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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성배는 없다
기독교에 대한 자료, 특히 예수에 대한 필자의 비평적 연구자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주장도 하나의 견해 일뿐이다.
다빈치코드에서도 그럴듯 하게 자료를 엮어서 주님을 모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진리는 영원한 법이다."
필자의 '안티 바이블'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추리소설과 비슷한 부류로 언급하는것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필자가 엮은 자료는 현대신학이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비평적 자료에
근거한다. 다만 필자와 같이 이런 자료들을 집대성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 구세주의 도래, 이원론등의 교리등이 기독교의 탄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비평적 성향의 신학자나 비교 종교학자, 역사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하
고 있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 이미 유대교 영지주의 집단이 등장했다는 것
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주요 절기(크리스마스,부활절,고난주간)들이 모두 이교도
의 종교행사에서 비롯되었다는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런 흐름에 따라 '안티바이블'이라는 비평적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최근, 전세계의 출판계를 강타하며 색다른 주장을 하는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등장했다.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은 프랑크 왕국으로
건너가 메로빙 왕조를 세웠다. 예수의 후손들은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었고,
그 비밀조직은 현재까지 이어져 전세계를 뒤흔들 만한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황당무계한 음모론에 사람들이 깊이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수 없다.
사실 다빈치 코드의 원조는 그 보다 훨씬전에 출판된 '성혈과 성배'라는 책이다.
1982년 '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라는 이름으로 출판 된 이 책은 당시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성혈과 성배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질 즈음, 1996년에 리처드 앤드류와 폴 셀렌버거라는 작가가
'신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똑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03년에 '성혈과 성배'의 주장을 소설형식으로
재구성한 '다빈치 코드'가 등장해서 전세계 출판계와 종교계를 강타하게 된다.
이들은 '안티바이블' 본문에서 필자가 언급한 복음서간의 모순점, 복음서속에서의 예수행적,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성향등을 비슷하게 언급 하면서도, 그들이 발견 했다는 시온 수도회
의 비밀문서를 덧붙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시켜 나간다.
필자는 이들 서적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그런 주장에 있는 문제점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 성배 미스테리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어느 신부의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다가 접하게 되는 거대한 음모!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보다도 더욱 짜릿한 음모론, 그리고 음모 뒤에 숨은 비밀조직!
이제 필자는 전세계인을 짜릿한 음모론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성혈과 성배'와 '다빈치코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번글에서는 우선 그들 작가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그런 주장의 잘못된 점을 짚어 보고자 한다.
(1) 소니에르 신부의 미스테리
1885년 남부 프랑스의 산악지대인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에 있는 '레네 르 샤토'(Rennes
-le-Chateau)라는 작은 마을에 '베랑제 소니에르'라는 주임사제가 부임해 갔다.
소니에르 신부는 원래 레네 르 샤토의 바로 옆 동네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신부가 된 후에
레네르 샤토로 부임해 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던 사람이다.
샤토 마을은 인구가 약 2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1885년 그가 부임하였을 때에는
재정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1891년이 지나서 부터 소니에르 신부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벼락부자가 된 소니에르 신부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다.
소문으로는 중세시대 국제 은행과 재벌정치를 행했다는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이 십자군 원정때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서 숨겨놓은 보물을 소니에르가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다른 소문에 의하면 소니에르가 '비시고트'(Visigoth)의 황금을 발견 했다고도 하며,
또는 소니에르가 연금술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소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1967년에 '제라르 드 세드'(Gerard de Sede)라는 작가가 소니에르 신부의 미스테리를 다룬
'레네의 황금'(L'Or de Rennes)을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저주받은 보물'(Le Tresor
maudit)이라는 염가판(문고판)으로 발매 되기도 했다.
그 책의 내용에 따르면, 새로 부임해간 소니에르 주임사제는 1059년에 건축된 '막달라 마리아
교회'(Church of Mary Magdalene)라는 아주 낡은 성당을 새 단장 하여 말끔하게 고쳤다.
그때 소니에르는 성당 보수 공사중 기둥에서 암호문들이 기록된 양피지 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제라르 드 세드'는 소니에르가 발견했다는 양피지의 내용을 그의 책에 옮겨 놓았다.
양피지에 적힌 암호는 대부분 해독이 불가능 했지만 중세시대 이단으로 사라져버린 카타리파
와 관련이 있는 것으려 여겨진다. 발견한 양피지를 주교에게 보여주자, 주교는 즉시 소니에르
를 파리로 보냈다. 소니에르는 3일간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의 비에유 대수도원장과 그의 조카를 만나
암호문을 해석하게 되고, 파리의 유명인사 들을 만남과 동시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양치기'를 비롯한 3점의 그림 모사품을 구입한다.
그때부터 소니에르 신부는 백만장자 이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입했고
교회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무슨 자료든 구했다. 그는 성당뿐 아니라 막대한 돈을 들여 마치
성처럼 생긴 막달라 추모 건물도 지었으며 마을에 도로와 수도시설을 확장했다.
소니에르는 묘한 그림과 조각상으로 성당을 장식하기 시작했으며, 마을을 돌아 다니며 돌을
모으기도 하고 유명 인사들의 초청을 받으며 돈과 명예를 한순간에 손에 움켜쥔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의아한 점은 자신의 수입을 초월한 엄청난 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뒤에 교구장이 죽고 새로 부임한 교구의 주교가 소니에르 신부의 알 수 없는 수입에 철퇴
를 가하기 위해 비밀의 내용과 금전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자 소니에르 신부는
완강히 거부했으며 그 결과 다른 곳으로 가라는 전임명령을 받게 되었으나, 소니에르는 이것
도 거절했다. 놀라운 것은 소니에르가 교황청에 이야기하여 교황이 직접 그 자리에 유임시키
도록 주교에게 명령을 내리는 영향력까지 과시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하여 교황까지 마음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일 수 있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소니에르 신부는 1917년 65세 때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 그가 심장마비 걸리기 며칠 전
아직 건강한 상태일때 가정부 마리가 미리 관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기전 종부성사를 드리기
위해 옆 동네의 신부가 와서 소니에르가 누워있는 침실에 들어갔다. 그 방에는 소니에르 신부와 종부성사를
드리려는 신부 두 사람만 있었는데, 잠시 후 방에서 나온 그 신부는 몹시 무서운 일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 나왔다고 한다.
소니에르 신부는 종부성사도 하지 않고 죽었으며, 종부성사를 드리러 임종전에 찾아왔던 이웃마을의
신부는 그날부터 한동안 우울한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소니에르 신부의 장례식도 이상하게 치뤄졌다. 다음날 소니에르의 시신에는 호화로운 장식이
많이 달린 긴 옷을 입혀졌고, 주홍색의 너슬너슬한 술로 잔뜩 감아 놓고 의자에 앉혀 막달라
추모탑 꼭대기 베란다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문상 온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시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지나면서 달려 있는
너슬너슬한 술을 하나씩 뽑아가는 매우 이상한 행동을 보인 장례식을 치뤘다.
소니에르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18살 때부터 32년간 그를 보살펴 준 '마리 데나노드'(Marie D
enarnaud)라는 가정부 하나뿐이었다.
소니에르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마리는 소니에르가 경치 좋은 장소에 지은 베다니아라는
호화 별장으로 이사가서 혼자 살게 되었다. 소니에르가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마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대단히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1946년 드골 정부가 화폐개혁을 하면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는 돈은 교환해주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가정부는 구화폐를 전부 불태우고 침묵을 지켰다.
이때부터 가정부는 7년 동안 아주 검소하게 살았으며, 생활비가 모자라 그 집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사는 조건으로 '노엘 코르뷔'(Noel Corbu)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러면서 '노엘 코르뷔'에게
자기가 죽기 전에 어떤 비밀을 가르쳐 줄 것이며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엄청난 부자가 될 뿐 아니라
대단한 권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리도 소니에르와 마찬가지로 그 비밀을
말할 기회도 없이 1953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어 버리고 말았다.
BBC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던 '헨리 링컨'은 소니에르 신부의 미스테리를 다룬
'제라르 드 세드'(Gerard de Sede)의 '저주받은 보물'(Le Tresor maudit)이라는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갔다.
그는 '제라르 드 세드'를 인터뷰 했다. "당신은 어떻게 소니에르의 양피지를 손에 넣었느냐?",
"책에 담긴 자료는 출처가 어디인가?" 라는 그의 질문에 '제라르 드 세드'는 말을 빙빙 돌려서
얼버무릴 뿐 이었다. 그러나 '헨리 링컨'의 집요한 접촉끝에 '제라르 드 세드'에게 자료를 제공
한 사람이 '피에르 플랑타르'(Pierre Plantard)임을 알게 되었다.
'헨리 링컨'은 BBC 방송국의 프로듀서 자격으로 '플랑타르'를 인터뷰 하게 된다. 플랑타르는
드골 대통령의 복귀를 도왔다고 하며 정치의 막후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헨리 링컨의 조사결과 그자는 천년동안 운영 되었던 비밀조직 '시온 수도회'의 단장 이었다.
헨리링컨은 BBC의 역사 고고학 시리즈인 '연대기'(Chronicle)의 제작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1972년에 '잃어버린 예루살렘 선물'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으며,
1974년에는 '목사와 화가와 악마'가, 1979년에는 '템플 기사단의 그림자'가 방영되었다.
이런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던 중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않았다" 라는 의문의 투고가 들어
오게 되면서 헨리 링컨은 미첼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라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연구를 하게된
다. 조사가 진행되던중 그들은 '전세계를 뒤흔들 만한'(=황당무계한) 음모를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성혈과 성배'라는 책으로 출간 되었다.
(2) 카타리파의 미스테리
'레네 르 샤토'(Rennes-le-Chateau)는 프랑스 남부의 카르카손에서 25마일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 위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다고베르트 2세가 679년 12월 23일에 암살 당한 후 그의 아들인 시지스베르트
4세는 레네 르 샤토로 몸을 피했다. 시지스베르트 4세의 어머니인 지젤드 라제가 '레네 르 샤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레네 르 샤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인상적인 모습의 브쥐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템플
기사단의 활동 중심지였던 폐허가 있다.
레네 르 샤토에서 동쪽으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는 폐허로 남은 블랑슈포르 가문의 성과 베르트랑
드블랑슈포르의 집이 있다.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템플 기사단의 4 번째 수장이었다.
또한 '레네 르 샤토'는 중세시대 바티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대신 '카타리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청정무구(淸淨無垢)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카타리파는 11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小宗派)로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는 등, 12세기 말까지 11주교구(主敎區)가 개설되었다.
