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동이면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있었던 동네인 모양이다. 절집에 다른 용도의 건물이 들어선 경우는 자주 접했지만 토신과 곡신에 제사 올리던 사직단 근처에 절집이 들어서 의아스럽다. 하지만 유교 통치철학이 붕괴된 조선 말기에 창건되었다는 사실로 의문이 해소되기도 한다.
이른 시간임에도 법당은 기도 열기로 가득하여 셔트 누르기가 여간 미안하지 않다. 나도 우리할머니 부모님의 저런 무량한 기도와 공덕으로 성장한 사실을 익히 알기에 숙연한 느낌 지울 수 없었다.
어제 저녁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찬선이가 나타났다. 참 고마운 일이다. 자기의 스케쥴을 미루고 나에게는 낯선 지방에 동행해 주려는 마음 그 마음이 한량없이 고맙다. 전국에 우리 옛님 가족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용화사 창건에 얽힌 설화가 〈용화사사적〉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 여러 자료에 인용이 되고 있다. 조선말기 임금인 고종(純宗)의 비 엄비(嚴妃)가 하루는 꿈을 꾸었다. 꿈속이지만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 문풍지를 때리므로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하늘에 오색영롱한 안개를 몰고 7색 무지개가 내당 쪽으로 뻗쳐 있었다. 깜짝 놀란 엄비는 황급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로 앉아 하늘을 우러러 보니 선녀들에게 둘러싸인 일곱 미륵이 내당으로 들어 왔다. 엄비가 어인 일이시냐고 미륵 앞에 삼배를 올리니 맨 처음에 자리한 미륵이 말하기를, “우리는 청주 땅에 있는데 우리 몸이 지금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니, 어서 우리를 구하여 집을 짓고 안치해 달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청주군 지주(군수격)로 있던 이희복이 이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수행승 한 분이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 왔다. 그 스님을 살펴보니 가사 장삼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목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깨진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희복은 놀라서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수행승은 늪에 빠져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이희복은 이상히 여기고 방안을 살피니 꿈에서 본 스님이 앉아 있던 자리에 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더욱 괴이하게 여기고 꿈을 되새기며 날을 밝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난 뒤에 한양으로부터 엄비의 전교가 전해 왔다. 그것은 엄비의 꿈 이야기와 함께 불사(佛事)에 관한 일을 소상히 살피어 상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희복은 생각되는 바 있어 무심천변으로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니 청주 서북쪽에 있는 황량한 개울가 늪에 빠져 있는 석불이 발견되었다. 그는 사람을 동원하여 늪으로부터 7체의 석불을 건져 내고 즉시 그 사연을 엄비에게 보고하였다.
청주군 지주 이희복으로부터 상계문을 받은 엄비는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내탕금을 내리어 이희복으로 하여금 사찰을 이룩하고 7체석불을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는 보국사를 백성들의 힘으로 옮기어 석불이 발견되었던 늪 근처에 새로이 절을 짓고 7체석불을 봉안하여 용화사라 하였다 한다.
용화보전에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 석조여래입상은 용화전의 주인장 미륵불로 삼존불중 가장 큰 불상으로 나발, 육계가 유난히 크며 입은 작아 보인다. 통인 수인의 두손은 크고 삼도가 보이며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오른쪽 석불은 나발, 육계, 백호가 보인다. 수인은 왼손은 가슴 아래에서 약합과 같은 물체를 받들었고,오른손은 보병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보인다.
왼쪽 석가여래입상은 나발, 큼직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상호는 원만하나 두 볼은 두툼하여 살이 찐 듯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밑으로 물결처럼 흘러내린 옷주름의 표현이 특이하다.
수인은 왼손은 아래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어깨 밑에서 손가락을 오무린 채 밖으로 향하고 있다.
특히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이 조각되었는데, 삭발한 머리, 원만한 상호, 귀는 잛고, 삼도가 보인다. 왼손은 향로를 받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향로 윗부분을 감쌌다.
극락보전에도 4기의 보살과 불상이 있다. 왼족은 보현보살, 오른쪽은 미륵불로 알려져 있다.
유마거사상, 석조여래좌상
칠불상을 뵙고 돌아 나오는길에 사전 정보가 없었던 석탑이 보였다. 3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지대석과 1·2층의 탑신과 옥개석만 남아 있다. 초층 탑신에는 감실이 보이며 옥개 받침은 세개이다.
고려초 석탑으로 추정되며 석불의 조성시기와 같아 보인다. 하나의 사찰에 칠불을 봉안하였다기 보다는 몇 곳 사찰 불상을 전쟁의 피해를 피하기 위해 어떤 연유로 인해 은닉하였으며 조선말에 발견되어 용화사로 함께 옮기지 않았을까?
석불은 말이 없고 객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아~ 가을이 왔으면...
2008.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