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소년병’ 이범경 전 동일레나운 부회장 참전일기 잔잔한 감동
정충신 기자입력 2023. 6. 25.
구순 노병 70년 전 참전일기 대학노트 정리…국민방위병서 조국 근대화 CEO 까지
“전쟁세대 고난의 세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어…국가관 정립에 도움 됐으면”
구순의 이범경 전 동일레나운 부회장이 자신의 대학시절 노트인 참전일기를 토대로 6·25전쟁을 기록한
‘어느 소년병의 6·25참전일기’를 살펴보고 있다. 글마당&아이디얼북스 제공
‘6·25 소년병’ 출신 이범경(90) 전 동일레나운 부회장이 자신이 보관해온, 피와 땀, 눈물로 써내려간
참전일기를 토대로 전쟁의 아픔과 교훈을 기록한 ‘어느 소년병의 6·25참전일기’(글마당&아이디얼북스)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해 말 기억을 더듬어 기록한 참전일기를 토대로 6·25전쟁사를 쓴 이 전 부회장은 6·25전쟁 73주년을
앞두고 개정증보판을 냈다.
여느 장군의 화려한 6·25 참전기보다 소년병 출신 일등중사로 복무한 한 병사의 감동적이고 생생한 전쟁기록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국민방위병에서 조국 근대화의 CEO가 되기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고단했던 대한민국 아픈 역사이자 교훈이다.
이 전 부회장은 6·25 당시 제2국민병으로 소집돼 42개월간 군(軍) 복무를 하고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복무 중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일방직에 들어가 동일방직 상무를
거쳐 한일합작기업인 한국다반 사장, 동일레나운 사장·부회장 등을 지냈다.
이범경 전 동일레나온 부회장이 피와 땀, 눈물로 써내려간 참전일기 ‘어느 소년병의 6·25참전일기’ 개정증보판.
글마당&아이디얼북스
책은 이범경 전 부회장이 대학 입학 직후인 1955년 초에 자신의 군 생활 경험을 기록했던 노트가 바탕이 됐다.
거의 50년 만에 대학 노트를 발견한 이 전 부회장은 여기에 기업인 시절의 회고담을 더해 이 책을 펴내게 됐다.
노병은 "전쟁세대가 겪은 고난의 세월을 젊은이들에게 전해줘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70년 전의 일기를 책으로 엮었다"고 말했다.
고2 때 국민 방위군으로 소집돼 3년 6개월 간 복무한 이 전 부회장은 아흔이 다돼 70년 전 대학노트 메모를 엮어 출간했다. 다음은 노병의 참전일기 일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하기 직전, 1950년 12월 18일, 각양각색의 방위병 1700여명이 청량리를 출발,
13일간 도보행군으로 대구 육군 제1훈련소에 입소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 하루 평균 30Km 이상,
백리길의 강행군이었다. 대구 동촌, 어느 잠사공장에 위치한 훈련소의 신병훈련은 준비가 부족했다.
전선에선 전투가 한창일 때 겨우 실탄사격 8발로 훈련이 끝이었다. 이때사 모처럼 목욕으로 한꺼번에 30명씩
입욕해 조교가 하나에서 50까지 구령하는 ‘50초 목욕’이었다.
욕탕물은 이미 땟국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목욕이 끝난 후 ‘018’번 군번을 받고 이등병 계급 받아 대한민국 육군병사가 됐다. 전선으로 떠나기 직전 보충대대 좁은 실내공간에서 빽빽하게 앉은 채 밤을 세우고 아침에 트럭이 와서 전선으로 실어날랐다. 이범경 이등병이 소속된 중대는 서울, 경기지역 중·고교 학력자로 구성돼 맨 마지막에 거창을 거쳐 남원에 도착, 육군 11사단에 배치됐다. 지리산 공비토벌 부대라 전방 전선보다는 안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실제론 도로 곳곳에 공비가 파놓은 함정 때문에 트럭이 멈추는 순간 집중사격으로 사상자가 많았다. 또한 토벌부대 작전마다 번번히 허탕질이었다. 곧이어 공비들의 역습피해가 잦았다. 알고 보니 입산공비의 어미가 미리 내통해 토벌군의 출동을 교묘히 신호했던 것이다.
이 전 부회장은 고교학력으로 사단사령부 소속 인사과 병력계에 배치됐다. 사단 예하 3개 연대,
16개 직할부대 1만3000여 병력 현황을 당일 24시까지 1일 보고하는 임무였다. 매일 전사상자가 속출했다.
중대, 대대단위 피습으로 통신두절도 많았다. 이때 육군본부의 불호령은 무서웠다. 영문으로 병력 현황을 작성,
미군 고문단에게도 제출해야 했다. 곧 매일같이 ‘병력계 전투’로 밤을 새웠다.
이 전 부회장은 나중에 사단장으로부터 병력보고 유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나고 창설된 11사단(화랑부대)이 전선의 8사단과 임무교대로 주문진을 거쳐 고성군 간성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부터 설악산, 향로봉 등 산악전투로 ‘육군의 해병대’로 불렸다. 반면에 이범경의 훈련동기인 ‘018군번’은 벌써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육군본부 근무 한참 뒤에 부산에 있는 경남지구병사구사령부 파견으로 장교모집 업무를 맡다가 정전협정 후인 1954년 6월, 42개월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병역의무를 마친 홀가분한 기분으로 배재고 복학,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 졸업했다. 취직문이 바늘구멍일 때 동일방직 제1기 공채에 응시, 합격해 1978년 상무이사로 승진했다. 1981년에는 한일합작 동일레나운 사장으로 영전 15년, 1996년에는 한국 라반 사장으로 4년을 근속했으니 조국 근대화기의 CEO로 산업보국에 헌신한 것이다.
이 전 부회장은 머리말에서 "나는 전투에 참여해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거나 대단한 정치를 통해 기업을 만들어 국가에 이바지한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참전 일등중사로서 수기를 쓰게 된 까닭은 6·25전쟁이 난 해인 1950년 제2국민병으로 입대해 42개월이란 기나긴 군 복무를 무사히 끝내고, 제대 후에는 경제학을 전공해 40여년간 우리나라 경제의 발전을 위해 전쟁과 산업의 최일선에서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기 위함이다"라고 썼다.
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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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감동입니다. 고 2, 그 어린 나이에 구국의 일념으로 참전하고, 참전 일기까지 쓰시다니...
고 2때 국민방위군 입대해 장장 42개월 복무,
50초 목욕, 빨치산 토벌 등 대한민국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