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산문 33집 원고 – 허석
新우리는 일꾼에서 일부 발췌하여 옮겼습니다.
조조의 길, 제갈량의 길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말이 있다.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때(227년), 촉나라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조조의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러자 조조는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를 내세웠고 촉나라로서는 전략요충지인 가정을 지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 때 제갈량과 문경지교를 맺은 참모 마량의 동생 마속이 자원하고 나섰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패하면 참형을 당해도 원망치 않겠다.’며 간청했다.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협로만 사수하라는 제갈량의 명령과는 달리 욕심을 내어 산 위에 진을 쳤다. 사마의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공격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식수가 끊겨 다급해진 마속은 포위망을 돌파하려다 장합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제갈량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 없이 처단하여 대의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라며 마속을 처형했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한편 조조는 동탁을 살해하려다 여포에게 발각돼 한 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진궁이라는 어느 고을 사또와 함께 도주에 나선 조조는 날이 저물어 여백사의 집에 도착하였다. 여백사는 조조의 아버지와 의형제였다.
여백사는 마침 집에 술이 떨어졌다며 나귀를 타고 술을 사러 나갔다. 그런데 술을 사러 간 사람이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방에서 둘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칼 가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냥 잡을까, 묶어서 잡을까?”
둘은 버럭 의심이 솟았다. 여백사가 고발을 하러 가고 하인들은 자신들을 죽일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한 둘은 쏜살같이 뛰쳐나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베었다.
그런데 부엌에 돼지 한 마리가 네 다리를 묶인 채 놓여 있었다. 여백사가 조조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돼지였다.
둘은 곧바로 말을 타고 현장을 벗어났다. 한참을 가지 여백사가 나귀를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조조는 안장에 술항아리를 달고 오는 여백사마저 단칼에 베어 버렸다.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을 저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조조의 생각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무고한 동지를 베어버린 조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울면서 수족을 잘라버린 제갈량.
지금 우리 조직에서는 제걀량의 리더십이 필요한지 조조의 리더십이 필요한지 돌아볼 일이다.
상생의 도를 깨우쳐야 한다.
우주 만물은 음과 양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적인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서 오행의 상생과 상극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치권 역시 여와 야가 수구와 개혁, 혹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다투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서 무지개 빛 다양한 정파의 상생과 상극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상생이요. 불화를 초래하는 것은 상극이다.
상생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법이고 상극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극복하려고만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식을 취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만 한다.
토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해 보지만, 상대방을 무시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는커녕 자기가 할 말만 생각하곤 한다.
하여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을 남에게 하지 않고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지만, 상대방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공자는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고 했던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영국의 의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건장관이 국민보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떤 의원이 “수의사 출신이 사람의 건강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떠들어대는 거요?”라고 따졌다. 그러자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의원님께선 어디가 편찮으신 것 같은데 아무 때고 찾아오십시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조직이 있는가 하면 서로 힘이 빠지게 만드는 조직도 있다. 그러니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야 상생의 조직이 될 수 있다.
간부가 대중을, 대중이 간부를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야 그 조직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처럼, 조직 내에서도 서로의 관계 설정에서부터 대화에 이르기까지 상대에게 상처 되는 언행은 없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안자지어(晏子之蓹)
겸손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못 났다’고 여기거나 이리저리 빼는 것과는 거기가 멀다.
또한 형식에 그쳐서도 안 된다.
공자에게조차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안자(晏子 안영)가 어느 날 외출을 하였다.
그가 탄 마차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경외의 눈빛으로 길을 비키거나 엎드리곤 하였다. 그러자 안자의 마차를 몰던 마부는 마치 자기가 위대해진 듯 착각하여 우쭐거렸다.
그런데 마부의 아내가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재상 안영은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마부인 자신의 남편이 우쭐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마부의 아내는 헤어지자며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였다. 결국 마부는 크게 뉘우치고 겸손해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안자가 마부에게 벼슬을 내렸다 한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안자지어’는 변변치 않은 지위를 얻거나 하찮은 성취에 만족하여 우쭐대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오늘날의 ‘완장 심리’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권위, 자신의 겉모습 모두가 가짜인데도 거들먹거리며 살아가는 인생인 셈이다.
조직의 간부가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완장 심리’이다. 나에게는 혹 그러한 ‘완장 심리’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대중성을 길러야 한다.
좋은 품성을 닦고 능력을 키운 사람에게 있어 화룡점정이 바로 대중성이다. 흔히 ‘능력은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대중성만큼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코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만이 대중성을 지닐 수 잇다.
대중성 역시 노력하면 얼마든지 체득할 수 있다. 간부가 대중성을 익히려면 당연히 동료들과 생활속에서 항상 밀착되어 있어야 한다. ‘대중성이 많다’는 것은 동료들의 감정, 불만, 요구, 습관, 고민, 말투 등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책 몇 권 읽고 얘기 좀 듣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이다. 또 설사 아주 감각 있는 사람이라 하나를 보면 열을 짐작한다 해도 그 자체가 대중성으로 몸에 배는 것은 아니다.