카타리파는 영지주의의 주요교리인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이원론(二元論)을 신봉하고 육식,
재산의 사유화 등을 부정했던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로마 교회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여러 차례 개종토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알비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도 면죄해
준다"는 살인허가를 내리고 이들을 토벌했다.
알비 십자군이 저지른 대학살은 처참한 것이었다. 그 예로 베지야라는 마을에선 최소 1만5000여명의
남, 여, 아이, 노인 할것없이 알비 십자군에 의해서 학살 당했다고 하며 이들중 상당수는 교회에서 처형
당했다고 한다. 알비 십자군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40년동안 판을 쳤으며 이들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은
그 잔혹성으로 인해 후세에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그 결과 카타리파는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최후까지 남은 카타리파의 저항군은 산꼭대기의 성에 고립되자 휴전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들은 휴전의 조건으로 "한명이라도 탈출하면 볼모를 죽여도 된다"는 약속과 함께 카타리파의 동지들
수십명을 볼모로 내주었다. 하지만 약속을 깨뜨리고 카타리파의 신도 3~4명이 성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탈출 했다고 한다. 따라서 볼모로 내주었던 수십명의 동지들은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동지들의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밖으로 빼돌려야 할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남자 3~4명이 지니고
탈출할수 있는 물건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재물은 아닐것이고 종교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던 그 무엇일 가능성이 크다.
(3) 템플 기사단
템플 기사단(knight templar)은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던 무렵에 등장했다는 종교적인 군사조직이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고 성지를 아랍인들에게 다시 빼앗겼던 무렵, 1127년에 샹파뉴 백작과 위그
드 파앵에 의해 재창립 되었다. 위그 드 파앵은 이 조직의 수장으로 선출 되었다.
템플 기사단의 규약에 따르면 기사단에 가입하기 위해서 전재산을 헌납해야 했으며, 당시 수많은 귀족의
자제들이 템플 기사단에 가입하기를 희망했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후원금도 상당했다. 이후, 템플 기사단은
이렇게 해서 끌어모은 돈을 바탕으로 금융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국제금융가로 성장한 템플 기사단은 왕실에게 자금 대출을 해주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조직은 1세기 동안 유럽에서 강력한 정치적 집단의 하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1139년에 교황 칙서를 통해 템플 기사단을 군사적 종교단체로 선포한다.
오직 교황에게만 충성하도록 조직된 템플 기사단은 왕과 영주에게는 어떤 의무도 질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템플 기사단은 유럽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처럼 강대했던 템플 기사단은 프랑스왕 필립4세에 의해 조직이 괴멸 되게 된다. 교황을 두 명이나
죽이고 자신이 추대한 주교를 교황으로 세운 필립4세가 꼭두각시인 교황과 손을 잡고
프랑스에서 템플 기사단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스타 웹스터(Nesta Webster)라는 학자의 '비밀사회와 전복운동'(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 1924)에따르면 프랑스 왕 필립 4세에 의해 1307년 10월 13일 체포 된 템플 기사단의 회원들은
동성연애 문제로 기소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자백은 혹독한 고문으로 얻어진 것이라 추측되기도 하지만, 2년 뒤 교황 끌르망(클레멘트) 5세가
고문 없이 조사했더니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단장(그랜드 마스터) '쟈끄드 몰라이'와 지부 책임자들은
3명의 추기경과 4명의 공증인이 배석한 가운데 고문 없이 조사를 받았는데, 그들의 입단식에서는
"예수는 거짓 선지자다. 신(神)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섬겨야 할 대상이다."라고 맹세케 했다고 실토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고, 동성연애를 벌인 사실을 시인했다가 뒤에 다시 취소했다. 이렇게 해서 템플기사단은
그 조직이 붕괴 되었다.
(4)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
1950년대부터 '시온 수도회'(Prieure de Sion)는 이상한 집단이 아리송하고 흥미로운 정보들을 파리
국립도서관에 남겨놓기 시작했다. 1975년 배전트, 레이, 링컨은 '성혈과 성배'(Holy Blood, Holy Grail)에서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에 대해 쓰고 있을때 파리 도서관에서 시온 수도회의 존재를 알리는 '비밀문서'
(Les Dossiers Secrets)로 알려진 양피지들을 발견했다. 그 문서에는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유명인이 시온수도회의 회원으로 명시되어 있다.
두번 째로 발견한 '붉은 뱀'(Le Serpent Rouge)이라는 문서에는 메로빙 왕조의 가계도와 생쉴피스 성당의
지하 설계도, 그리고 12궁도와 관련된 13개의 시가 있었다. (전갈자리와 궁수자리 사이에 있는 13번째
궁인 뱀주인 자리가 포함된다.)
기이하게도 이 문서들은 이미 사망한 4명의 사람들에 의해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었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한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를 발견하게 되면서 '성혈과 성배'팀의
연구는 급물살을 타게된다. 비밀문서에 의하면 시온 수도회는 궁극적으로 신비학이나 프리메이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 조직은 이집트의 현자인 오르무스가 AD 46년에 설립한 '시온 기사단'(혹은 시온 교단이라고도 함)이라는
단체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이 당시 시온 수도회는 스스로를 '장미십자단'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
시온 수도회가 처음에는 장미십자회원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1188년에 이 단체는
시온 수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기록을 보면 시온 수도회의 본부는 '시온 산의 노트르담 대수도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시온 산의 노트르담 대수도원은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다. 시온 산의 노르트담 대수도원은 비잔틴 바실리카
폐허 위헤 세워졌으며 요새를 잘 구축해놓았다.
또한 비밀 문서에서는 시온 수도회가 템플 기사단과 관련이 깊다고 언급하고 있다. 시온 수도회의
전사 집단이 템플 기사단이며, 이들은 십자군 원정때 예루살렘의 헤롯 신전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 후손에 관한 보물을 발견했으며, 템플 기사단 4대 단장인 베트랑전드 블랑슈포르가 게르만 공병 분견대를
이용하여 비밀리에 레네 르 샤토 마을에 보물을 숨겼다고 한다.
십자군 원정때 창립된 템플 기사단의 초창기 회원중 일부는 카타리파였다. 비밀문서에 의하면
템플 기사단은 솔로몬 신전이 있었던 성지를 발굴하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발굴한 것이
무엇인지는 의문이다. 이들 카발리스트 템플 기사단의 첫 번째 지도자는 후일 1099년, 첫 번째 예루살렘
십자군 왕이 된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Codei Froi de Bouillar)였다고 한다.
시온 수도회의 문서에 따르면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는 프랑크 메로빙거 왕조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다니면서 전쟁을 선동했으며,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팔았다. 그의 주변인들은 성지를 회복하면 그가 예루살렘의 왕이 될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왕'이란 칭호를 거절하고 '성소의 수호자'란 칭호를 받아들인뒤,
템플 기사단을 창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성혈과 성배'의 저자들은 칼라브리아의 수도승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오르발 대수도원에서
사라졌다는 점으로 보아, 이들 수도승들이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와 함게 예루살렘까지 간
비군사적 고문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은 바로 이 수도승들이 예루살렘의 왕을
선출했다고 본다.
템플 기사단과 시온 수도회는 '느릅나무 벌채'사건으로 서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이 입수한 시온 수도회의 비밀 문서에 따르면, 시온 수도회 단장들중에
유명인(위고, 드뷔시, 뉴튼, 레오나르도 다빈치)들은 모두 어떻게 든간에 서로 인간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은 어떤 로렌느 집안의 출신과 관련 있다고 한다.
로렌느 집안은 몇 번이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었던 집안이다.
시온 수도회 규약안에는 "회원자격은 가족에게 승계가 가능하고, 탈퇴한 회원은 다시는 재입단과
주변인에게로의 권리 위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성혈과 성배의 저자는 유명인들은 잠시 단장을
맡고, 그 이외에는 어떤 가문이 단장을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를 위기로 몰았던 비밀조직
'성체회'라는 비밀조직은 조직체계가 시온 수도회와 유사성을 띄고 있다고 한다.
(5) 메로빙 왕조
프랑크 왕국을 다스렸던 메로빙 왕조는 제정일치적인 정치제도를 가졌으며 왕은 군림했으나
통치하지 않고 각지의 영주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상당지역에서는 아리우스파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가 강대한 세력을 지녔고,
로마 카톨릭은 정통성으로도 동방정교회에 따르지 못했다. 이 무렵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왕
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카톨릭은 메로빙 왕조를 영구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카톨릭은 메로빙 왕조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넓히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메로빙 왕조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으며 실정에 참여한 대신들의 세력이 강대해 졌다.
679년 12월 23일, 메로빙 왕조의 두 수도 중 하나였던 스테네이에서 사냥을 나선 다고베르트
2세가 나무 밑에서 잠을 자다가 눈을 찔려 암살 되었다. 다고베르트 궁정 행정관인 난쟁이
페팽(소 페팽이라고도 한다)의 명령에 따라 다고베르트 2세의 대자(代子)가 다고베르트 2세를
암살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암살이후 메로빙 왕조는 허수아비 왕들에 의해 잠시 통치 되다가, 왕좌는 카롤링 왕조로
넘어 가게 되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은 클로비스와 체결한 조약을 깨버리고 다른 집안을 왕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카톨릭은 속죄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이 특별한 이유없이 암살당한 '다고베르트 2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메로빙 왕조의 후손들은 여전히 세력을 나타냈으며, 메로빙 왕조의 후예들에 의한 반란도 일어나게
된다. 742년 남부 프랑스에 카롤링 왕조에 의해 승인된 독립 자치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그 국가는 9세기
말까지 존재 했다고 한다.
스테네이의 오르발 대수도원 '사타니쿰'(Satanicum)은 북부 프랑스의 아르텐에 위치해 있으며 1070년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출신의 수도사들이 설립했다. 이 수도사 단체는 메로빙거의 우르수스 왕자가
이끌고 있었는데 우르수스 왕자는 다고베르트 2세의 증손자인 시지스베르트 6세라는 소문이 있다.
수도사들은 시온 기사단의 토대를 세웠으며 1099년에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의 기사단과 함께
흡수 되었다.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십자군 원정때 예루살렘을 탈환한 로렌느 공작인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Codei Froi de Bouillar)는 메로빙 가문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시온 수도회의 목적은 언제나
다고베르트 2세가 암살된 이후 상속권을 잃은 메로빙거 왕조와 혈통을 유럽왕조에 부활시키는 일인 것
같다. 결국 메로빙 왕족은 다양한 정치 협약과 혼인을 통해 여러 귀족과 왕가를 포섭한 듯하다.
