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감회
최진근
어떻게 변했을까?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연일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 곤지암에 있는 특수학교에 군무하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휴일이라 대구 집에 왔는데 곤지암에 가잔다. 지난해 봄부터 몇 차례 초대를 받았지만, 먼 길이라 운전이 자신이 없는데다 건강 때문에 미루어왔다. 이런 사정을 눈치 챘는지 자기 차로 가자니 반가운 일이지만, 이석증으로 여러 번 고생을 한터라 걱정을 하며 나섰다.
직장생활을 할 땐 자주 서울로 출장을 가곤했다. 그 때는 기차나 고속버스로 다녔다. 퇴직 후 한 4여년 만에 가는 고속도로 주변은 생소 하리 만치 달라졌다. 바깥 풍경을 한참 보다가 “곤지암에서 포천 운천리와 산정호수에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곳은 왜 묻습니까?“ ”첫 군대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그럼, 내일 그곳으로 가지요“ 라고 선뜻 답을 하기에 연인을 만날 때처럼 설렜다.
이튼 날 아침 운천을 향해 출발했다. 서울외곽도로를 따라 의정부까지 가는 길은 20대 초반에 다닐 때와는 천지개벽했다고나 할까! 그때는 좁은 비포장 도로였지만, 지금은 활주로 같은 도로에다 주변은 웅장한 건물들이 숲처럼 들어섰다. 의정부에서 포천 가는 길은 예전에는 구불구불한 길가에 초가집들과 슬레이트집들이 듬성듬성 있었는데, 지금은 넓은 도로와 현대식 건물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화장을 한 모습들이 신천지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겹쳐져 어리둥절 하는데 운천리 표지판이 보였다. 순간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10여분이 지나자 운천에 도착했다. 군 생활 때 가끔 외출을 나가 보았던 그 모습은 빛바랜 흑백사진이 되어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 사이에 도닥도닥 붙어 있어 정다워 보였던 판자 집과 식당, 버스정류장,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상점이 늘어섰든 곳은 밝고 환한 도시형마을로 변모했다. 그때의 흔적을 찾으려고 이리 저리 살피다가 교회를 보는 순간 “교회가 아직 있다”며 나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매주 일요일마다 부모님 건강과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를 한 곳이다. 교회는 증축을 해서 낯설었다. 실내에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와 교회 옆 골목을 보니 하우스보이가 운영하던 가계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소속한 군부대 막사에서 미군 침대를 정리하고, 구두를 닦고, 세탁을 맡아했다. 미군부대 군무원 봉급으로 생계가 어려워 교회 옆에서 커피와 라면을 끓여 팔았다. 외출을 하거나 교회에 갔다가 들리면 큰형님 같이 점심과 커피를 주던 하우스보이와 부인의 모습이 스친다. 돌아갔을까?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90초반정도는 되었을 텐데, 나를 보면 알아 볼 까? 마음이 착잡했다.
군 생활 첫 근무지인 미7사단 보병1여단으로 갔다. 그곳은 수십 년 전 미군이 철수하고 지금은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부대를 바라보니 파편처럼 박혀 있던 군생활의 사연이 하나 둘 살아났다.
부대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카투사3명 모두 시골 출신이라 서울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걱정을 하는데 차량정비병이 아이디어를 냈다. 정비도구를 훔쳐 서울공구상가에 팔아 경비로 쓰자는 안을 내어 모두 찬성 했다. 막상 찬성은 했지만 들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며칠간 잠을 설쳤다. 외출 날 훔친 정비도구를 가방에 감춰 부대 검문소 앞에 서니 겁에 질렸지만 용케도 무사히 통과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걱정이다. 운천에서 서울 가는 길에는 검문소가 여러 곳 있어서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운천을 출발해서 첫 검문소와 두 번째 검문소는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세 번째 검문소에서 헌병에게 발각되어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을 같은 막사에 생활하는 미군이 처다 보기에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 처지였다. 세 사람은 헌병대사무실로 가서 얼차려 오리걸음과 원산폭격을 받고 훔친 물품을 압수당한 후 부대로 돌아왔던 기억이 스친다. 지금도 그 때 양심을 속인 행동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봉급날의 일이었다. 통신과에 함께 근무하는 미군이 느닷없이“초이, 한 달 봉급이 얼마냐”물어서 “1달라 30센트”라 하자 “거짓말 하지 말라”며 다그친다. 나는 정색을 하며 사실이라고 하자, 미군한사람이 10달러씩 모두 50달러를 거둬 사무실 책상위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난 맡은 일을 하다가 우연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미군5명이 창문 옆에 숨어서 몰래 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초이! 정직하다”며 어께를 두드렸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 양심을 테스트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못 사는 국민의 비애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지냈다.
또 한 번은 1970년 봄 산정호수에 갔다. 주위는 황량하고 초가 두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80대 할머니가 감자를 쪄 주어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그 고마운 할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때의 한적한 모습은 흔적이 없고 대형 주차장, 위락시설, 식당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붐볐다.
산정호수를 돌아보았다. 그 당시는 호수주위가 산비탈이라 위험해 돌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데크를 설치해서 편안하게 걷을 수 있었다. 호수의 둘레가 3Km인데 가장 조망이 좋은 아름다운 위치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 별장 안내표지판에는 “김일성 별장이 위치한 이곳은 동족상잔 이전에는 38선 위쪽에 속해 있어 북한의 소유였다. 산정호수와 명성산의 자연경관이 뛰어 나고 산정호수의 모양이 우리나라의 지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 작전구상을 위해 별장을 지어 놓고 김일성이 자주 머물렀다” 하니, 6.25 전쟁 이전에는 북한이 이호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이 갔다.
반백년 만에 찾은 군부대, 운천리, 산정호수는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나 역시 검은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었고, 얼굴에는 숱한 사연을 담은 주름살이 선을 그은 것처럼 파여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나이테와 인간이 만든 자연공간의 나이테는 달랐다. 나는 노쇠해 가지만 자연은 인간에 의해 인간이 편리하게끔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곳을 다녀오면서 긴 세월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모습이 사라져 허탈했다. 함께 근무했던 카투사와 미군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50년만의 감회에 젖어본다
첫댓글 그시대와 지금의 모습은 판이하게 변했겠지요. 군생활의 추억은 늘 가슴에 새겨져 잇지요. 추억을 그리는 그시절의 좋은 글 즐감합니다.
제가 늘 머리속에 그리던 곳을 가니 신천지로 변했더군요
참으로 허탈 했습니다. 남자에게 군생활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겠지요
지나간 추억 그리며 추억의 장소 찾음도 감회가 깊지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소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상한 시절에 건강하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