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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것이다. 첫째는 그야말로 감성의 해방이요 근육의 이완이다. 까운을 벗고 가볍게 옷깃을 풀어헤치고, 답답한 구두를 크리넥스 티슈보다 가벼운 운동화로 갈아 신고, 건조한 에어콘을 끄고 차창을 거치는 상큼하고 향기로운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바로 그것이 여행이 주는 첫 번째 즐거움이다. 그러나 여행의 즐거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곳에 서려있는 옛사람들의 체취와 땅의 의미,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人文地理]을 몸으로 느껴 볼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여행의 크나큰 즐거움일 것이다.
2년 전 光州에서 열린 춘계 내과 학회를 핑계 삼아 시작된 우리들의 국토 디비기는 벌써 다섯 번째에나 이르렀다. 첫 번째는 강진, 해남의 포근한 남도 삼백 리 길이었고, 두 번째는 아스라한 섬진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는 길이었으며, 세 번째는 드넓은 징게맹개 외배미들을 종횡무진하는 변산반도 행이었고, 네 번째는 철이 바뀔 때마다 아련히 생각나는 영주 부석사 행이었다.
이번 다섯 번째 우리의 국토 히떡 디비기도 2년전처럼 경주에서 열리는 춘계 내과학회를 핑계삼아 작당하였다. 목적지는 북부 경북이었다. 학회 장소가 경주라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안동을 중심으로 한 북부 경북은 조선 사회를 버티어온 수백 년 전통의 양반 문화가 곳곳에 어려있다는 점에서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보고 싶어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길은 남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포근함과 미식가들을 즐겁게 하는 맛의 향연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곳이지만(경상도 음식은 솔직히 맛이 없다. 그러나 경상도 음식의 진짜 맛은 음식 자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한 사회와 시대를 이끌었던 집단의 에토스나 엄정함, 그리고 진지함 등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여로라는 점은 분명하다.
안동과 하회마을 - 鄒魯之鄕을 찾아서
금요일 밤, 학회 공식 일정이 끝나고 펼쳐진 광란의 주연에서, 선생님들의 reverse 폭탄주(양주 잔에 맥주, 맥주 잔에는 양주. 윽 메슥거려.)와 수류탄주라는 신무기의 공세를 '일단 마시고 4분내에 토하技'라는 10년 수련 음주 秘技로 눈물겹게 막아낸 필자는 담 날 아침 6시 30분 무사히 기상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 동참하기 위해 서울에서 새벽같이 내려온 의국선배 H와 함께 경주시내 해장국집에서 가배얍게 아침을 때우고(경주 역전에서 한 블럭 좌측으로 가면 대릉원 뒷담인데 요기에 해장국집이 널려 있다. 싼값에 아침을 해결하기 딱 좋은 곳인데, 맛도 그만이다.) 고속도로를 거쳐 영천까지 간 후 국도를
이용 의성군 금성면 탑리로 향했다. 그 곳에서 이번 여행의 또 한 명의
공범인 의국 동기 S와 조우하기로 했음이다.
금성면 면소재지인 탑리라는 곳은 말
그대로 모전석탑 한기가 동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탑이 우리 나라 탑의 세 가지 형태중 하나인 전탑의 시원 양식이라는 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
준수한 용모는 참배자로 하여금 돌의
미학을 생각하게끔 한다. S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우리보다 10분 늦게 탑리에 도착하였다. 새벽에 대전을
출발하여 구미, 군위를 거쳐 촌스런 보라색 엘란트라를 털털거리며 허위허위
쫓아 온 것이다. 보라색의 촌스러움은
다들 아시리라. 거기에 군데군데 묻어있는 흙먼지는 한층 더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였다. 여행기간 내내 피곤해서
조울조울하는 S를 깨우기 위해 필자는
이쁜 여인네가 지나간다는 거짓말을
수 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필자: "와우! 섹쉬한데!"
S: 후다닥. "오데?"