블랑슈포르, 기소르, 생클레르, 몽테스키외, 몽페자, 포에르, 뤼이지냥, 플랑타르, 합스부르크 로렌 가문이
여기에 속한다.
시온 수도회의 몇 가지 자료에 따르면 메로빙 왕조의 혈통은 구약성경과 고대 트로이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한다.
야곱이 사랑했던 막내 아들 베냐민을 족장으로 삼았던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는 지금의 예루살렘
주변 지역이 포함 되었으며 나중에 예루살렘은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도시가 된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다른
종족들은 자신의 딸을 베냐민 지파의 남자와 혼인시키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베냐민 지파가
이교도의 베라이얼 신(루시퍼와 함께 천국에서 추방당한 악마 중의 하나)의 숭배자들을 지원
했기 때문이었다. 베라이얼 신은 금송아지와 비슷한 황소나 송아지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베냐민 지파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 혈통을 이어가다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인 사울왕을
배출한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갔으며 상당수가 망명길에 나선 듯 하다.
시온 수도회의 자료에 따르면 베냐민 지파는 그리스의 중심 지역인 아르카디아를 손에 넣으려고 했으며,
독일지방까지 진출하여 튜튼족(게르만 민족의 하나, 지금은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민족)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마침내 베냐민 지파는 시캄브리안 프랑크족이 되었다. 훗날 나타나는 메로빙 왕조는
시캄브리안 프랑크족의 자손이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곰을 숭배했는데, 메로빙 왕들도
머리카락이 신체적인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겨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랑스의 연안지방은 물론, 카르카손느, 툴르즈등지의 내륙지방의 페니키아 정착촌에서
셈문명 계통의 유물이 상당수 발견된다고 한다. BC 106~48년사이 로마와 유럽의 라인강변의
콜론느 지방에도 유대인 정착촌이 생겨났다. 그리고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유대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어, 남부 프랑스의 특정도시들(아를르,뤼넬,나르본 등등)에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프랑스 지방에는 셈어 지명이 상당히 산재해 있으며, 이러한 지명은
메로빙 영토의 한가운데에 정통해 있다.
성혈과 성배의 저자는 이런 내용을 토대로 메로빙 왕조가 유대인 계열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6) 다윗왕가의 씨(성배)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성배는 예수의 손이 직접 닿았던 것인 만큼 기독교 세계에선
매우 신성한 유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유럽 전설에는 요셉이 예수의 피를 잔에 담아 배를 타고 서유럽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또 고대 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 근처의 해안 마을로 '잔'(Sangraal),
즉 흔히 말하는 성배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잔을 뜻하는 'Sangraal'이라는 프로방스 단어에서 'g'를 중심으로 둘로 나누면 'sang raal'이 되는데,
이는 고대 프랑스어로 '왕의 혈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가 가져왔다는 것은 잔이 아니라
왕족일 수도 있다고 작가들은 가정 한다.
작가들의 분석결과 상당수의 성배전설은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Codei Froi de Bouillar)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취임한 후에 등장 했으며 파르찌발의 성배 이야기는 성배자체 보다 어느 가문의 족보(성배가문)를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따라서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성배에 관한 전설은 사실상 왕족의
피에 대한 전설이며, 성배가 예수의 피를 담은 잔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왕족의 혈통을 품은 여자의 자궁,
즉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다.
안티바이블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 또는 베다니의 마리아와 예수의 막역한 관계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필자는 '성모 마리아'-'막달라 마리아'-'베다니의 마리아'가 신화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성혈과 성배의 저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나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가 복음서 곳곳에 "나는 이세상에 평화가 아닌 검을 주려고 왔다"라고 말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검을 소유하라고 명령한 구절을 들어, 저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씌여졌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는 단순히 조롱적인 것이 아닐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안티바이블 본문에서도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은 굳이 빌라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산헤드린의
장로회의에 의해 돌로 쳐죽일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치법으로 처형시킬수 있었던
예수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았다는 점은 예수가 유대인의 정치적인 지도자였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1886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의 자료에 의하면, 예수의 시체가
안치된 무덤은 요셉의 정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과 빌라도 총독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로 묘사되고 있다. 여러 복음서에는 예수의 처형장소는 아리마데 요셉의 개인소유지에서 집행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대개의 경우 십자가 형은 수많은 군중에게 공개 되는데
반해, 예수의 처형은 소수에게만 공개되고 나머지는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또한,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은 며칠동안 생존 하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는 갈증을 해소시키는
신 포도주를 먹고 금새 죽음을 맞이 했다. 빌라도는 예수가 이례적으로 빨리 죽었다는 이야기
를 듣고 놀라는데, 아리마데 요셉이 그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시체의 반출은 금기시 되었고 까마귀밥으로 그냥 놔두는 것이 당시에는 일반적인 일이었
는데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이 바실리데스의 외경과, 예수에 대해 기록한 코란의 구절에는 예수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는 구레네(키레네)의 시몬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혈과 성배'는 이러한 음모이론을 계속 확대시켜 나간다. 또 다른 가설에 따르면 예수 대신
풀려났던 바라바는 사실 예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예수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자손을 퍼트렸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후손이 프랑스 메로빙 왕조에 동화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비밀문서에 따르면 중세시대
남부 프랑스에 등장했던 셉티마니아 공국은 카롤링 왕조와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의해 모두 '다윗왕가의
씨'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메로빙 왕족에 의해 다스려지는 유럽 한복판에 있는 작은 자치국가를 유럽과
아랍국가에서 '다윗왕가의 씨'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서 그들의 혈통을 증명할수 있는
무엇인가를(성배로 표현되는)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메로빙 왕조의 후손인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Codei Froi de Bouillar)가 십자군 원정으로
성지를 탈환 하자, 그가 유럽의 어느 왕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시온 수도회 휘하의 템플 기사단은 솔로몬의 마굿간이라고 불리는 성전지하를 발굴하여, 그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성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영지주의 종
파였던 카타리파는 그러한 숨겨진 진실을 신봉하다가 로마 카톨릭에 의해 토벌 되었다는 것이다.
성혈과 성배의 저자는 화가 푸생의 '나는 아르카디아에 있다'(Et in Arcadia Ego)와 같은 아르카디아
연작 시리즈에 예수의 무덤이 프랑스 남부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다빈치 코드의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들이 예수의 결혼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시온 수도회는 템플 기사단 같은 여러 비밀조직들을 창설하여 천년동안 모종의 음모
를 꾸미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시온 수도회는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으나 성지를 빼앗기고, 수
천년간 그 명맥을 이어오면서 유럽의 정치 막후에서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성혈과 성배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다음의 글에서 그들 주장의 문제점
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글을 반드시 필독하기 바란다.
● 성배의 계승자는 없다!
앞서서 언급한 성배에 얽힌 미스테리에 대한 내용을 이제부터 반박해 보도록 하겠다.
'성혈과 성배'류의 작품에는 일부분 진실이 담겨있다. 일부분의 내용이 진실임을 알게될 때
사람들은 작가들의 주장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것 같다.
문제는 진실과 거짓, 그리고 무리한 억측이 눈치 챌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뒤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거짓의 중심에 플랑타르라는 망상가가 있었다!
(1) 사기꾼 플랑타르
사실상 소니에르 신부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만들어진 측면이 적지 않다. 소니에르 신부는 불법적인 미사를
통해 수입을 올렸으며 그의 재산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소니에르 신부가 양피지 암호문이나
보물을 발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소니에르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으며, 그가 죽은 후 한 음식점 주인이 관광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보물과 성유물'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 작가 '제라르 드 세드'의 책을 기초로 삼고 있는 '성혈과 성배'에서는 교황청이 소니에르 신부를
보호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은 두번에 걸쳐 교황청 문서를 뒤졌으나
소니에르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저자들은 교황청 문서에서 소니에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고의적인 누락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며 주석을 달아 놓았다.
[성혈과 성배/ 자음과모음 / 이정임 외,역 / P.59]
소니에르 신부에 대한 떠돌아 다니는 소문에 성배와 메로빙 왕조를 끼워넣은 인물의 장본인은
'플랑타르'라는 사람이다. '플랑타르'(Pierre Plantard: 1920~2000)라는 프랑스인은 당시 아네마세에 있는
샤노빈 현장에서 도안공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1950년대에 배임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6개월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 바 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장 뤽 쇼멜'(Jean-Luc Chaumeil)은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을 조사하고 1979년과
1994년의 두번에 걸쳐 책을 출판 했으며, 1996년에 BBC 방송에 출연하여 그의 사기행각을 폭로했다.
'장 뤽 쇼멜'이 폭로하는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은 다음과 같다. [장 뤽 쇼멜이 1979년에 내놓은 Le Trésor
du Triangle d'or과 1994년에 La Table d'Isis ou le secret de lalumière라는 책 참조]
플랑타르는 50년대 중반에 '레네 르 샤토'에 있는 소니에르 신부의 부동산 구입자인 '노엘 코르뷔'
(Noel Corbu)를 알게 된다. '노엘 코르뷔'는 바로 소니에르의 가정부 마리에게서 그의 저택을 구입했던
그 사람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서신들과 두 사람이 함께 '레네 르 샤토'의 막달라 탑에서 찍은 사진은
현재 보관되어 있다.
'노엘 코르뷔'를 만난후에, 플랑타르는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소니에르의 소문에 자신의 상상
력(양피지 암호문, 성배, 메로빙 왕조, 시온 수도회 등등...)을 덧붙인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자신의 원고를 출판할 출판업자를 만날 수 없었다.
1956년 6월에 '플랑타르'는 동료들을 모아 '시온 수도회'를 창설했다.
창설자들에 의하면 '시온'이란 이름은 예루살렘의 시온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 있는
'몽트 시온'(Mont-Sion)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저소득층이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주택 복
지를 위한 권리와 자유권을 변호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이듬해인 1957년
해체되었으나 재설립과 해체를 반복했다.
그때부터 '플랑타르'는 자신의 동료인 '필립 드 슈리제'(Philippe de Cherisey)와 함께 신부가
발견했다고 하는 양피지들을 위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대 무렵에 그는 파리 국립 도서
관에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이 자료들을 등록 시켰다.
