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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과제 9> 1. 지방 고을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싼 성을 무엇이라 하나? 2. 태조 왕건 촬영장이 있는 경북 문경새재에 쌓은 성은 기능과 관련하여 성의 분류상 어떤 성에 속하나? 3. 수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을 무엇이라 하나? 4.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과 맞서 싸웠던 성은? 5.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장성'은 어떠한 성을 말하는가? |
(정답과 도움말은 맨아래 '생각맞추기' 속에 있습니다.)
원래 '성(城)'은 내성(內城)을, '곽(廓)'은 외성(外城)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흔히 구분하지 않고 합쳐 부르거나 성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시설인 성곽은 세계 어디에서나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곽의 입지 조건이나 형태는 민족적 특성을 갖기 마련이다.
중국에서는 평지에 벽돌로 쌓은 성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지형적인 조건상 산성이 많이 만들어졌고, 성벽의 재료도 주로 돌을 사용하였다. 어디서나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우리 성곽은 자연지형을 잘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경사가 가파른 곳의 성벽은 낮게 쌓아서 인력을 덜고, 경사가 원만한 곳은 성벽을 높게 쌓아서 수비효과를 높인 것이 좋은 예이다.
많은 산성들은 주로 피난성으로 이용되었다. 즉 적군이 공격해오면 성 주변의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성 안으로 피난하여 군사들과 함께 적군을 막았다. 이렇게 들판을 비워 적군이 먼 곳에서 식량을 운반하느라 지치게 하면서 성을 지키는 것을 '청야수성(淸野守城;들판을 비우고 성을 지킴)' 전술이라 한다.
분류 |
명 칭 |
비 고 | ||
지위 |
도성(都城) |
수도를 둘러싼 것이다. | ||
읍성(邑城) |
지방 고을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싼 것이다. | |||
장성(長城) |
적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선을 따라 길게 쌓은 것이다. | |||
관문성 (關門城) |
주요한 교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 |||
진성(鎭城) |
군대 주둔지인 진을 둘러싼 것이다. | |||
창성(倉城) |
주요한 창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 |||
입지 |
산성(山城) |
산위에 쌓은 것 |
테뫼식 |
산 꼭대기 주위를 둘러쌓은 것이다. |
포곡식 |
계곡을 낀 몇 개 봉우리를 둘러쌓은 것. | |||
평지성(平地城) |
평지에 쌓은 것이다. | |||
평산성 (平山城) |
배후에 산을 끼고 쌓은 것이다. | |||
성벽 |
토성(土城) |
흙을 다져서 쌓은 것이다. | ||
석성(石城) |
돌로 쌓은 것이다. | |||
토석혼축성 |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이다. | |||
전성(塼城) |
벽돌로 쌓은 것이다. 중국에는 많으나 우리 나라에는 수원 화성의 일부 시설물에 벽돌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없다. |
우리나라 사적(史蹟;역사적 유적)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성 또는 성터(城址)이다. 이처럼 많은 성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지 그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B.C. 194년에 위만(衛滿)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B.C. 18년에는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慰禮城)에서 즉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은 오래 전부터 한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성이 어떠한 형태의 성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백제 초기에 축성된 풍납토성(風納土城:서울 강동구 풍납동)과 132년(개로왕 5)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지금도 사적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 삼국시대를 통하여 나라마다 많은 성을 축조하였고, 그 중에서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월성(月城)은 유명하다.
한국의 축성술은 이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한국의 지형과 환경에 적응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성을 종류에 따라 구분하면 도성·읍성·산성·행성(行城:長城) 기타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일본에 거성이 많은 점과 매우 대조적이다.
도성은 수도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한 성곽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부여와 고구려의 평양에는 외곽을 두른 나성(羅城)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어 도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도성을 축조하지 않고, 대신 월성을 비롯하여 경주를 둘러싼 산 위에 남산산성·선도산성(仙桃山城)·명활산성(明活山城) 등을 배치하여 국토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한편 고려와 조선 시대의 도성은 국도의 시가지를 둘러싼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개성의 성벽은 토축(土築)이었으며, 서울의 성곽도 처음에는 토축한 부분이 많았으나 뒤에 모두 석성(石城)으로 견고하게 개축하였다. 또한 조선 정조 때 축조한 둘레 약 5 km의 석축으로 된 수원성(水原城)은 그 규모와 형식에 있어 서울성에 버금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성이다.