무사히 합류한 우리는 새로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남안동 나들목을 거쳐 드디어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합수머리에 자리잡은 안동에 입성하였다. 안동(安東)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이러하다.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의 주도권 다툼에서 견훤은 파죽지세로 신라와 왕건을 압박한다. 더구나 공산(公山) 싸움에서 왕건의 최측근 신숭겸장군까지 척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왕건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인다. 당시 왕건은 안동지역까지 쫓겨가는데 이때 안동의 토호세력인 권씨, 장씨, 김씨 등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 견훤을 대파한다. 고려 건국 후 왕건은 이 세 성씨의 도움으로 동(東)쪽을 편안하게(安) 했다하여 안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한다. 한편 이 세 성씨는 각각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로 관향을 하사받는데 이들이 안동 양반의 효시라고 할 수 있겠다. 안동은 영가(永嘉)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실제 안동에 가면 영가유치원, 영가주유소 등등의 간판을 자주 볼 수 있다.) 영(永)이라는 글자는 '二 + 水'으로 해석할 수 있어, 영가의 속뜻은 두 개의 물이 합쳐진 아름다운(嘉) 곳, 즉 반변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아름다운 고장으로 풀이된다.
낙동강 둔치에 S의 보라색 달구지를 주차시킨 후 필자의 애마 Superboard에 모두 타고 안동댐 바로 밑의 민속관광단지를 향하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별미 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색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안동의 별미로 인터넷 어디에서나 '헛제삿밥'과 '건진국수', '안동식혜'를 들고 있음을 확인하였기에 당연히 헛제삿밥을 함 시식해보기 위해 가장 유명하다는 안동댐 민속관광단지를 향한 것이다.
원래 안동지역은 양반의 고장이므로 당연히 제사가 수 없이 많다. 이 제삿상에 올린 음식과 함께 밥을 비벼먹는 게 별미로 알려져 이것이 그냥 하나의 메뉴로 자리잡은 게 헛제삿밥이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먹는다는 뜻일게다.
어제 저녁 경주의 가장 유명하다는 한정식 집인 '○○궁'에서 음식의 빛깔이나 가짓수에 비해 형편없는 맛에 저으기 실망했던 필자는(진짜다. 전라도 강진의 시골 면 소재지에 있는 한정식집-강진군 병영면 설성식당-보다도 맛이 없었다.) 큰 기대는 갖지 않고 음식에 담긴 의미나 비벼먹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H선배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닌 것 같아 내심 미안했다. 실제로 H선배는 그날 저녁까지 속이 거북해했다.
점심을 마친 후 다시 시내로 나오면서 법흥동 7층 전탑을 구경하였는데 이는 전탑이면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탑으로(17m) 국보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국보에 대한 우리의 대우가 어찌나 참혹한지는 가본 사람만이 느낄 것이다. 탑이 있으므로 분명히 절이었을 이 자리는 양반들의 종가에 의해 이미 점령된지 오래고 그나마 탑의 바로 옆으로(거짓말 안하고 약 2-3m 옆) 중앙선 철길이 무작스레 지나가고 있음이다. 그 엄청난 철길의 진동을 어찌 저렇게 늠름하게 이겨냈나 하는 감탄보다 그 자리잡음의 안쓰러움에 눈길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한참을 무안해하며 망설였다. 이런게 국보에 대한 20세기 문명인이란 인간들의 짓이다.(탑의 기단부를 쳐발른 콘크리트는 말도 꺼내기 싫다.)
미안한 마음 가득 안고 서둘러 봉정사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가는 길에 유명한 제비원 석불을 먼발치로 구경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조금 작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성주풀이에 나오는대로 성주신의 본향이라는 이름값을 할만한 귀물이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였다.