비밀문서에는 메로빙 왕가의 족보, 시온 수도회의 역사와 단장의 명단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들에는 시온 수도회가 소니에르 신부의 보물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으며, 피에르 플랑
타르가 다고베르트 왕의 직계 후손임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헌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출판사들과 카톨릭 학회지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60년대에 플랑타르는 '제라르 드 세드'라는 작가에게 자신의 자료를 제공했다. 1967년에 '제
라르 드 세드'는 플랑타르가 제공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레네의 황금'과 그 책의 문고판인 '저
주받은 보물'을 출판하게 된다. 이것은 '성혈과 성배'의 저자들도 파악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드 세드의 저서를 낸 파리의 출판사에 어떤 사진자료를 달라고 편지를 썼다. 우리들
이 요구한 사진은 그에 따라 우리들에게 우송되어 왔다. 그 사진의 뒷쪽에는 빠짐없이 '플랑타
르'(Plantard)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당시 그 이름은 우리에게 아무런 뜻이 없었다.
그런데 드 세드의 저서 가운데 한권의 부록에 피에르 플랑타르라는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피에르 플랑타르가 드 세드의 어느 저서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아
냈다. 결국 피에르 플랑타르가 우리들의 조사과정에 지배적인 인물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 [Michael B 외 / 聖血과 聖杯 / 강혜령 역/ 행림출판, 1982 / P.89]
뒤에서 언급 하겠지만 이후에 플랑타르는 '성혈과 성배'의 저자들에게도 자료를 제공했다.
천년동안이나 유지해온 비밀조직의 단장으로써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이 아닌가?
'제라르 드 세드'가 내놓은 책의 작가는 표면상으로는 작가 본인으로 표시 되어 있었으나,
출판 계약서에 따르면 이익금은 세사람이 나누어 갖기로 계약이 체결 되어 있었다. 세명의 사람은
'제라르 드 세드'와 '플랑타르' 그리고 '필립 드 슈리제'였다.
그러나 1971년 이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 추가적인 인세를 받지 못한 '필립 드 슈리제'는
양피지 암호문은 자신과 플랑타르가 함께 위조한 것임을 밝혔다. 이 내용은 그의 여러 책들과
편지들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편, 세사람이 책의 인세 분배 문제로 싸우고 있는동안, 그 책에 관심을 가진 BBC 다큐멘타
리팀이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리고 책에 담겨진 내용이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BBC에서 방영되자 플랑타르는 어느덧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내용이 방송국에서 방영되며 세간을 떠들썩 하게 만들 무렵, '장 뤽 쇼멜'(Jean-Luc Chau
meil)이라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가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그 내용은
1979년에 출판되게 된다.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을 조사하던 '장 뤽 쇼멜'은 플랑타르가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양피지 문서를
건네 받아 검토를 의뢰했다. 그 결과 양피지 문서는 1960년대 초반 이전에 기록된 것이
아님이 판명 되었다. '장 뤽 쇼멜'은 플랑타르에게 이 문제를 추궁하자, 그는 문제의 양피지가
'필립 드 슈리제'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진본(眞本)에 토대를 둔 사본이
라고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 무렵 BBC의 다큐멘타리를 제작했던 '헨리 링컨'은 동료들을 불러들여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플랑타르는 '성혈과 성배'작가들에게도 자료를 제공했다. 1996년에 재출간된 '성혈과 성배
증보판'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국내에는 2005년에 재출판)
"'성혈과 성배'가 출간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 까지도, 우리는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르와
셰리제 후작에게서 무작위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계속 받았다." [마이클 베이전트 외 / 성혈과
성배 / 이정임 외,역 / 자음과모음 / P.607]
시온수도회의 단장중에 죽은 사람이 끼워져 있었다는 곤란한 문제에 직면한 작가들에게 플랑
타르가 정보를 제공해 준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당시에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셰리제 후작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문의해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플랑타르가 우리에게 알려준 첨부 사항이 이를
해명해주고 있었다. 이 첨부 사항에 따르면 시온 수도회 내부에서 일종의 분열이 있었다고 한다."
[마이클 베이전트 외 / 성혈과 성배 / 이정임 외,역 / 자음과모음 / P.595]
천년동안이나 비밀을 엄수했던 비밀조직의 단장 치고는 플랑타르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어째서 비밀조직의 정보를 일부러 흘리는 것일까? 이것을 과연 천년동안 이나 비밀리에
운영되던 비밀조직이라고 말할수 있는가?
'헨리 링컨'이 프랑스에 와서 소니에르 신부 사건을 취재할 무렵에, 이미 1979년에 플랑타르
의 사기행각을 폭로한 책을 내놓았던 '장 뤽 쇼멜'은 헨리 링컨에게 그 모든 사건이 사기라고
설명했다. '장 뤽 쇼멜'은 플랑타르의 유죄 판결과 양피지 위조 사건을 알려 주었으나, 헨리 링컨은
기어코 1982년에 '성혈과 성배'를 출판하게 된다.
'성혈과 성배'가 발간되기 한 달 전부터 출판사 측에서는 런던의 모든 버스 문에다 "예수에 대한
진정한 역사"라는 제목의 광고 포스트를 붙이면서 적극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성혈과 성배'가 발간되자, 더욱 유명해진 플랑타르는 주변인에게 자신이 679년 다고베르트 2세의
피살로 사라졌던 메로빙 왕조의 후손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벌이고 다녔다고 한다.
1984년에 시온 수도회에서 사임했던 플랑타르는 1989년에 시온 수도회의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단장)의
명단을 작성한다. 그런데 재정 스캔들에 휘말린 상태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 '로제 파트리스
플라'(Roger-Patrice Pelat)라는 미테랑의 오랜 친구를 단장의 목록에 포함시켰다.
1993년, 플라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던 예심 판사 '티에리 장 피에르'(Tierry Jean-Pierre)에 의
해 플랑타르의 가택수색이 실시되었고, 그의 집에서 플랑타르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이라고
기록한 문서를 발견했다. 심문 끝에 플랑타르는 그 문서가 사기임을 인정했으며 이로 인해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그는 3번에 걸쳐 수감 생활을 한 적이 있으며 판결과 관련된 서류는 오늘날
관련 기관에서 공람할 수 있다.
'성혈과 성배'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질 즈음, 1996년 8월20일자 런던 타임스 1개 지면에
또 하나의 책 광고가 실렸다.
'신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리처드 앤드류'와 '폴 셀렌버거'라는 작가는 소니에르 신부의 양피지를 해독하여
'레네 르 샤토'에서 수Km 떨어진 '몽 까르두'라는 야산에 예수의 무덤이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에 부족한 내용을 보충한 '성혈과 성배 증보판'이 재발매 되었다.
그러자 1996년에 BBC 방송에서는 '어떤 미스테리의 역사'(The History of a Myster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게 된다. 방송에 출연한 '장 뤽 쇼멜'은 문제의 발단이 된 원본 양피지들을 공개했다.
그 양피지들은 고대로 부터 전해내려온 고문서가 아니라 현대에 제작된 것이었다. '장 뤽 쇼멜'은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을 낱낱이 공개했으며, 방송에 출연한 '플랑타르'는 모든 이야기가 허구이며 거짓이라고 실토했다.
이로써 소니에르 사건을 다시 다룬 BBC는 70년대에 방영했던 이전 방영물들에 대한 속죄를 한 셈이다.
'플랑타르'는 2000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을 무렵인 2003년, 이번에는 그 내용을
소설형식으로 재구성한 '다빈치 코드'가 등장해서 또 다시 돌풍을 일으켰다.
플랑타르의 사기행각에 관련된 연구로는 '장 뤽 쇼멜'(Jean-Luc Chaumeil)의 조사도 훌륭하지만,
이후에 등장한 '에슈구앵'과 '르누아르'의 책에서도 잘 정리되어 있다. [Marie-France Etchegoin et Frédéric
Lenoir, Code da Vinci: L'Enquête, Paris, Robert Laffont, 2004참조]
또한, '리차드 어베니스'(Richard Abanes)의 '다빈치 코드에 숨은 거짓과 진실'(The Truth beh
ind the Da Vinci Code)이라는 책에서도 확인 할수 있다.
플랑타르와 시온 수도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다.
프랑스에 다시 메로빙 왕조를 일으키는것이 그들의 야망 이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후손이 전세계를
영적통치하는 것이 그들의 야망 이었는지 애매모호하다.
그들이 품었던 야망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망상임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필자는 한가지를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그 야망이 이루어 질때까지 절대 비밀을 엄수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이지, 어째서 이 엄청난 비밀을 일부러 노출시켰는가? '플랑타르'가 '제라르 드 세드'라는 작
가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책의 인세 문제로 싸웠다는것을 상기하도록 하라. 책과 관련된 이익
금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그 엄청난 비밀(?)을 3류 미스테리 작가에게 제공 했다는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일인가? 게다가 플랑타르는 '성혈과 성배' 작가들에게도 자료를 제공했다.
비밀조직의 단장이라면 책이 출판 되지 못하게 막아야 할것이 아닌가? 플랑타르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망상가가 아니겠는가? 이러고도 시온 수도회가 천년동안 비밀리에 운영되던
비밀조직이라고 말할수 있는가?
(2) 뒤섞여 버린 거짓과 진실
우선 이들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메로빙 왕조와 예수의 후손들을 연결시켜줄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주장에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있다.
템플 기사단이 프랑스왕 필립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의 공모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아 처형
이나 화형을 당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을 실존성이 의심되는 시온
수도회와 연계시키는 주장은 무모한 것이다.
템플 기사단이 숙청당할때 그들이 고백한 동성연애 죄목이 예수의 후손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또, 그들은 십자가를 모독했다고 했는데, 그런 행동이 예수의 후손과 시온 수도회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십자가를 모독하며 예수를 부정했던것은 영지주의자, 유대인, 카발리스트 신지학자들도 마찬
가지 였다.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인 예수와 문자주의에 오염된 거짓예수를 부정했으며,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모욕적인 내용을 탈무드에 기록하며 예수를 경멸했다.
템플 기사단이 시온 수도회라는 비밀조직과 연계 되었다는 주장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외에는 다른 근거를 찾을수 없다. 템플 기사단이 성지에서 솔로몬의 비밀궁전과
성배를 손에 넣었다는 것도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외에는 다른 근거를 찾을수 없다.
(3) 영지주의에 대한 무지
작가들은 중세시대의 카타리파를 언급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영지주의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논조를 펴가는 것이다.
