비평가와 대중의 갈채를 받았으며 뒤이어 많은 속편이 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미국 적십자사에서 일했으며 전쟁 뒤 유네스코 대표로 근무했다. 1945년 이후 영화·연극·텔레비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1960년 이후에는 주로 성격배우로 활약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The Best Years of Our Lives〉(1946)·〈블랜딩씨가 꿈에 그리던 집을 짓다 Mr. Blandings Builds His Dream House〉(1948)·〈붉은 조랑말 The Red Pony〉(1949)·〈외로운 사람들 Lonelyhearts〉(1958)·〈만우절 The April Fools〉(1969)·〈말씀만 하세요 Just Tell Me What You Want〉(1979)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884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낸 소설가 가예고스(Gallegos, Rómulo, 1884~1969.4.4) 출생
194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내기도 한 그는, 베네수엘라 야노스(평원)의 압도적인 자연현상, 지방민속, 악어 사냥과 같은 사교행사 등을 묘사한 힘찬 소설로 유명하다.
〈 도냐 바르바라 Dona Barbara〉(1929)를 발표하여 남아메리카의 대표적 소설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범죄자나 악당, 순박한 시골사람을 등쳐먹는 인간들보다도 더 잔인한 농장 여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밖에도 야노스의 음유시인을 다룬 〈수탉 Cantaclaro〉(1934)과 열대림을 배경으로 한 소설 〈카나이마 Canaima〉(1935) 역시 뛰어난 작품이다. 〈카나이마〉는 밀림에 두루 퍼져 있는 악령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이밖에도 〈비참한 흑인 Pobre negro〉(1937)·〈이방인 El forastero〉(1942)·〈같은 대지에서 Sobre la misma tierra〉(1943)·〈반역 외(外) La rebelion y otros cuentos〉(1947)·〈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La brizna de paja en el viento〉(1952) 등의 주요한 작품을 썼으며 시나리오도 여러 편 썼다.
가예고스는 1936년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8년 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48년 11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추방당했으나 1958년에 다시 돌아와 종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밖에
2001년 사회원로-시민단체 인사 32명 ‘언론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 성명서 발표
1999년 라이언킹 이승엽, 43호 홈런으로 시즌최다홈런 신기록
1997년 라이베리아 군벌지도자 찰스 테일러, 대통령에 취임
1997년 ‘비트제너레이션’의 대부 소설가 윌리엄 에스 버로즈 사망
1996년 프랑스 5공화국 초대총리 미셀 드브레 사망
1995년 서석재 총무처장관, 전직대통령중 한사람이 4,000억원 이상의 가명계좌를 갖고 있다고 파문
1993년 한국일보 회장 장강재씨 별세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 발발
1989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 서경원 밀입북 사건 등과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인돼 철야조사
1982년 중국, 홍콩과 마카오의 영유권 재확인, 평화적 재통일 선언
1981년 볼리비아 군사쿠데타, 가르시아 대통령 실각
1980년 이탈리아 볼로냐역 폭탄테러로 84명 사망
1977년 미국, 북한의 군사수역 불인정 선언
1976년 대한항공 화물기 이란 테헤란공항 불시착 폭발(5명 사망)
1974년 한국-그레나다, 국교 수립키로 발표
1974년 아시아개발은행(ADB) 발족
1964년 미군, 통킹만 폭격
1962년 동아일보 필화사건,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 라는 사설로 고재욱 주필-황산덕 논설위원 피검
1961년 89개 업체에 부정축재액 82억1천만환 통고
1945년 이탈리아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 사망
1942년 반공 지하조직 백의사 조직
1923년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하딩 사망
1919년 산둥반도, 중국에 반환
1918년 일본, 시베리아 파병 선언
1916년 영왕 이은의 비로 일본왕족 이방자 여사 결정
1907년 대한제국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침
1902년 군부와 경무청 관리에 단발령 내림
1802년 나폴레옹, 종신 통령 선포
1799년 프랑스 기구 제작자 J.E 몽골리에 사망
1788년 18세기 영국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풍경화가 게인즈버러 사망
1754년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의 기초도면을 설계한 건축가 랑팡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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