봉정사. 얼마 전 영국 여왕이 방문했다는 유명세로 이제는 중수공사가 한창인 이 절을 우리 일행이 꼭 찾아보고 싶어했던 이유는 이 절의 극락전이라는 건물 때문이다. 국사교과서에도 언급이 되는 봉정사 극락전은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국내 최고(最古)를 다투는 목조건물이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백화점도 폭삭 쓰러지는 엽기적인 현대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800여 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오고 있는 나무로만 된 건물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그러한 건축사적 의의 때문인지 J대 건축학과 답사팀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 봉정사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연히 사진촬영을 핑계로 3인의 여인네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S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봉정사를 나와 학봉 김성일의 종가가 있는 송야천 길을 따라 풍산들을 옆으로 끼고 하회로 들어갔다. 서애 류성룡의 종가가 있는 하회 류씨의 본향인 하회. 여타의 민속마을과는 달리 늠름하고 도도한, 조선의 에토스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인 하회. 그러나 그 하회는 필자의 상상속의 하회는 더 이상 아니었다. 기품을 간직한 양반집들은 넘쳐나는 인간들을 피하기 위해 굳게 쇠자물통으로 닫혀 있어 그 의미를 읽을 수 없었고, 그나마 공개된 가옥들은 이미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되어 그 데카당스한 풍경은 대문을 들어서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집은 사람이 살고있어야만 집이다. 주인은 없고 구경꾼과 셔터소리만 난무하는 집에서 무얼 느낄 것인가? 이미 죽은 집인걸. 더구나 하회의 골목길들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묵은 동네의 정취는 간 곳이 없었다. 그다지 맛도 없어 보이는 음식을 파는 소란스런 가게집들만 즐비할 뿐.
하회(河回). '물돌이동'이라는 뜻이다. 안동에서 반변천과 합수한 낙동강이 물이 꽤 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병산이라는 절벽을 만나 크게 오메가(Ω)자를 그리며 돌아 나가는 곳, 그곳의 불룩 나온 섬같은 육지가 바로 하회다. 큰 강을 끼고 있음에도 큰 홍수 한 번 겪지 않은 조선 4대 길지 중의 하나인 하회. 그 곳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강 건너 부용대(芙蓉臺)를 올라야만 한다. 멀리 크게 돌아 강을 건너 다시 하회 쪽으로 접근하면 깎아지른듯한 절벽으로 하회와 낙동강을 맞고 있는 곳, 그곳이 부용대다. 이곳에 오른 우리 일행은 한눈에 들어오는 물동이동의 모습과 자리매김을 보며 아직 이런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사람의 손때에 절지 않고 남아 있음을 감사했다. H선배는 헛제삿밥에의 배신감을 씻은 듯이 잊었으며 S는 봉정사에서 만난 세 여인네에 대한 생각은 이미 뇌리에서 없어진 듯했다.
섬진강을 자기 안마당인양 품고 사는 욕심 많은 시인 김용택이 언젠가 휴가철 TV에 비치는 피서인파의 차량행렬을 두고 되알지게 내뱉은 적이 있다. '산과 강과 바다를 뜯어먹고, 파헤치고, 종국에는 썩게 만드는 벌레들의 행렬'같다고...... 굳이 하회마을 안에서 만난 인파나 망가진 하회의 분위기를 이와같이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우리시대의 여가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반자연적인 것인가 하는 점은 생각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아니 우리에게 도대체 여가문화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어쨌든 하회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멀리서 바라보고 감탄하는 하회이지, 그 안에서 거닐며 느끼는 하회는 아니다.'
교차하는 두 가지 감정을 어루만지며 오늘의 최종 목적지 병산서원을 향했다. 하회의 뒷산 꽃뫼[花山]를 굽이굽이 돌아......
병산서원 - 山과 江과 집의 어울림
국내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이 과연 나의 감성을 일깨워줄 만한 곳인가 아니면 소문만 무성하고 결국은 실망만을
안겨줄 곳인가를 구별하는 몇 가지 요령이 생긴다. 첫 번째는 그곳이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는 곳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지 않는 곳일수록 그 자리잡음이나 분위기가 우리를 사로잡으며
아예 그곳에 몇 시간씩이고 푹 눌러 앉고 싶게 한다. 이런 곳의 예를
들자면 수없이 많다. 전남 강진 구강포의 갯벌과 갈대밭, 해남 달마산
미황사 부도밭, 전북 부안 적벽강 수성당, 전남 화순군 벽라리의 귀여운 민불, 월출산 무위사의 소담스런 분위기, 강원도 양양 진전사지의
황망함, 경주 감은사지의 늠름한 쌍탑, 충남 부여 성흥산성의 호쾌한
경관, 등등.
