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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참된 禮拜者(예배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가?(요 4:23~24)
◾부제목: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禮拜(예배)는 과연 참된 禮拜(예배)인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自己)에게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禮拜)하는 자(者)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찌니라".
◾說敎大指(설교대지)
1.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삶의 나침판으로 삼았다
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3.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과 생명까지도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
🔯 보너스: 총체적으로 변질된 기독교
* 序論(서론) 및 背景(배경)
✔ 짧은 본문 말씀 중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몇번이 나오는가? 자그만치 다섯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복"은 히브리어로, ≪베라카≫이다. 이는 히브리어 어원 상으로, "무릎을 꿇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가 되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곧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가, 곧 복이라는 논리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의 근원"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한 인물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 아브라함은 예배자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아브라함읃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성경은 증거를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타국에서 방황하는, 나그네 신세였다. 그러나 늘 하나님만을 바라 보았다. 언제나 예배 중심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 아브라함의 이러한 예배자의 삶에, 하나님은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을 부어 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복의 근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과,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자의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를 배울 수가 있다.
🔥 나폴레옹의 행복/ 예배를 드릴 때였다
✔ 세계를 지배했던 불세출의 영웅인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갔다.
✔ 유배를 떠난지 얼마가 지난 후에, 신문기자가 찾아와 서물었다. “황제 폐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말했다. 어느날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는데, 내 마음에 작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감동에 이끌려서, 작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 나는 예배를 드러는 그 날, 참으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얻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바로 조그만 예배당에가서, 예배드리는 그 시간이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삶의 나침판으로 삼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을 하고 복종을 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아멘으로 순종을 하고 떠났다.
✔ 심지어는 100세에,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독자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도, 조금도 망서리거니 지체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종을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생명과 인생을 맡겼다. 아브라함은 삶 전체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다.
진정한 예배자란 누구인가? 이는 오직 삶의 기준과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서 있는 사람과,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다.
🔥 예배에 대한 모순
✔ 30분의 설교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평일에 유명한 고전 문학을, 2~3시간씩 읽는 취미가 있다.
✔ 어떤 사람은 주일이, 자신의 유일한 휴식시간인데도, 교회에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낚시를 하러 가기도 하고,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골프를 치기도 한다.
✔ 교회의 의자가 너무 딱딱하고, 좁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야구장에 가서, 더 좁고 불편한 좌석에서 3시간 동안, 열띤 응원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진한다.
✔ 교회를 나가기에는 너무나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남는 여가를 이용해서, 쇼핑을 하고, T.V를 보고 외식을 한다.
✔✔ 성도라면 다음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예배입니까? 아니면 나의 작은 즐거움입니까?
✔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보다, 더 소홀히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시간과, 가장 귀한 열정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기를 바란다.
말로만 주님을 예배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을 매우 기뻐 하셨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의 믿음을 보시고,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이 될 땅에 갈 바를 모르지만 나아 갔다. 엄청난 시험을 받을 때에도,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렸다(히 11:17).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라고 바울은 말했다.
🔥 소보다 예배를 선택하다/ 몽골 벌러르
✔ 이용규 선교사가 지은, "내려 놓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몽골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교회로 들어 왔다.
✔ 이 자매는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렸다. 소를 찾으려고 뛰어 나갔다. 그러나 예배 시간이 임박하자, 소를 버려 두고 예배를 드리려고, 들판을 가로 질러서 교회로 달려 왔다.
몽골에서 소는 삶의 기반이요. 가장 큰 재산 목록이다. 소 한 마리가, 보통 사람의 1년치 월급과도 맞먹는, 아주 비싼 값이다.
이 자매는, 예수님을 믿은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았다.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소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로 달려온 것이다.
✔ 놀라운 사실은 예배를 마치자마자, 예배당 밖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잃었던 소가, 예배당으로 찾아온 것이다.
소를 잃어버렸을 때에, 소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예배를 선택했다. 하나님은 예배의 기쁨과, 소를 찾는 기쁨을 모두 얻도록 했다. 예배가 소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은 자매였다.
3.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과 생명까지도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기적으로 얻은, 독자 아들을 드리기 까지, 절대적으로 순종을 했다. "번제할 양이 어디 있느냐?" 라고 아들이 물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난처한 질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대답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큰 믿음을 보여 주었다.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예배와 경배를 드린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이는 바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인정을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 라는 언약을 다시 확증해 주셨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모두다, 내어 놓는 예배이다.
예배자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선택함을 받은,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예배자의 삶은 어떠한 삶인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구별되는 삶과, 성별된 삶과, 성결한 삶과, 청결한 삶과, 거룩한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 예배자의 참된 삶은,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이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는, 순종의 삶이다.