성혈과 성배 작가들은 카타리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교회의 눈에는 카타리파가 물질적인 피조물(예수가 그를 위해 죽었다고 생각되는)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았으며, 그의 말씀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던 하나님을 약탈자로 보았다는것은 중대한
이단행위로 비쳤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심각한 이단사상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했으므로,
카타리파는 예수가 물질과 관계를 맺고 육신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했다.
따라서 일부 카타리파에 의하면 그는 전혀 육신을 입지 않았고 유령(phantasm)이요,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는 순수한 영의 실체였다." [Michael B 외 / 聖血과 聖杯 / 강혜령 역/ 행림출판, 1982 / P.40]
작가의 설명대로 영지주의자들은 물질과 육체를 부정하게 생각했으며, 상당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 예수를 부정했다.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은 영지주의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덧붙여 말하면 영지주의자들에게 역사적 예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숭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작가들은 이상한 논조를 펴가고 있다. 작가들은 영지주의에 대해 잘알고 있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펴나가기 위해 횡설수설 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과 육체를 부정하게 여기고
육체적 예수를 부정했던 영지주의자(카타리파)들이, 육체적 예수의 후손과 관련된 비밀(성배)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육체적 예수를 부정했던 영지주의자들이 어째서 모순적인 행동을 했을가?
육체적 예수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동료들의 죽음마져 감수 하면서 까지 지켜내려고 했던 것이,
고작 육체적 예수의 후손을 증거하는 성배였다는 말인가? 이것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수 있는가?
저자들이 이런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템플 기사단의 초창기 회원중에
카타리파가 끼어 있었다는 시온수도회의 비밀문서 내용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작가들은 '예수 바라바'나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구레네의 '시몬'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필자가 안티바이블 본문에서 언급 한것처럼 이런 것들은 영지주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8장의 '예수 바라바'라는 글 참조)
성혈과 성배류 책의 문제점은 영지주의에 대한 몰 이해에서 비롯 되었다.
'가현설'(docetism)의 교리를 담고 있는 영지주의 문헌을 내밀면서 예수의 후손을 들먹이고,
육체적 예수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자(카타리파)들이 육체적 예수의 후손(성배)을 수호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 이것이 바로 성혈과 성배류의 잘못된 논리전개 이다!
사살상 신학적 지식을 어느정도 갖춘 사람이라면 다빈치 코드류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중
상당수가 억지주장임을 알아챌수 있다.
(4)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화속에서 한 인물을 지적한다.
작가가 지적하는 인물은 예수의 옆에 앉아있는 여자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한다.
'댄 브라운'은 시온 수도회의 단장 명단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포함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다빈치의 그림들을 눈알이 뻘개 지도록 찾아 다녔을 것이다. 도데체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으로 예수를 연구 하겠다는 것 자체가 황당함의 극치가 아닌가!
작가의 지적대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속의 한 인물은 여자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를 세어보면 예수를 포함해서 모두 13명이다.
작가는 12제자중에 가롯유다는 예수를 밀고하기 위해 만찬장에서 빠져 나갔으므로 그림속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림속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제자는 모두 11명이며 여자같
이 보이는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그림이 요한복음을 묘사한것으로 생각한다.
이 그림속에는 가롯유다는 확실히 있으며, 여자같이 보이는 인물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하
게 언급되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이다!
우선, 전반적인 그림의 구도를 보면 가운데 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6명씩의 제자가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제자들은 전체적으로 평온한 분위기이며, 예수의 왼쪽에 자리잡은
제자들은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등 전체적으로 무엇인가 논쟁을 하는듯한 격렬한 분위기이다.
예수의 바로 오른쪽 옆에는 문제의 여자같은 인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흰 수염의 남자가
그 여자같은 인물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하고 있다.
예수의 바로 왼쪽 옆에는 갈색 수염의 한 남자가 두팔을 쫙 펼치며 분노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예수의 시선은 왼쪽 탁자에 놓여진 빵을 향하고 있으며, 그는 바로 왼쪽 옆 남자의 탁자에 빵을
내려놓고 있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예수의 바로 왼쪽 옆에 있는 그 남자의 시선은 자신의
탁자로 빵을 내려놓은 예수의 손을 향해 있으며, 매우 화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예수의 왼쪽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격렬하게 토론을 하는 분위기를 띄긴 하지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의 바로 왼쪽 옆의 그 남자는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분노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남자는 예수가 자신에게 빵을 건네자 무척이나 화가 난것같다.
이제, 요한 복음 13장에 묘사된 최후의 만찬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한 복음 13장 23~27절]
예수는 제자들에게 배반자가 너희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안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배반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시킨다. (위의 개역한글판 성경에
서는 베드로가 누구에게 물어보라고 시켰는지 애매모호하게 번역 되어있다.)
그러자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시 예수의 품에 안겨 배반자가 누구인지 묻고, 예수는 "빵을 건네받는
자가 배반자다"라고 말하며 가롯유다에게 빵을 건네준다.
이제 독자들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다빈치의 그림속에서 예수가 자신의 탁자위에 빵을
내려놓자 격앙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남자가 바로 가롯유다이다! 그리고 여자처럼 아름다운
인물은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것이다. 그리고 여자같은 그 인물에게 무엇인가 귓속
말을 건네는 흰 수염의 남자는 바로 시몬 베드로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다빈치는 어째서 여자같이 묘사했는지 독자들은 궁금해
질것이다. 필자가 '안티바이블' 본문중 11장의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의 저자는 다른사람이
다.'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상기하도록 하라.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가장 중요한 인물중에 하나이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요한복음(다른복음서도 마찬가지 임)의 저자로 여겨지는 '예수의 사랑 하시는 제자'는 전
통적인 신학에 따르면 세베대의 아들 요한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
거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는 '예수의 사랑 하시는 제자'를 '나사로'로 추측하고 있다.
어쨋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나사로건 요한이건 간에, 그 문제의 제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품에 안긴다. 세베데의 아들 요한도 남자이고, 요한복음 11장 2절에서도 베다니의 나
사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라고 언급하고 있다. 남자가 남자를 품에 안다니, 예수는 동성
연애자인가? 또한, 본문 7장에서 언급했던 '마가의 비밀복음'을 다시 상기해 보라. 그 문헌에
묘사된 예수와 나사로의 관계는 더욱더 동성연애적이다.
필자는 '안티바이블' 본문에서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적인 성향을 많이 띄고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즉, 요한복은 1장 18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독생자"이며, 마찬가지로 품
에 안긴 제자는 이 구절과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언급한 요한의 신학을 상징적인 코드로 처리 한것이다.
"내 안에", "너희 안에"라는 단어로 요한복음을 검색하면 무수히 발견된다.
따라서 예수는 신의 품에 안겨있고, 사랑받는 제자도 예수의 품에 안긴 것이다. 이처럼 상징으
로 처리된 영지주의적인 교리가 복음서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징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어처구니 없게도 예수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왜 여자처럼 묘사했던 것일까?
'꽃미남과 여전사'라는 새로나온 책을 소개하는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옮겨보도록 하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여장 남자라는 주장이 있는 것을 아는가. 반면 다 빈치의
'세례자 요한'은 매혹적인 눈길과 미묘한 손의 표정으로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 같은
남성을 그려냈다. 미켈란젤로 또한 남성의 몸을 여성적으로, 여성의 몸을 남성적으로 그린 그림과
조각 작품을 남겼다." ['모나리자'는 여장남자?/ OhmyNews / 2006-08-08]
남녀양성을 동시에 지닌 인물을 그리는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에게 유행했던 모양이다.
다빈치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품에 안기는 사랑받던 제자를 당시에 유행했던 방식에 따라
묘사 했을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이어오면서, 문득 15세기 무렵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어째서 예수연구의 자료로
삼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수 없다. AD 1~2세기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남긴 카타콤 벽화나
각종 그림들은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연구자료로 쓰일수 있다.
그런데 예수 이후 무려 1400년이나 지난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을 가지고 예수를 연구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유가 있다면 딱 한가지 뿐이다.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들 조직의 단장이었다고
말하니까! 정말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비밀문서에는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도 그들 조직의 단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어째서 뉴턴과 위고의 저작물들에서는 비밀코드를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문득, 필자의 머리속에 황당무계한 망상이 떠올랐다. '레 미제라블 코드'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장발장은 시온 수도회, 장발장이 성당에서 훔친 은촛대는 성배, 코제트는 막달라 마리아, 장발장을 평생동안
괴롭히는 자베르만 경감은 오푸스 데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건네주며 자비를 베푼 밀리에르 신부는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 '코데이 후루와 드 부일라',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결혼식은 예수 후손의 세계정복....
오! 그러고 보니 이런 황당한 논리전도 그럴듯하게 보인다. 갑자기 '레 미제라블 코드'(Les Miserables
Code)를 만들어 대중들을 우롱하고 싶은 악마의 유혹이 불같이 일어난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필자의 글에서 영감(?)을 얻고 흉내내는 사람이 등장할까 우려된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머리에서 나왔으니 사기를 쳐도 필자가 먼져 칠것이다! (하하하....)
(5) 잘못된 유추
필자는 성배전설과 기사도 문학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서 특별히 비평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화학의 대가 '조지프 캠벨'박사의 '신화의 세계'(원제: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 '까치글방'에서 번역출판)에서 기사도 문학과 성배 이야기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읽은적이
있다.
기사도 문학과 성배 이야기들은 사실상 고대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방신화가 기독교의 옷을
입은 것 뿐이라고 추측된다. 이것은 '성혈과 성배'저자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20세기 학자들은 성배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이교도적 기초, 즉 한해의 계절들,
죽음과 재생의 순환에 관련된 제의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교의 가장
초기적 기원들에 있어서 이교는 중동 지방의 탐무츠, 아더스, 아도니스, 오시리스의 제의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연유한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형식상 그것들과 밀접히 관련된 식물제의를 포함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리스'와 '벨쉬'신화에는 땅의 재생과정,즉 황폐와 비옥함의 비슷한 재생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죽음, 재생, 갱신의 반복적인 언급들이 있다."[Michael B 외 / 聖血과 聖杯 / 강혜령 역/ 행림출판, 1982
/ P.289]
'성혈과 성배'저자는 성배전설에 대해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저자는 성배가 예수의 후손을 의미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딱 한가지 뿐이다.
십자군 원정때 성배를 손에 넣었다고 비밀문서에 나오니까! 바로 그 한가지 이유 때문에 작가는 억지스러운
논리전개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작가는 성배전설에서 어떤 여자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성배전설에서만 여자가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기사도 문학에서도 여자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놓여져 있다. 기사도 문학에서 기사들이 싸우는 목적과 쟁취의 대상은 바로 여성이다!