또 돈을 받는 곳이라 하더라도 그 액수가 작으면 작을수록 우리의 마음과 발길을 붙잡는 곳일 가능성이 많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의 경이, 전북 부안의 내소사 입구의 숲길, 경북 영주의 부석사에서 바라보이는 백두대간의 웅장한 스카이라인 등등. 반대로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으나 받는 돈이 거하면 거할수록 본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나라 문화 행정이다. 거의 반병신으로 망가져 있는 석굴암 본존불을 유리창 너머로 힐끔 한 번 쳐다보기 위해 지불하는 돈이 우리 나라 문화재 관람료 중에서는 최고라는 사실은 대단한 역설이다.
두번째는 목적지로 가는데 거쳐야 되는 도로의 상태이다. 4차선 아스팔트로 깨끗하고 시원하게 길이 나있는 곳일수록에 정작 목적지에서는 기분이 잡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가는 길이 흉악한 비포장 흙길일수록 흘린 땀만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주 장항리 폐사지를 무너진 흙길을 따라 거의 곡예하듯이 찾았을 때의 감동(잠깐이지만 절벽타기도 했다.), 숨어 있는 미황사 부도밭을 산길을 한참 헤맨 후에 겨우 이르렀을 때 저멀리 아스라히 보이는 다도해의 전경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 산간오지의 부석사를 허위허위 찾아 드디어는 남으로 내쳐 휘어 달리는 백두대간의 능선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고야 말았을 때의 숙연함, 지도에도 불확실한 길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찾아낸 나주 반남면의 고분군이 준 미스테리함 등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우리 일행이 지금 방문하고 있는 병산서원은 위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한다는 점을 서원을 향한 비포장 흙길에서 대형버스를 만나 교차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한참을 후진하는 동안 불현듯 깨달았다. 즐거운 예감이 들었음은 물론이고, 이 예감은 훌륭히 적중하였다.
하회마을의 뒷산인 화산의 반대편 자락에 병산서원이 자리잡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발길은 다시 하회를 빠져 나와 화산을 빙 도는 신작로를 따라 서원을 향하였다. 가파른 신작로를 어느 정도 오르자 앞에 나타난 절벽과 그 밑을 유유히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 산이 병산(屛山). 하여 이 산과 그 밑의 낙동강 물을 마치 자기 정원인듯 끌어안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는 이 서원의 이름은 바로 병산서원.
이곳이 서애 류성룡을 배액한 서원이라는 점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일행이 이렇게 어렵사리 이 외진 서원을 찾은 이유는 병산서원이야말로 조선 서원건축의 백미(白眉)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축은 여러모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중국처럼 밑도 끝도 없이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도 아니요, 일본의 건축처럼 싸디 싼 분냄새 풍기는 과도한 인공이 가미된 오밀조밀함도 아니다. 우리의 전통 건축은 주위의 자연을 건축 안에 그대로 담아내는, 따라서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해 주위 풍광을 한껏 건축물 안에 끌어들이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동양화에 여백이 중요한 의미를 갖듯이 우리네 살림집의 키포인트는 마당이었다. 그리고 그 마당을 통하여 집의 가장 중심부에서 주변 자연의 풍광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집주인의 정원처럼 경영하는 것, 이것이 조선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그리고 그 주위의 수많은 누정들을 보라. 절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구현한 절이 부석사요 서원 중에서는 바로 병산서원인 것이다.