그래서 남들이 찾지 않고, 남들이 가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 가면서, 골고다의 고난을 감수하고,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사람들 찾고 계신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란다.
✔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방해를 하고 유혹을 한다.
애굽에서 노예 신세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도록, 모세를 통해서 광야로 부르셨다. 그러나 바로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결코 놓아 주지를 않았다.
✔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사탄의 권세와 하나님의 왕국 사이의, 엄청난 영적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이다.
천하 만국와, 그 모든 영광을 보여 주면서, 경배를 하라고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세상의 권세과 영광을 섬기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은, 사탄의 유혹과 권세와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을 하고,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서, 당당하게 광야의 길을 걷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하신 삶 자체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참된 예배 행위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마치 살아있는 짐승과 같이, 산 제물로 드렸다. 거룩한 살을 찢기시고, 성결의 피를 흘려 주셨다.
✔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셨다. 이로 인해서, 지극히 거룩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이루시고, 의의 제사를 드렸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친히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가는 길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 주시는, 거룩하고 신령하고 참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우리를 이 땅의 죽음과, 허무한 것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하시고 참되신 생명의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해야 한다.
✔ 수많은 의인들이 영원무궁토록, 성삼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곳이, 바로 저 영원한 천국의 삶의 모습이다.
✔ 하나님을 송축하고 섬기는 자리에, 비로서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예배를 드리는 삶에 있는 것이다.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참된 예배자로 살기를 바란다.
더불어 북한의 지하 교회와, 이슬람권의 기독교인들과, 이 순간에도 핍박과 순교의 고난을 무릎쓰고,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에 순종을 하는 북한의 성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차라리 죽을 쑤는 설교를 들으라
✔ 탁월한 설교에는 은혜를 받고, 그렇지 못한 설교에는 은혜가 없는가?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받은 예배는 성공하는 예배이고, 설교가 엉망이라서 아무런 감동이 없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라는 말인가?
✔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설교가 있는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못한 예배에는, 하나님이 떠나버리신 것인가?
물론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성도들에게 주실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를 들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때에는, 탁월한 설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성도가 설교를 듣는 목적은,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좋은 설교를 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잘하지 못하는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모든 성도가 예배를 함께 준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성도가, 예배의 준비자와 주최자와 주인공과 찬양자와,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의 예배가 아니라 주인공의 예배가 되며, 어떤 설교를 통해서도,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설교 때문에, 예배를 망쳤다고 생각하지를 말라. 설교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영성 때문에, 예배를 망치는 것이다.
* 結論(결론) 및 敵用(적용)
참된 예배는, 단지 감정적인 경험만이 아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며,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는가?
참된 예배는, 인간의 보이지 않고, 불멸의 부분인 영이 보이지 않고, 불멸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높고 고귀한 활동이라는 것을 아는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참된 예배와는 너무나도 멀고, 변질이 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화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아벨처럼 예배에 성공을 하면, 만사에 성공을 하고, 가인처럼 예배에 실패를 하면, 만사에 실패한다는 것을 아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아브라함처럼,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가?
아벨처럼 예배에 성공을 하면, 만사에 성공을 하고, 가인처럼 예배에 실패를 하면, 만사에 실패한 다는 것을 아는가?
오늘날 형식적인 예배와, 가식적인 예배와, 의식적인 예배와, 마지 못해서 드리는 기계적인 예배와, 기간만 떼우는 예배를, 하나님은 역겨워 하신 다는 것을 아는가?
🔯 보너스: 총체적으로 변질된 기독교
1. 총체적으로 변질된 기독교의 현주소
(1) 변질된 기독교이다.
(2) 변질된 신학교이다.
(3) 변질된 설교이다.
(4) 변질된 복음이다.
(5) 변질된 총회와, 노회와, 시찰회와,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 등이다.
(6) 변질된 교회이다.
(7) 변질된 기도이다.
(8) 변질된 신앙이다.
(9) 변질된 목자이다.
(10) 변질된 성도이다.
2. 변질된 교회의 사례
(1) 기도가 주문으로 변질되었다.
(2) 헌금이 복채로 변질되었다.
(3) 설교가 내가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4) 예배가 푸닥거리(굿판)로 변질되었다.
(5) 찬송이 자아 도취로 변질되었다.
▪≪Nadulbok≫ Church bnk Shepherd.
▪Doctor of ≪Preaching≫.
▪Doctor of ≪Missiology≫.
▪≪Thailand≫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Laos≫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Myanmar≫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