"내가 사랑하는 귀부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임을 인정하라!
"라는 황당한 이유로 결투를 신청하는 우수꽝스런 기사들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기사도 문학
속에는 남녀간의 애정과 불륜이 자주 언급 되어 있다.
성배전설을 비롯하여 기사도 문학에서 등장하는 그 여성들의 정체는 바로 여신들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유럽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설과 신화들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재
등장한 것이다.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중세시대에 민간에 떠돌던 여신숭배 흔적을 언급하며 '성혈과 성배'와
유사한 논리전개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논리전개가 잘못 되었다. 정말로 그런것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면 그 주제는 '이방종교의 여신이 기독교의 마리아 숭배에 미친 영향'이 될 것이다.
예수의 후손을 데리고 프랑스로 건너온 막달라 마리아와 연계시키는 것은 기괴한 논리전개이다.
작가 '댄 브라운'식의 논리전개를 하다보면 황당한 결론이 나올수도 있다. 예를들어 개신교는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를 비난한다. 실제로 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상을 성당에 세우고 마리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마리아 조각상은 어머니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마리아 조각상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를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카톨릭은 성배의 수호자들이며, 보수 카톨릭 단체 '오푸스 데이'의 조직원들은 예수의 후손들이다!
독자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논리교육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바로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브라운이 펼쳐 나가는 논리전개가 이런 식이다.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은 구약성경의 베냐민 지파가 메로빙 왕조와 연계되어 있다는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들을 언급한다. 시온수도회의 자료외에 그들이 근거로 내미는것은 것은 프랑스의 상당수 지명이
셈어에 기원한다는 식의 미약한 자료들 뿐이다.
비밀문서에 언급된 자료의 진정성도 문제가 있지만, 프랑스의 지명을 운운하는것도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데 제임스, 데이빗, 제이콥, 존....등 서양사람들의 이름도 상당수 성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논리를 전개시키면 서양인들은 전부 유대인이라는 황당한 결론이 나올것이다.
(6) 혹시 헛다리 긁은게 아닐까?
작가들은 메로빙 왕조나 유럽 귀족의 족보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런 분야에 무지한 필자로써는
뭐라 반박하기 어렵다. 아마 작가의 자료가 상당부분 정확할지 모른다고 생각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할수 밖에 없다.
예수를 연구하는데 왜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의 족보를 연구해야 하는가? 왜?
예수를 연구하는데 왜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그림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하는가? 왜?
이유는 딱하나 뿐이다. 플랑타르라는 망상가가 남긴 황당무계한 비밀문서 때문에....
그런데 한가지 궁금증을 야기시키는 것이 있다.
성혈과 성배의 작가들의 메로빙 왕조와 템플 기사단에 대한 내용은 상당부분 비밀문서에서 비롯 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예수에 대한 분석에서는 비밀문서가 아예 언급 되지 않는다!
예수를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일부 영지주의 문헌등을 사용하고 비밀문서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들이 발견했다는 비밀문서에는 템플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때 무엇인가 보물을 발견 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고, 메로빙 왕조의 혈통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이 구약의 베냐민
지파에서 유래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의 혈통에 대한 암시는 비밀문
서에는 없는것 같다. 혹시 문제의 비밀문서에서는 예수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는것이 아닐까?
비밀문서에 따르자면 시온 수도회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무렵인 AD 10세기 무렵에 등장 했
다고 한다. 비밀문서가 사실이라고 해도 이때는 예수가 살았던 시대로 부터 무려 1000년후의
시대이다. 예수의 시대로 부터 시온수도회가 등장할 무렵까지 엄청난 공백이 있다.
비밀문서에서는 예수에 대해 어떠한 암시도 없고, 메로빙 왕조가 구약의 베냐민 지파에서 유래 되었고,
왕위를 빼앗긴 그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성배를 손에 넣었다는 식으로 묘사 된 것 같다.
만약 비밀문서에 예수에 대한 무엇인가의 암시가 있었다면 "비밀문서에 따르면 메로빙 왕조는
예수의 후손이다"라고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분석 대목에서는 비밀문서를 언급하지 않고
영지주의적 문서들을 제시하고 있다.
혹시 작가들은 플랑타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결론까지 나가 버린것은 아닐까?
시온 수도회가 십자군 원정때 보물을 손에 넣었다는 암시를 잘못 받아 들여서 헛다리를 긁은
것이 아닐까?
"그들은 매우 값싸게 제작했던 것 같은 외관을 하고 있다. 어떤것은 타자로 쳤거나 복사나 등사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Michael B 외 / 聖血과 聖杯 / 강혜령 역/ 행림출판, 1982 / P.89]
소니에르의 양피지를 비롯하여 시온 수도회의 비밀 문서들은 고문서가 절대 아니다.
양피지 문서는 장 뤽 쇼멜에 의해 1960년대 무렵의 위조품으로 감정 되었고, 나머지 시온 수도회의 문서들도
타자기나 복사기를 이용해 작성한 프린트물에 지나지 않는다.(그 당시에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어 있었다면
시온 수도회의 비밀문서들은 컴퓨터 프린터기로 인쇄 했으리라....)
성혈과 성배나 다빈치 코드류의 작품에 대해 필자는 악평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실은 매우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로써 적합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는 못한다고 평가한다.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은 우리에게 지적 호기심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성혈과 성배류의 작품
은 음모론에 깊이 빠지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 그리고 또 우리를 혼란 스럽게 하는것들
'성혈과 성배'외에도 우리를 혼란 스럽게 만드는 자료들이 있다.
이들 자료의 문제점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인도의 예수?
다빈치 코드와 성혈과 성배를 뺨치는 또 하나의 코드도 있다.
'홀거 케르스텐'은 그의 저서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황당무계한 예수의 생애를
발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지 않았으며 가사 상태에서 되살아 났다고 한다.
예수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2년간 살다가, 성모 마리아와 동생 도마 등을 데리고
인도 캐시미르 지방으로 갔다. 예수는 인도에서 115까지 살다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그 증거로 인도 슈리나가르의 칸자르(Khanjar)지역의 안지마르(Anzimar) 마을에 있는
한 묘지를 지적한다. '예언자의 무덤'이라는 뜻을 지닌 '로자발(Rozabal)의 무덤'에는 "유즈 아
사프(예수)가 수세기 전 캐시미르 골짜기로 들어왔으며, 그의 일생은 진리를 찾는 탐구에 바쳐
졌다"고 설명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한술 더 떠서 캐시미르 지역의 마리(Mari)라는 마을에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휴식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마이 마리다 아스탄'(Mai Mari da Asthan)
이라는 무덤이 존재한다고 한다.
예수가 인도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지만, 그 무덤의 진실성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묘지 건물에 새겨진 "예수가 수세기 전에..."라는 대목을 주시하라. 결국 이 무덤은
수세기동안 떠돌아 다니던 전설의 영향으로 후대에 등장한 황당무계한 유적지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인도에 기독교가 전파 되었던 것은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다. 로마에서 버림 받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일부가 인도로 빠져 나갔으며, 그들의 교회가 인도 남부해안 특히 고아와 케랄라에 퍼져 있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은 인도에서 '성 도마 기독교인'이라고 불려 졌었다. 예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이주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오래된 전승인데, 이것이 '도마행전'이라는 외경에 나타나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인도의 싼토메 대성당에는 도마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도마행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토마스 행전'은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 문서 가운데 포함된 '토마스 복음'(그노시스파 문서)과
여러면에서 비슷하다. 토마스 복음도 구세주와 쌍둥이인 토마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행
전은 그 당시 시리아의 그노시스파의 사상을 반영하고, 마니와 그 추종자인 마니케아파에게
알려졌다. 귄터 보른캄이 주장하듯이 '마니는 이 행전을 토대로 자기 자신의 교리를 만들어 냈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2권/ 문학수첩 / 이동진역 / P.270]
영지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도마행전은 마니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경전의 하나이다. 마니
(Mani: AD 216~277 라틴어로는 마니케우스)자신도 23세무렵에 인도를 여행하며 가르침을
설했고 후에 페르시아로 귀환했다고 한다. 마니교(Manichaeism)는 한때 중앙아시아 일대와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 되었다. 힌두교의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의 교세가 작았을 뿐이지,
기독교가 인도에 알려진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다.
다신교를 숭배하는 힌두교에서는 부처도 힌두신의 하나로 받아 들인다. 다른 종교를 배타하기
보다는 그 종교의 신을 힌두신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도인들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도에 있는 황당무계한 예수 유적지도 이런 배경하에 등장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면서 셀수없는 성지를 만들었던 인도인들이, 시중에 떠돌아 다니는 예수의
이야기를 토대로 황당한 유적지 하나를 만든 것뿐이다.
그리고 인도의 예수무덤과 함께 꼭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자료로 '보병궁 복음서'라는 것이 있다.
보병궁 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는 그 자체가 엉터리 자료이다.
보병궁 복음서의 정체는 바로 '리바이 도우링'(Levi H. Dowling: 1844~1911)이라는 19세기
의 미국 목사가 성령의 계시(?)을 받고 써내려갔다는 황당스러운 복음서이다. 그는 새벽 2시
에서 아침 6시까지 성령(?)이 명하는 대로 속기로 자동기술했다고 한다. 보병궁 복음서는 언
급할 가치도 없는 황당스러운 복음이다.
최근에 등장한 '성경엔 없다'라는 책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앞서 언급한 황당무계한 보병궁 복음서를 언급하며 히말라야의 불교사원의 어느
원장이 예수를 광명의 부처로 찬미했다는 등의 자료로 또 다시 예수가 인도에 갔다는 주장을 한다.
[고준환 / 성경엔 없다 / 불지사]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불교신자?)에게 필자는 차라리 마니교(Manichaeism)를 좀 연구해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마니'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범어)로 '보석'이라는 뜻하며, 그는 영지
주의 기독교와 더불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설파하고 다녔다. '게파라이아-교리요강'의 첫
부분에서 마니는 선구자인 세 사람의 이름을 드는데, 바로 예수와 사라데스와 부처다. 마니는
그 세 사람이 형제이며, 같은 지혜를 통역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독교 영지주의와 불교를 혼합한 마니교는 동서양으로 뻗어나갔다. 마니교는 서양에서는 기
독교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동양에서는 불교적인 색채가 부각 되었다.