대중성의 기본은 동료들의 희노애락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이며 동료들 역시 그렇게 여겨 주어야만 채워진다. 따라서 항상 함께 생활하여 정이 쌓이지 않으면 이런 상호 소통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간부로 뽑힌 사람은 아무래도 평소 대중성이 있었기 때문에 뽑혔겠지만 그 전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동료들이 ‘저 사람은 간부가 된 후로 왠지 서먹하다.’고 느낀다면 그 간부는 뭔가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간부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옷 입는 것까지 철저히 대중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회사 간부가 번쩍이는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것보다는 평범한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훨씬 친밀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닐 필요는 없다. 개성을 죽여가며 굽실대는 것도 좋지 않다. 개성이 없는 사람은 증류수와도 같아 무미 건조한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대중과 떨어진 간부는 제아무리 유능해도 그 영향력을 폭넓게 미칠 수 없다.
그러나 대중성과 관련해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공장 간부인 P씨는 자신이 승진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그룹을 주목하고 그들과 어울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 그룹은 월급날이면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고, 술을 마신 후 어김없이 화투판을 벌였다. 그런데 P씨는 조직 관리를 위해 그 그룹과 어울린다고는 것이 그만 화투판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대중성을 갖는 다는 것과 영합은 다른 것이다.
대화의 도
말을 많이 할수록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말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야 사이에 대화가 없거나 남북 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미소 하나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오고간다면 다를 일이겠으나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화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의중과는 다르게 표현되거나,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나기 때문에 세상 모든 분쟁의 끄트머리 또한 말인 셈이다.
어느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동해바다에 한 어부가 있는데 아내가 맨날 생선만 먹다가 질렸다. 어부의 아내는 남편 뱃전을 넘나드는 갈매기가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부는 항상 친구처럼 대했던 갈매기를 잡는 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어느 날 어부는 야위어가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갈매기를 잡으려 했는데 그날따라 갈매기들이 어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고사는 사람의 마음이 눈빛으로나 표정으로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복날이 되어 키우던 개를 잡으려고 하면 평상시와 달리 주인을 무서워하고 뒷발로 버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치이다.
대화를 할 때 항상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좋고 거꾸로 눈을 이리 저리 돌리며 이야기하거나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감추는 것이 있거나 자신이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오래 된 이야기에 대해 구구절절이 들추어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표현 하나 하나에 집착한다면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
설령 표현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군자의 도리이며 말 꼬리를 잡고 표현 하나 하나에 트집 잡는 것은 소인배다 할 짓이다.
어떤 봉사단체에서 전임 회장과 현 회장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평소의 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잘해 보자고 시작한 토론에서의 의견 대립이었는데 결국 두 사람 다 상대의 말투나 단어 하나하나에 주목하여 함께 할 수 없다고 평행선을 그었다.
조직 내부의 갈등과 분열 역시 이처럼 사소한 말 꼬리 잡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조직의 간부는 토론이나 회의를 할 때 말 꼬리 잡기를 경계하도록 제어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흐르지 않은 물은 고이고, 고인 물은 썩는다. 생각이나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의기투합되어 있고 토론이 활발한 조직은 흐르는 물과도 같아 깨끗하고 활기가 넘칠뿐더러 갈수록 물살이 세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도 없고 간부 한두 명만 뚝딱대는 조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기를 잃고 무기력해진다. 무기력해지니 더욱 말하기가 싫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순 뒷얘기만 무성하게 된다. 뒷얘기만 오고가니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면 분열의 싹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간 서로 얼굴을 붉히고 지냈었는데 막상 만나서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더라.’하는 경우를 많은 사람이 경험했을 줄로 안다.
사실 우리는 그간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은 문화풍토 속에서 자라 왔다.
오죽하면 첫째가 ‘입 조심’이겠는가? 그래서일까? 평소에 가족 사이에도 대화가 별로 없고 동료 사이에도 별로 대화가 없다. 오직 술자리에 가면 좀 시끄러워질 뿐이다. 술이 말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별 이야기 아닌 것도 꼭 술을 빌어 말을 하고 사업도 술이 매개되어야만 잘 풀린다고 믿는다. 여하튼 대화 없는 곳에서는 꼭 오해가 생기고 갈등과 반목, 분열과 다툼이 벌어진다. <삼국지>에서도 그토록 진하게 의기투합한 관우와 장비가 오해로 인해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에게서 탈출하여 유비에게 달려오는 관우를 장비가 ‘변절자’라고 욕하며 창을 휘두른 것이다. 이들이야 금방 오해를 풀고 부둥켜안았지만 어디 세상 오해가 그렇게 ‘쉽게 풀린다.’는 보장이 있는가?
아마 찾아보면 서로 완전히 멀어진 상태에서 오해만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서도 부지기수로 나올 것이다.
간부들은 조직의 책임을 맡았고 얼굴 맞댈 기회가 많으니만큼 정기적인 모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평소에도 거침없이 얘기하고 소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조직의 구성원들도 그런 분위이게 젖어 맘 편하게 의견을 내고 불만을 털어 놓는다.
물론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말 한 마디는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럼없이 대화하되 존중하고 아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서로를 진정 ‘의기투합한 형제’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다지 까다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