지방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읍성 역시 그 시작된 시기를 밝히기 어려우나 산이 많아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일단 유사시에는 시가지를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하는 방법이 오랫동안 계속된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때 지방 소경(小京)을 비롯하여 주·군·현에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평지에 축조된 읍성인지, 아니면 전란(戰亂) 때 고을의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산성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영토확장에 많은 힘을 기울여 대동강 이북의 국경지대에 여기저기 주진(州鎭)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거기에 남쪽으로부터 장정(壯丁)과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여 변경의 방위태세를 갖추었다. 이들 주진성은 후에 변방 읍성으로 되었으며 그 형식은 대개 평산성(平山城:또는 半山城)이었다. 한국의 촌읍은 대개 배후에 주산(主山)을 두고 그 기슭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성곽도 자연적으로 읍의 주위를 두른 다음 그 끝이 산으로 이어지는 평산성 형식이 발달하였다.
한편 동해안을 비롯한 각 해안에도 왜구(倭寇)와 여진(女眞)의 해적을 막기 위한 주진성이 점차 증설되었으며, 이에 따라 내륙지방에도 많은 읍성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평산성이 아닌 순수한 평성으로 된 읍성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경주읍성과 경남의 언양읍성(彦陽邑城)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성곽을 본떠 그 형태가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성벽은 석축으로 구축되었다. 그 밖의 읍성들도 조선시대의 것은 모두 석축으로 축조되었고, 먼저 토축이었던 것도 대부분 석축으로 개축되었다.
산성은 한국의 성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형식은 입지조건과 지형선택의 기준에 따라 테뫼식(또는 머리띠식)과 포곡식(包谷式)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전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 아 붙여진 이름이며,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에 채택되었다. 한편 평야에 가까운 구릉(丘陵) 위에 축성한 것도 있으며 경주 월성·대구 달성(達城) 등은 평지에 있는 독립구릉(獨立丘陵)을 이용한 특이한 예이다. 산성의 둘레는 400∼600 m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00 m가 넘는 큰 것도 있으며 성벽은 토축으로 한 것이 많고, 때로는 그것을 2중 3중으로 둘러 구축한 것도 있다.
한편 포곡식은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包容)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이다. 성내의 계류(溪流)는 평지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외부로 유출되며 성문도 대개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벽으로 축조되었으나 백제의 부소산성(扶蘇山城)은 토축이다. 이 성은 둘레가 2,000 m 내외이나 조선시대의 포곡산성은 5,000∼6,000 m 내지 1만m가 넘는 대형산성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가공석재를 사용한 완전한 석축성벽과 무사석(武砂石)으로 구축된 성문, 그리고 총안(銃眼)이 있는 여장(女墻)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이들 산성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 병자호란 때의 백마산성·남한산성 등을 비롯하여 부여의 성흥산성·부소산성·청마산성·청산성·석성산성·건지산성, 공주 공산성, 경주 남산성·부산성·명활산성, 주산산성, 물금증산성, 화왕산성·목마산성, 김해 분산성, 함안 성산산성, 성주 성산성, 양산 신기리산성·북부동산성 등을 들 수 있다.
631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남쪽 랴오둥[遼東] 지방에 이르는 해안선 1,000여 리에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진사왕(辰斯王) 때 청목령(靑木嶺) 이서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고, 신라 성덕왕(聖德王)은 721년에 발해(渤海)와의 국경지대에 북경장성(北境長城)을 설치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은 826년 패강장성(浿江長城) 300여 리를 축조한 바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라가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관문성(關門城:경주군)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에 대한 대비책으로 압록강구에서 동해안 정평(定平)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 장성은 압록강과 청천강(淸川江)의 분수령(分水嶺)을 이용하여 산정을 이용한 부분은 토축에 의거하고, 평지는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정평 부근에서 조사한 토축장성은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시설을 갖추고 있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4군 6진의 설치로 확정된 국토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소규모의 행성들이 축조되었다. 이들은 천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이 침입하기 쉬운 영로(嶺路)를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많다. 이러한 행성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다시 논의되어 영조 때 압록강에 연한 영토에 많은 행성이 시설된 일이 있었다.
서울 동쪽 한강변에 있는 백제시대의 풍납토성은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며, 임진강의 적성면(積城面)에 있는 육계토성(六溪土城)도 이와 비슷한 토성인데 그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특수한 것으로는 임진왜란 때 경남 연해지방에 주둔한 왜군들에 의하여 축조되어 몇 개소에 남아 있는 일본식 성곽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