병산서원의 주 건물인 입교당(立敎堂) 마루에 마치 서원의 주인인 것처럼 걸터앉아 마당을 지나 만대루라는 누각 사이로 병산과 그 밑의 낙동강을 끌어안는 전경을 구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일이다. 더구나 만대루의 지붕과 마루 사이의 공간은 정확히 산과 강물로 이분되어 보이니 옛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안목에 실로 경탄만이 나올 뿐이겠다. H선배의 말대로 이런 곳에서 공부하였을 서애 학통들은 엄청난 행운아들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Y대 생활과학부 답사 학생들이 이미 도착하여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대루에 올라 시원한 강물을 감상하기도 하고 스케치북을 들고 서원의 평면도를 열심히 그리기도 하고 있었다. 생활과학부...눈치 채셨겠지만 대부분이 여학생들인 이 답사팀을 보며 우리 일행 중 한 명은 다시 호시탐탐 침을 흘리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그들이 서원을 떠나자 못내 아쉬워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불쌍한 넘.
우리 일행은 이 곳에서 오늘밤을 묵기로 결정하고 서원을 관리하시는 류씨 아저씨에게 민박을 청하였다. 이분은 하회 류씨의 후손으로 서원의 관리를 자청하여 하고 계시는 분이다. 1 부에서 필자는 맛없는 경상도 음식에 불평을 늘어놓았던 바, 그러나 그 불평은 류씨 아저씨의 기품 있는 환대와 정성어린 평범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로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안동양반의 접빈 문화가 그 아저씨에게는 몸으로 체화되어 있는 것 같았으며 우리 일행은 그분의 당당하고도 겸손한 대접에 어쩔 줄 몰라했다. 더구나 다음날 아침, 기대하지도 않았던 닭백숙을 아침으로 내어주시던 그 서원지기 부부의 따뜻한 마음씨는 아마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을 성싶다. 안동 음식의 진정한 맛은 음식 자체가 아닌 안동 선비들의 접빈문화의 기품 속에 있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들이키고 우리는 9시도 안되어 곯아 떨어졌다. 그러나 아뿔싸. 주인부부의 손님에 대한 극진한 접대는 보일러 온도를 최고로 맞추는 데까지 이어져 선천적으로 더운 곳에서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필자는 보일러 선이 닿지 않는 방안의 시원한 곳을 찾기 위해 필사의 뒹굼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보일러 선은 방안 구석구석 치밀하게 깔려져 있었으며 필자는 숙면을 위한 적당한 장소를 그 방안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1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어제껴 찬 공기를 유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이불은 몽땅 깔고 잤다. 방바닥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차단하기 위해서...
S는 과거 의국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엽기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홀랑 다 벗고 빤쭈와 양말만 신은 자세로 벌러덩 자는 바람에 H선배와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더구나 현재 신은 양말은 몇 시간 전 5일 동안 양말을 못 갈아 신었다고 징징대는 S를 긍휼히 여긴 H선배가 빌려준 것이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코골기는 기본으로 깔았으며 가끔은 S가 소지한 최대의 秘技인 '자면서 XX뀌기'라는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초절정 공력을 발휘하여 마악 잠들려 하는 필자로 하여금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문을 걷어차고 마당으로 뛰어나가게 하곤 했다. 악몽이었다. -_-;;
담날 아침, 새벽 공기의 촉촉함과 향기로움을 폐부 깊숙히 들여 마시며 만대루의 계자난간에 걸터앉은 필자는 그 옛날 하회다방에서 쌍화차를 시켜먹곤 했을 서애 학통들보다 우리의 S가 한 수 위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 곳 병산의 꿈같은 하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산서원 - 南人 그리고 TK