서역의 돈황(敦惶)에서 영국인 오렐 스타인(Aurel Stein)과 프랑스인 뻬리오(Pelliot)는 '돈황
문서'라고 부르는 수천개의 옛 사본을 발견했다. 그 사본에는 불교 사본도 있었지만 상당량은
마니교의 사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어, 페르비어, 소그드 문자, 고(古) 투르크 문자,
위르 문자로 쓰여진 사본을 해독해 나갔다.
731년 당 현종의 명으로 마니교의 경전, 교리, 사원과 출가제도에 관해서 기록한 '마니광불교
법의략'(摩尼光佛敎法儀略)이라는 3969번 사본에 의하면, "빛의 부처인 마니는 2월 8일 서역
의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외의 2659a번 '마니교하부찬'(摩尼敎下部讚)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돈황문서들에서 발견된 마니교의 문서에서는 '빛과 어두움'의 영지주의적
이원론과 불교의 교리가 뒤섞여 있었다.
'라들로프'(Radloff)라는 다른 학자도 돈황에서 공동체의 회칙, 외경의 복음서, 북경에서 발행
된 '페르시아 종교의 미완성 성경'도 찾아냈다. 이들 마니교의 문헌들은 AD 700~900년경에
출간된 것이라고 한다. 돈황 이외에도 막대한 수의 마니교 사본이 투르크 지역의 여러 불교
승원에서 발견되었다.
필자는 안티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보병궁 복음서 같은 황당무계한 자료가 넘쳐 다니는것은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다. 19세기의 미국의 목사가 성령의 계시를 받고 써내려갔다는 '보병
궁 복음서'같은 어처구니 없는 자료를 근거로 예수가 인도에 갔다는등의 주장을 하는것은 타
당하지 않다. 연구 방향이 잘못 되었다. 마니교가 불교에 끼친 영향을 연구해 보라!
(2) 판데라의 아들 예수?
유대인들이 예수를 모독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문서로써 톨레도 예수라는 것이 있다.
톨레도 예수(Toledoth Yeshu)는 6세기경 부터 유대인 사이에 유행 했다고 추정 되는데 현재
최고 본은 14 세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지독하게 폄하하기 위해 만든 이 문서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요셉 판데라와 미리암과의 간통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묘사되고 있으며, 어린시절부터
지독하게 버릇없던 후레자식 이었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서 함부로 알면 않되는 신의 이름
을 넙적 다리의 피부를 벗겨내고 살속에 신의 이름을 몰래 적은뒤에 이것을 바탕으로 초능력을
행사하고 다닌다.
그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자식을 낳을 것 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사야의
구절들을 들먹이며 백성들을 현혹하다가 여왕 앞으로 끌려오게 된다. 여왕이 "그가 하는 말이
경전에 있느냐?"라고 랍비들에게 묻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는 초능력을 사용해서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자 랍비들이 가롯유다를 불러와 예수와 초능력 대결을 펼치게 된다. 이 초능력 대결에서
가롯 유다에게 패배한 예수는 나무에 매달려 처형 당하게 된다. 예수가 처형된뒤, 정원사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수로 밑의 모래에 파뭍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는 이야기이다.
톨레도 예수이야기는 이무리 빨리 잡아도 AD 6세기경의 문서라서 예수실존의 연구자료로써
는 가치가 거의 없다. 다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모독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일뿐이다.
톨레도 예수외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독하고 폄하하는 글들을 줄기차게 써내려 갔는데, 이
때문에 중세유럽의 카톨릭은 여러차례 유대인의 탈무드를 압수해서 소각했다.
(3) 신성한 유물
기독교인들간에 공공연히 회자되는 투린(Turin)의 세마포 라는 '신성한 유물'(holy relic)이 있
다. 예수의 시신을 덮었다고 알려진 이 천조각은, AD 1350 년 경의 프랑스의 작은 도시
'리레이'의 한 작은 성당에서 갑자기 공개했던 물건이다.
이후 세마포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의 후원 아래 투린(Turin)으로 옮겨 졌는데, 이것을 구경
하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어 질식해서 사망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1988 년에는 세마포의 한 귀퉁이를 짤라서 스위스, 영국, 미국의 과학자에게 세밀한 분석을
의뢰 했고, 세 군데 연구 기관은 각각 독립적으로 조사를 실시 했다. 연구결과 세군대의 연구소
모두 세마포를 1260 ~1390 년경의 것으로 판명 했다. 이 연대는 세마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바로 그 시기와 일치 한다.
카톨릭측은 1532년 화재시 세마포의 부분이 불에 그슬린 적이 있으며, 이 영향으로 탄소 14연대 측정에
오차가 있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분석에 사용된 샘플은 불에 그슬린 부분도 아니었고,
그랬었다 해도 아무 영향이 없는 것으로 판정 났다.
이 세마포에 대한 진위논란은 중세시대에도 있었다.
1389 년 프랑스 추기경 '피에르 디아시스'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세마포가 "모조품"이며
"예수의 세마포로 공식 인정한 적이 없는데도, 세간의 설이 분분 하여 잡음이 일고..."라고
불평 하고 있으며 그의 전임자가 "그것은 인간의 기술로 교묘히 그려낸 작품'임을 주지 시켰었다"고
적고 있다.
중세시대 카톨릭 성당에는 셀수없을 정도의 '신성한 유물'(holy relic)들이 넘쳐났다.
예수를 비롯하여 성경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성인(聖人)등의 살조각이나 뼈를 비롯하여,
그들과 관련된 유물들이 넘쳐났다. 병을 치료하는 효험이 있다고 여겨졌던 '신성한 유물'을 가지고 있는
성당은 부자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온 동네가 부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 성지를 빼앗은 십자군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유골이나 유품을 발견하면
벼락부자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지 곳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십자군들이 닥치는 대로 샅샅이
뒤지는 바람에 그 피해도 대단했다고 전해지며, 이 무렵부터 성배전설이 퍼져 나갔던것도 무리가 아닌것 같다.
'이리유카바 최'님의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라는 책에 언급된 '신성한 유물'(h
oly relic)에 대한 웃지 않을수 없는 일화들을 소개할까 한다.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하고 남겨졌다는 예수의 음경포피도 셀수 없이 많았다.
12세기 초 프랑스 포이치에(Poitiers) 교구의 샤루(Charroux)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그들이 소장한 예수의
음경포피를 이노센트 3세 교황에게 보여 준다며 로마까지 행렬을 지어 간 일이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을
건립할때 신성로마의 샤를마뉴(Charlemagne)황제 로부터 예수의 십자가 조각과 예수가 신고 다니던
샌들 조각과 음경포피를 선사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로마 북쪽에 위치한 비테르보(Viterbo) 주(州)에 있는 칼카타(Calcata) 교구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예수의 음경포피야 말로 진짜라고 주장 했다. 그런가 하면, 샤트레 교구의 쿠롬이라는 사원에서도
자신들이 진짜 예수 음경포피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고, 또 피이(Puy), 메츠(Metz), 안베르(Anvers),
힐더샤임(Hildersheim), 노틀담 앙보, 샤론수르만느 등 약 10여 군데에서 진짜를 갖고 있다고 나서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입장이 곤란해진 이노센트 교황은 신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며 일축해 버리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교황이 중립을 지키게 되니까 대여섯개의 교구가 또 다시 등장해서 진짜 음경 포피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얼마나 큰 돈인지는 모르지만 금조각 1만 개라는 거액을 들여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구입했고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축제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두 교회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서로 갖고 있다고 하여 싸움을 한 일이 있고,
독일의 쾰른 대성당에는 이층집 모양으로 생긴 황금궤안에 아기예수를 경배했다는 동방박사의
유해를 소장하고 있다. 예수의 땀을 닦아주자 예수얼굴이 새겨졌다는 베로니카의 베일을 소장한
이탈리아의 성당도 있다.
종교개혁가 칼뱅(John Calvin)은 '성모 마리아의 젖'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들에 대해 "동정녀
마리아가 한평생 유모 노릇을 하면서 젖을 만들어도 온 세상 구석구석에 젖을 배달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기에는 모자랐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혹평했고,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교회들
이 소장하고 있는 18명의 예수제자들의 유골을 비판했다. 개신교는 이런 카톨릭의 행태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데, 과거에는 카톨릭이 가짜 유물을 만들었다면, 현재에는 기독교와 상관없는 신비주의
몽상가들이 황당한 유물을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틀란티스 대륙, 로스웰의 외계인, 네시
호의 괴물 같은 이색적인 것을 좋아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새로운 유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성혈과 성배'는 1982년에 초판 되었다가 부족한 부분을 다시 보충하여 1996년에 다시 '성혈
과 성배 증보판'을 발매했다. 증보판의 새로운 머리말에서 작가는 책이 출간된 이후의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82년 여름에 '성혈과 성배'의 영어판만이 출간되었을때에도 그 작은 산골 마을에는 1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우리 책의 프랑스어판과 다른 외국어 번역판들이 출간되자 관광객의 수효는
두 배 이상 증가 하였다. 오늘날 렌르샤토는 순례 여행의 진정한 중심지이다.
다양한 범주의 순례자들, 이를테면 호기심에 찬 관광객이나 열성적인 기업가, 진지한 연구자,
보물사냥꾼, 마술적 의식에서 미확인 비행물체나 아틀란티스 섬 까지 모호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비의적 집단'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그 부근에 땅을 사서 현재 그곳
에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중략)......우리의 사제도 자신의 초상화가 렌느샤토에서 생산된
와인, 베랑제르 소니에르 와인병에 장식되어 있는것을 보면서 매우 기뻐하고 있을것이다."
[마이클 베이전트 외 / 성혈과 성배 / 이정임 외,역 / 자음과모음 / P.32~33 ]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크게 웃고 말았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UFO나 아틀란티스 같은 이색적인 이슈를 좋아하는 전세계의 몽상가들이 '레네 르 샤토'마을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역주민들은 소니에르의 초상화가 새겨진 포도주를 팔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묘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1988년 파괴 되었다. 렌느샤토의 미스터리에
이끌려 모여들었던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보물 사냥꾼들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려는 그릇된 생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무덤에 들어가려는 시도가 계속되자 자포자기한 무덤의 소유주는 결국 폭약으로 그 건조물을
부수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마이클 베이전트 외 / 성혈과 성배 / 이정임 외,역 / 자음과모음
/ P.34]
'레네 르 샤토'에 몰려든 성지 순례자(?)들이 어찌나 극성을 부렸던지 무덤의 주인은 폭약으로
파괴 해버렸다고 한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온몸이 뒤집어질 정도로 웃지 않을수 없었다.
