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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스크랜톤 대부인과 독립운동가 김하란사의 고귀한 인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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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독립운동가 김하란사의 탄생 14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라 할 수 있는데 참으로 기묘하게도 이러한 해에 김하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으며, 결국 브레이크뉴스 최초로 2015년 12월 3일자 “비운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하란사 생애 재조명” 제하의 칼럼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친정 조카손자와 인터뷰를 하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2015년 11월 20일 처음으로 연락을 받았는데 필자의 작품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에 소개한 김하란사의 생애를 읽고 연락을 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 조카손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김하란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한 내용을 정확히 알게 되었으며, 더불어 김하란사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한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브레이크뉴스에 김하란사의 일대기(一代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김하란사 칼럼 발표가 있은지 불과 3일후가 되는 12월 6일에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MBC에서 방영하는 프로인 서프라이즈에 “스승과 제자”라는 제목으로 김하란사와 류관순 열사(烈士)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런 방송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식사하는 중에 이화학당(梨花學堂) 소리가 들려서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방송이 아닌 듯 하여 TV앞으로 가서 확인하니 바로 거기에 김하란사가 등장한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프로의 시작부분이었으며, 그 이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잠시도 눈을 뗄수가 없었다.
특히 관심이 갔던 대목은 류관순 열사(烈士)가 항일운동하는데 있어서 당시 이화학당(梨花學堂) 총교사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중이던 김하란사의 영향이 컸다는 점이었다.
필자가 김하란사의 행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선교사 스크랜톤 대부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몇년 전에 상동교회를 방문하여 받았던 “상동교회백십일년사” 제하의 책에서 스크랜톤 대부인의 생애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몇년의 세월이 흐르고 김하란사의 행적에 대하여 연구하는 중에 스크랜톤 대부인과 김하란사의 인연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한국근대사와 한국교회사를 비롯하여 김하란사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던 스크랜톤 대부인과 김하란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전에 스크랜톤 대부인은 어떤 경위로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스크랜톤 대부인은 지금으로부터 183년전인 1832년 12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멜쳐타운에서 탄생하였는데 김하란사보다 43년 연상이었다.
스크랜톤 대부인의 아버지는 벤톤으로서 감리교회의 목사였으며, 대학교육을 마치고 1855년 뉴헤이븐의 제조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톤과 결혼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아들을 낳았으나 뜻밖에 남편이 스크랜톤 대부인이 40세가 될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소녀 시절부터 선교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스크랜톤 대부인이 미국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서기로 일하던 중에 조선에서 여성을 위한 학교설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아들과 함께 선교사로 지원하여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 교육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선교역사상 모자 선교사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885년(고종 22) 1월 21일 스크랜톤가家 일행 다섯 사람은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아펜젤러 부부와 합류하였다.
동년(同年) 2월 3일 대망의 조선을 향하여 태평양 향해를 시작하였으며, 동년(同年)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1주일간 머물러 있다가 동경에 가서 맥클레이 박사를 만났으며, 조선어는 당시 동경에 체류하고 있던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에게 배웠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이후 조선의 정세와 서울의 분위기도 차차 안정세로 접어듬에 따라 스크랜톤家 일행중에서 먼저 스크랜톤 목사가 1885년(고종 22) 5월 3일에 제물포에 상륙하여 서울에 오게 되며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나서 스크랜톤 대부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제물포에 상륙한 이후 서울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스크랜톤 대부인이 조선에 입국한 1885년(고종 22)은 김하란사가 11세가 되는 해가 되며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한 1894년(고종 31)에 스크랜톤 대부인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김하란사가 1년(1894~1895)의 일본 유학생활에 이어서 10년(1896~1906)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해인 1906년(광무 10) 11월 스크랜톤 대부인은 달성궁(達城宮)에 기혼여성들을 위한 영어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 김하란사가 영어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 스크랜톤 대부인과 김하란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김하란사는 과부,기생,첩,궁녀 등 불우한 여성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여성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무렵에 스크랜톤 대부인의 연령은 70대 중반에 접어 들고 있었으며, 마침내 1908년(융희 2) 건강이 쇠약해진 스크랜톤 대부인은 학교의 운영권을 선교사 앨벗슨에게 맡기게 되며, 이후부터 앨벗슨은 김하란사와 함께 영어학교를 전도부인을 양성하기 위한 부인성경학교로 전환하였다.
김하란사는 이 학교에서 4년동안 재직하면서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이 학교는 후에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가 되었다가 다시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1885년(고종 22) 조선에 입국한 이후 여성들의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1886년(고종 23) 정동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의 이정표(里程標)를 이룩하였던 스크랜톤 대부인은 결국 1909년(융희 3) 10월 8일 향년(享年) 78세를 일기로 80평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는데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하여 스크랜톤 대부인을 추모하였는데 그 전문을 인용한다.
“ 슬프다 부인의 열성과 인내하는 마음이며 그 짝이 실로 드물도다. 이런 열성과 이런 인내의 마음으로 인하여 한국 여자의 학문계에 밝은 빛이 비로서 드러나서 안방 깊은 구석에서 술과 밥이나 짓는 법을 의논하던 여자들의 지식이 자라며 구습을 버리고 진리를 득신하며 장래 여자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는 부인의 사업이러라. 어찌 다만 여자뿐이리오. 남자라도 무릇 한국인 된 자는 부인을 향하여 절을 하고 치하하지 않을 이 없으리로다.”
이러한 사설을 통하여 스크랜톤 대부인이 한국인들에게 사실상 국모(國母)와 같은 예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크랜톤 대부인의 묘소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에 조성된 흉상(胸像)을 통하여 생전에 한국여성들의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스크랜톤 대부인의 숭고한 봉사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편 김하란사는 스크랜톤 대부인이 서거한지 10주년이 되는 1919년 베이징(北京)에서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포들이 마련한 환영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하여 결국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시신이 검게 되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독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끝으로 국적을 초월한 선교사 스크랜톤 대부인과 독립운동가 김하란사의 스승과 제자로서의 고귀한 인연이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