아침 일찍 푸짐한 닭백숙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우리 일행은 이제 병산서원을 뒤로하고 예의 그 신작로를 따라 다시 풍산읍으로 나왔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안동의 유생들이 가장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는 퇴계 이황이 모셔진 도산서원이다. 안동까지 와서 이 곳을 빠뜨릴 수는 없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산서원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우리 한반도가 금수강산이며 문화재의 보고라고 배워왔으며 그렇게 세뇌되어 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렇게 아름다우며 무슨, 또 어떤 내력을 가진 문화재가 그렇게 지천으로 널려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냥 그것은 마치 선험적으로 조정(措定)된 명제인 것처럼 입으로만 새롱거릴 뿐이다. 내용도 모르는 산수화나 서예를 걸어 놓고 폼만 잔뜩 잡는 19세기 말의 신흥 상업 자본가 계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이름난 사찰이나 문화재, 명승지를 사시사철 악다구니 끓듯 몰려가지만 '다리품만 팔았다. 올라가봤자 볼 것 하나 없더라!'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현재의 우리네 문화 향유 수준이다. 여기서 거창하게 미학이론을 들먹일 능력은 필자에게 없다. 다만 우리가 방문하고 있는 곳에 대한 조그마한 사전지식, 그곳에 얽혀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내력에 대한 조그마한 관심, 그리고 사소한 유적 하나라도 업수이 여기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음이다. 그랬을 때만이 우리 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이 최소한이라도 실감나게 다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기간 필자는 레지던트라는 직업이 주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음주가무를 즐기기도, 간혹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필자의 눈과 가슴과 머리를 깨끗이 씻어주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필자가 수련하던 병원의 4년차 의국에 있었다. (필자의 수련 병원은 강남에 자리잡고 있고 북향이다.) 비 개인 아침나절, 우리 병원 18층 4년차 의국에서 볼 수 있었던 깨끗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서울 북쪽 진산(鎭山)들의 스카이라인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없이 보았을 때는 그냥 산이지만 그것이 인수봉과 백운대를 끼고 있는 북한산을 중심으로 남서로는 문수봉을 거쳐 인왕산과 북악산을 내려 보낸 후 비봉으로 연결되며 북동으로는 도봉산의 거친 톱날같은 주능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바라볼 때는 그것 자체로 그야말로 진기한 명품이다. 더구나 중랑천과 상계동 계곡을 살짝 뛰어넘어 수락산과 불암산으로 이어진 후 남으로 내쳐 달려나와 온달의 전설이 서려있는 아차산에서 한강을 만나는 것까지 눈이 이어지면 마음이 자연스레 맑아지고 차분해짐을 느낄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런 스카이라인을 일상적으로 눈만 돌리면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병원 의사들의 특권중의 특권 아닌가 싶다. (필자의 후배 여러분들도 이 특권을 누리시길 희망한다. 서울만한 대도시 중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경관일 터이므로.)
그 맑아진 가슴과 눈으로 이제 우리의 도산서원을 향하자. 필자의 애마 Superboard는 다시 안동시내로 들어왔다. 거기서 다시 동북쪽 예안길로 들어서기 위함이다. 본시 이 길은 저 아래 낙동강을 타고 나있었을 길이었겠으나 안동댐으로 강 주변이 수몰되면서 이렇게 높은 산자락위로 길이 옮겨 앉게 되었다. 산과 길과 강. 옛길을 눈여겨보면 반드시 이 세 변수에 얽힌 공식을 짐작할 수 있다. 산은 강을 나눈다. 山自分水嶺. 그리고 길은 그 산 사이로 강을 타고 나 있다. 가장 평평한 곳이므로 가장 다니기 편하니까. 그러다가 종국에는 산줄기를 만나고 그러게 되면 그 산중에 가장 낮은 곳을 통하여 길이 나게 된다. 재, 령(嶺), 치(峙), 등등의 지명을 갖고 있는 이른바 고갯길이다. 우리의 옛 길은 이렇게 절대로 자연을 거스름이 없이 자연을 그대로 끌어안으며 나있다. 지도를 펴고 요즘의 고속도로가 아닌 옛 국도들을 살펴 보라. 따라서 현대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연관되어 변형된 길을 갈 때는 반드시 옛길의 원형을 그 속에서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하게 된다. 도산 서원으로 난 예안길도 마찬가지다. 퇴계가 공부하기 위해 마련한 도산서원을 가는 길이 이렇게 높다란 산자락에 걸려 있음은 우리가 만들어낸 변형된 길이 주는 착각일 뿐이다. 퇴계가 걸었던 길은 저 아래 호수에 잠겨있는 강줄기를 따라가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길이었음을 잊지 말자.