(4) 노골적인 날조
성혈과 성배와 다빈치 코드류의 잘못된 부분은 앞서 지적했지만, 인터넷에는 책에도 언급되지
않은 괴이한 자료들이 흘러다니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재판' 이야기 이다.
성혈과 성배는 1980년대에 행림출판사에서 출간 된적이 있었으나 한동안 절판된 적이 있다.
그후 다빈치 코드가 인기를 끌자 2005년에 성혈과 성배 증보판이 재출간 되게 된다.
책이 절판 되었던 기간중에 이 책과 관련된 괴이한 소문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예수가 프랑스로 망명해서
84세까지 살았다는 내용이 영국 대법원에서 3년간의 법정 투쟁끝에 확인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그 무렵 필자는 다른 안티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절판 되었던 행림출판사의 성혈과 성배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이길 정도의 분명한 자료는 책에 언급되지 않았다. 재판에서 승리할 정도로
결정적 근거자료가 있었다면 어째서 책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3년간의 재판
끝에 예수의 정체가 판명 되었다는 이야기는 출처를 알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었다.
당시 필자가 이 소문의 출처를 찾던중에 의심 받을만한 종교집단이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사이비 종교로 비판받는 모 종교단체의 홈페이지에 성혈과 성배의 뒷부분이 연재되어 있었고,
3년 동안의 재판에서 승리했다는 문제의 이야기가 어김없이 있다는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이 출처가 불명한 이 소문의 창조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것을 깨달았다.
놀라운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필자는 연재되어 있는 성혈과 성배의 뒷부분을 스크랩 해가려고 며칠동안
그 홈페이지에 다녀갔다.
그 홈페이지에는 성혈과 성배에 대한 동아일보 1982년 2월20일자의 기사와 함께 문제의 3년
동안의 재판이야기가 올려져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은 그 책이 외국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종교계에 크나큰 파장을 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 밑에는 "위 기사는 이렇게
끝나고 있지만......"하면서 3년 동안의 재판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후에 가보니 아예 그 대목까지 없애버리고 동아일보의 기사와 3년간의 재판 이야기를
뒤섞어 버린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는 이원복 교수의 만화를 새로 올렸는데,
3년간의 재판 이야기와 만화 사이에 있는 애매모호한 공간에 '주간조선 1991년 4월 28일자'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3년간의 재판이야기가 주간조선의 기사처럼 착각을
유발시키도록 의도한 것이다. 물론, 그 출처는 이원복 교수의 만화를 일컫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날조자료가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아 다닌다.
'성혈과 성배'라는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것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날조자료를 유포하는것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엉터리 자료는 끝없이 변종을 일으키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반기독교 성향을 가진 카쉬올리라는 무신론자가 예수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재판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예수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가 신부를 상대로 벌인 이 재판은 상징적인
의미의 재판이었다고 할수 있으며, 말그대로 '예수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앞서말한 날조된 3년간의 재판(예수가 프랑스로 망명해서 80세까지 살았다)과, 이탈리아의
무신론자가 벌인 재판이야기를 뒤섞어 버린 변종이 등장한 것이다!
'예수의 실존성에 대한 논란'과 '예수가 프랑스로 망명해서 80세까지 살았다'는 두 재판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재판이다. 게다가 3년간의 재판이야기는 분명한 날조이고, 이탈리아의 재판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심지어 3년간의 재판끝에 판사가 "예수는 판데라의 아들"임을 확인했다는 또 다른 변종도 발견할수 있었다.
●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코드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된 극단적 이원론,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각지역으로 퍼져서 디오니소스교, 미트라교,
유대인들의 에세네파 등이 등장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수세기전에 이미 등장한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탄생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초대기독교 역시 영지주의였음은 아주 자명하다. 안티바이블 본문에서
기독교 탄생 이전에 이미 구세주론과 종말론이 유대인들에게 깊게 뿌리 내렸음을 상기하도록 하라.
필자는 예수에 대한 연구자료로써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만큼 훌륭한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내에 잠시
등장했던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주석이 몽땅 잘려나간채 출판 되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구할수 없다.
보수 기독교 단체가 책을 출판한 언론사를 불매운동 하겠다고 협박해서 절판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언론사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한번 재발매 되기를 바란다.(주석까지 복원해서)
그책의 저자들과 수많은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
'육체적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김용옥 교수가 "인간이 죽기 때문에 종교가 나왔다"라고
말한것 처럼, 유한적인 존재인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화시킨 영지주의(Gnosticism)의 코드일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예수가 실존성을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지주의 문헌들을 조사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서 기존종교의 경전을 재해석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작해냈던 사람들임을 알수 있다. 예를들어 '세상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영지주의적 문헌에는
먼저 등장한 이브에 의해 아담이 탄생 했으며, 악마들이 이브를 겁탈했다고 하는 유대교의 창세기와는
상반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유대교 창세기의 내용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유대교 창세기는 그 당시에도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서, 그 내용을 다시 재해석한 영지주의자들의 창세기는
누가봐도 날조임을 알수가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이 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들의 교리를 이야기속에 담았던 것일뿐일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신화를 비롯해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실재로 존재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를 믿었단 말일까?
환상적인 영지주의 문헌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거기에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
어떤 집단의 사상이 강하게 담겨있다. 즉, 이솝우화는 허구의 내용이지만 그안에 교훈이 담겨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솝우화의 경우는 아주 단순하지만 복잡한 것들도 있다. 죽음과 부활(영생), 십자가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상징), 12제자 (점성학의 12궁도), 로고스(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바라바'....단순하게 여겼던 것들에 무엇인가 복선이 감춰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예수는 허구의 가상인물이지만, 그 이야기에는 복선으로 깔린 메시지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화들은 비록 지어낸 이야기들 이지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징적인 언어로 신비적인 가르침들을
암호화한 이야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얼마든지
자유롭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작해 냈다.
예수의 이야기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신비적인 가르침들을 암호화한 코드에 지나지 않았다.
설사 예수라는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복음서속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예수는
신화속의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다. (반면에 열심당 제자들이나, 예수가 검을 소유하라고 명령하는
일부의 구절은 실존 예수에 대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것 같다)
에세네파는 구약을 재해석하여,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의로운 선생'에 맞춰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에세네파의 황당스러운 구약의 재해석 방법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흉내냈다. 아볼로처럼
예수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는 사람이 구약으로 예수를 증거하며 사도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말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을 위조했지만 '예수 바라바'가 여전히
남겨져 있고, 바울이 "그노시스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등 아직까지도 영지주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현재의 기독교는 아직까지 변조되지 못한 구절은 번역이라는 문제로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예수 바라바'를 그냥 '바라바'로 번역하면 그만 인것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품에 안겼다"는 구절은 동성연애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옆자리에
앉았다"로 번역해 버린다!
'계명성'과 '새벽별'은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성경의 오류를 눈가리기 위함인지 이사야서의
부정적인 구절은 '계명성'으로, 긍정적인 구절에서는 '새벽별'로 번역했다. (눈가리고 아웅이다.)
마가복음 후반부의 내용이 전부 후대의 추가물임을 알면서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나를 선하다고 말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예수의 말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도 포기할수 없다!
역사적 예수를 믿지 않은것은 영지주의자들 뿐만이 아닌것 같다. 자칭 정통파 기독교도 역사적 예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것 같지 않다. 아직까지 변조와 위조를 일삼는것을 보면 말이다. 역사적 예수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자칭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대상도 '교리속에 갇힌 예수' 일뿐이다.
배타적이고, 저속하고, 저질적인 유대교와 차원을 달리하는, 고도의 수준높은 헬라 철학이 유대교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의
영지주의파들은 항구적인 사제계급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이웃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광신적인 믿음도 보이지 않았다.
광신자들은 바로 자칭 정통파 기독교인들이었다. 광신자들은 순교를 자청하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여자를 차별하고, 독재적인 사제계급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이들 광신자 그룹이 자칭 정통파 기독교가
되었다. 신약성경을 처음 쓴 사람들이 자칭 정통파 기독교 였다면 애초부터 성경에 영지주의적인 흔적은
없었을 것이다.
영지주의와 비슷한 흐름으로 연금술이 있다. 연금술의 책에는 여러 가지 원료들이 사자, 왕,
여왕등으로 고도로 상징적이고 의인화 되어있다. 예를 들자면, 유황은 왕이나 태양으로, 수은은
왕비나 달 또는 사자로 상징되었다. 수은과 유황의 결합은 왕과 왕비가 성적 결합을 하는 모습이나
함께 목욕하는 장면으로 묘사 했으며, 토막 난 시체는 산화 과정을, 손과 발이 잘린 섬뜩한 그림은
금속 원소의 응결과 응고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 원소들의 결합, 추출과정을 묘사한 연금술
서적을 보면 마치 이상한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그러나 연금술은 원래 금을 얻기 위해 등장한 학문이 아니었다. 만물은 4대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상징화 했던 연금술이, 문자주의자들 때문에 금을 얻겠다는 세속적 차원으로 전락하게
된것이다. 연금술을 문자 그대로 믿는 어리석은 문자주의자들이 연금술에 매달려 전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런 문자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연금술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기독교 역시
무지한 문자주의자들의 장악으로 인해 암호화된 복선들이 깔린 허구의 예수신화가, 실제적인 역사로
뒤바뀌어졌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불교의 여래, 부처, 완성자와 같은 의미였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얻어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 자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것과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는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잃어버린 영지주의를 다시 부활시켜야하는 당위성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 되는 신도들'에 대한 바울의 언급처럼 그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라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말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성전이 곧 무너질것이라고 저주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위선자를 질책하는 예수의 가르침도 오늘날 기독교에서 찾아볼수 없다.
웅장한 교회건물에서 "아멘!", "주여~주여~"를 큰소리로 외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시상식 장소에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운운 하면서 온갖 추태를 부린다.
간음녀를 돌로 처형 하려고 했던 유대인을 말렸던 예수의 행동도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가 섹스 비디오를 찍었다거나 국가 보안법을 위반 했다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짱돌 하나씩을
움켜쥐고 우루루 몰려온다.
예수는 영지주의자들이 창조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성경속의 예수를 믿지 않는다!
예수는 없다! 성경속의 예수를 믿지 않는것은 영지주의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자칭 정통파 기독교인도 성경속의 예수를 믿지 않는다.
자칭 정통파 기독교인이 숭배하는 예수의 정체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태어난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예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