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걷다 길이 된 사람의 기도

[호미-이기범 목사]

길을 따라 걷다 길이 된 사람의 기도
[서평] 김기석,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신앙과지성사)

데스크 승인 2014.06.25  15:37:17

홍정호 (hoiyah)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3판, 최승자 옮김, 까치, 2010, 26쪽)."

▲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 / 김기석 지음 / 신앙과지성사 펴냄 / 214쪽 / 1만 1000원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의 책 <침묵의 세계>의 한 구절이다. 그는 또한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17쪽)"고도 했다.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과 침묵의 뒤얽힘, 그것은 "말과 침묵이 하나인 저 신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한 표지(34쪽)"이다. '말씀이신 하나님(요 1:1)'의 침묵 앞에서 침묵이 곧 말씀임을 힘겹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하나님은 왜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 40년 가까이 연마해 온 나의 신학은 이 기도 앞에서 작동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의 무기력함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느낀 때가 없었다(김기석, '영웅 말고 상식인', <국민일보>, 2014년 5월 12일자 칼럼)."

김기석 목사가 얼마 전 한 칼럼을 통해 한 말이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친구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무고한 여학생의 목소리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정말로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셨던가. "말의 무기력함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느낀 때가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말을 잃어버린 이들의 애통함과 공명한다.

말이 사라진 시간, 능동적 행위로서의 말함으로부터 물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말의 무기력함'을 견뎌내야만 하는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신을 향하여 '말'하려는 자가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이 아닐까. 말을 빼앗긴 자, 말을(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자, 그이야말로 '말과 침묵이 하나인 저 신적인 상태'에 이르는 진정한 '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기도란 그렇게 말과 침묵이 별개가 아님을 고통스럽게 긍정하는 자의 것이다.

2.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이 이리 많은데 왜 교회는 세상에서 추문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나? 우리의 믿음에,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책으로 엮여 나온 기도 모음집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에서 김기석 목사가 건넨 물음이다. 그는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수단이 아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그 마음을 우리 속에 모셔 들이는" 관계성이 결여된 삿된 욕망의 배출을 기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기도란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 삼아 조율하는(12쪽)" 지속적인 성찰과 수행의 과정이다.

성찰과 수행의 과정인 기도는 "문제에 붙들려 있던 우리의 시선을 해방시켜 더 큰 세계를 보게(13쪽)" 만든다. 크게 보이던 자기 문제는 작게 보이고, 작게 보이던 타인의 문제가 크게 보이는 역전의 체험, 그것이 김기석 목사가 말하는 욕망의 성취를 넘어선 '기도의 보람'이다. "기도의 보람은 문제 해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기도자는 나의 고통을 넘어 타자의 고통과 대면하게 되고, 그 고통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다(13쪽)."

3.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가 추문거리로 전락한 데에는 기도의 보람을 욕망의 해소와 동일시하는 소아적 인식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사람들이 기도의 언저리만 맴돌 뿐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갈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13쪽)"이라는 저자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저리만 맴돌 때' 기도는 안전하고 평안한 세속 생활의 번영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갈' 때 기도는 점차로 보장을 철회한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려는 자가 '말'과 씨름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가 말하는 '더 깊은 기도의 세계'는 피카르트의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이 시작되는' 장소일 테다. 세속의 번영과 성공을 미끼로 한 비릿한 욕망의 말이 사라지고 보장을 철회한 침묵이 말을 대신하는 곳, "말의 무기력함을 지금처럼 처절하게 느낀 때가 없었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곳, 그리하여 익숙한 말들이 빛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이 피카르트의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이 시작되는' 장소, 김기석의 '더 깊은 기도의 세계'가 아닌가.