서원에 당도하였으나 아직 이른 시간인지 내방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차를 하고 각자 뱃속에서 온 신호를 입구 화장실에서 해결한 우리 일행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하듯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서원입구를 향하였다. 도산서원은 건축사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산서당이라는 세 칸 짜리 소담한 집으로 시작하였던 당우가 퇴계 사후 제자들에 의해 서원으로 증축되면서 난삽하게 덧붙여진 건물들이라 병산 서원과는 달리 진한 건축미를 느낄 수는 없음이다. 그러나 퇴계가 완성한 조선의 성리학과(왜 그거 있쟎은가. 주리론이니 이기이원론이니 어쩌구 하는 거...) 그 학통을 이어받고 또, 그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인조 이후 서인에게 밀려 철저하게 야당 생활을 해야만 했던 영남 남인들의 절절한 사연들을 느끼는 장소의 출발점으로 도산서원은 꼭 한 번은 발길을 해야하는 곳이리라. 이들이 얼마나 퇴계를 신성시하는지는 서원 한켠에 있는 유물 전시관을 둘러보면 알 수가 있다. 퇴계가 쓰던 벼루니 탁자니 의자니 하는 유물 사이로 퇴계가 마당을 쓸 때 쓰던 빗자루까지 깍듯이 전시해 놓았음이다.
영남 남인들이 퇴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생각해왔는 지는 필자에게는 그 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만한 유교적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퇴계의 일생에 있어 두 가지 측면은 필자로 하여금 퇴계를 친숙하게 느끼게 한다. 첫째는 퇴계는 공부가 재미가 있어 죽어라 노력한 평범한 사람이지 비범한 천재는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후일 제자인 당대의 천재 고봉 기대승과의 유명한 논쟁도 그렇고 과거에도 수 차례 낙방했다는 점도 그렇다. 더구나 공부를 시작한 동기가 과거를 보지 않으면 군대에 가야되기 때문이라는 점은 우리를 빙그레 미소짓게 한다. 인간으로서의 퇴계... 두번째로는 퇴계는 어려운 환경에서 처자식 몰라라하고 공부에만 열중했던 그런 류는 아니라는 점이다. 퇴계는 첫째 부인과 3년만인가 사별하게 되는데 이 분이 안동일대의 만석군 부자의 외동딸이었다. 덕분에 퇴계는 일생을 경제적인 부담 없이 공부에만 매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처럼 출세에의 독기를 품을 필요도 없이. 하여튼 필자에게 퇴계는 그런 사람이다.
이곳에 머물던 퇴계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서는 덧붙여진 서원 건물들보다는 원래의 퇴계 당대의 모습이었던 도산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조그마한 집을 둘러보는 것이 훨씬 낫다. 소박하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여러 디테일들을 보면 퇴계가 건축에도 안목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이던 건물을 당시로는 거의 금기로 여겨지던 '工'자 형태로 지은 것은 건축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이 없이는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 역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바람직한 의미의 딜레땅뜨의 한 전형이었음을 알 수 있음이다.
서원을 나오면서 서원 정문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 저 멀리 섬처럼 보이는 높다란 시사단 역시 소외된 영남 남인들의 내력 한 자락을 간직한 곳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붕당이란 뭔지, 정치란 뭔지 하는 상념이 일었다.(소외된 영남 남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정조대왕이 영남인들에 대한 특별과거를 시행했던 장소가 바로 시사단이다. 특별과거의 장소가 바로 도산서원앞 마당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영남 남인들, 200여 년이나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생활을 했던 그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후손이 팽창적 지역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역설인가 비애인가?
귀로
이제 우리의 행로는 계속 북으로 이어져 그다지 이름은 나지 않았으면서도 그지없이 깨끗한 계곡과 절벽을 지닌 봉화 청량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 산을 계곡을 타고 한 바퀴 일주한 후에는 낙동정맥을 넘어 영덕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H선배의 후의로 그 비싸다는 영덕 대게를 맛볼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의 이번 여정도 끝나간다. 돌아오는 길, 88고속도로 함양 근방에서 어슴푸레한 저녁 연하(煙霞) 사이로 아스라히 비치는 백두대간의 종점, 지리산의 한 단계 높은 실루엣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다. 우리의 연하고질(煙霞痼疾)은 언제나 씻은 듯이 치유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