침묵의 심연에서 익숙한 말을 여읜 자는 "생의 한 가운데서 무릎을 꿇는(12쪽)"다. 욕망의 해소가 기도의 보람이 아닌 까닭에 그이의 기도는 소박하고 진실하며, 침묵의 시간을 지나온 까닭에 상투어의 구심력에서 붙들리지 않는 진정한 말의 주인이 된다. 김기석 목사가 "기도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상투어가 될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 닿기 어렵다(14쪽)"고 말하는 이유이겠다. "그리움조차 없이 발설되는 하나님의 이름, 진정한 참회 없는 죄책 고백, 욕망에만 충실한 청원(14쪽)"으로 가득한 상투어로 넘쳐 나는 기도는 욕망을 향해 뻗어 있는 대로(大路)를 따라 걷는 기도자의 허약한 내면의 표증(表症)일 뿐이다.

4.

김기석 목사는 "기도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언어가 확장되어야 한다(14쪽)"고 말한다. 상투어에 덧입혀진 욕망을 따라 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 들어서려면 우선 기도자의 언어가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시편이나 좋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읽거나, 하루하루 기도문을 적는 것이 좋은 기도 훈련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가피한 긴장이 존재한다. 상투어의 해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언어의 생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기석 목사의 기도는 인문학의 공부와 유사하다. 격(格)과 식(式)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법식의 탁마(琢磨)를 게을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문학의 공부라면, 상투어의 해체와 생성 사이의 아스라한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기도는 차라리 수행으로서의 인문학 공부와 맞닿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공부가 무지(無知)의 자각을 통해 타자의 지평과 만나려는 주체의 해체와 생성 사이의 몸부림이듯, 김기석의 기도는 '욕망의 언저리를 맴돌며' 사는 오늘로부터 "하나님을 한껏 사랑하고,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둥켜안으며(123쪽)" 사는 내일에 이르려는 신앙적 주체의 성찰과 열망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인문학적 성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김기석에게 기도(祈禱)는 말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의 기도(企圖)로 전환시키려는 의지의 밑거름이라는 점에서 성찰의 추상성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신앙 실천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기 위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이다. 불편함이 싫어서 혹은 연루될까 두려워 사람들이 한사코 피하는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자리가 아니던가?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 그 절박한 삶의 자리를 외면하는 한 우리 기도는 확장되거나 심화되기 어렵다(15쪽)."

기도에 있어서는 상투어의 해체도 확장된 언어의 생성도 그것이 '절박한 삶의 자리를 외면하는 한' 여전히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고통 받는 이들의 절박한 삶의 자리에 기도자의 몸과 마음이 가 닿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생명보다 돈을, 안전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이 전도된 세계(127쪽)"에 살면서 "욕망과 거짓의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깨어나기(54쪽)"를 바라는 사람이다. 봄바람이 되어 '켜켜이 쌓인 어둠과 절망의 지층'을 걷어내고, "주님께서 우리 가슴에 일으키신 일렁임으로 시들어 버린 생명을 깨우며(39쪽)" 살기를 다짐하는 사람이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직립의 사람',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가벼움과, 붙잡아야 할 것은 든든히 붙잡는 진중함으로 이 덧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44쪽)"는 사람이 기도자이다. 성찰과 수행, 공부와 실천이 그의 기도에서는 이렇듯 분리되지 않는 하나를 이룬다.

5.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게 되는 이들이 있다. '개독교'니 '목레기'니 하는 따위의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마냥 부인할 수 없어 개신교인의 실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래도 변명의 여지를 남겨 두게 만드는 이가 있다면, 김기석 목사일 테다. 그의 말과 글은 혼돈에 휩싸인 개신교의 오늘을 성찰하게 만들며 내일을 향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일러 주는 이정표가 되어 왔다.

그래서다. 김기석 목사만을 이정표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말과 씨름하는 책상 위에, 녹색의 평화를 위해 땀 흘리는 밥상 위에,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과 더불어 선 길 위에 우리는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로 남아야 한다. 개신교에 아직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희망이라고 외치는 이들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 걷다 길이 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에 나선 이들은 김기석 목사의 기도와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몇 걸음 앞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 이유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연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