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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
박 화 성
영선은 삼청동 주택가로 오르는 돌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오늘이 시아주버님의 오주기(五週忌)이어서 그 추도 예배에 참석하러 가는 것이다.
‘물난리를 안 만나는 건 좋겠지만 지대가 이렇게 높아서야 조석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이 동네 사람들은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자기네 집이 낮은 지역에다 하수도를 끼고 있어서 해마다 장마 때면 물 소동으로 여간한 고통을 받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올해는 무슨 천변지이(天愛地異)가 났는지 추석이 지난 바로 그젯밤부터 어제까지 줄곧 폭우가 쏟아져서 온 시내가 발끈 뒤집히다시피 한 건 물론이요, 지방에서는 산사태며 실종, 압사 등등 인명의 피해마저 적잖은 모양이니 하물며 자기네 동네의 물의 수난이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그젯밤에는 깊은 잠도 못 들고 내내 하수도를 경계하여 수체구멍을 막았다 텄다 하였고, 어젠 종일 네 아궁이에 찰랑대는 물을 품었더니 허리가 쑤시며 잘 펴지지 않고, 엉덩짝이 뻐근한데다가 두 다리조차 뻣뻣하게 말을 안˙들어서 지금도 걸음걸음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날 만큼 보행이 괴로운 것이다.
“아유 지독히두 올라앉았네!”
위치도 맨 꼭대기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큰댁이 삼각산 상봉에나 있는 듯이 아득하게만 여겨져서 걸음이 제대로 불어나지 않았다. 길가에 높다랗게 붙여 있는 쓰레기통을 서너 개나 더 지나서야 영선은 파란 철문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영선의 맏동서인 정 여사는 방 안에 있는 모양으로 대청에서는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서성대고 있을 뿐 집 안이 조용하였다. 하기야 예배시간은 열한시인데 영선은 한 시간이나 당겨서 온 것이다.
담 밑 화단에는 사르비아가 새빨갛게 타고 있고, 귀퉁이 꽃밭에는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피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서 백장미 흑장미가 두어 송이씩의 큰 꽃을 달고 피곤한 듯이 서 있었다.
‘여기선 그 모진 비에도 꽃들이 끄덕없었나 봐.’
영선은 탐나는 듯이 한동안 화단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정 여사는 남편의 사진이 안치된 상 앞에 경건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설백의 커버로 덮인 상 위, 사진의 좌우에는 흰 국화와 흰 카네이션이 몇 송이씩 꽂힌 화병이 놓이고, 사진의 앞 나지막한 향로에서는 두 개의 향이 소르르 재를 떨치고 있었다. 영선은 시아주버님인 윤 박사를 바라보았다. 근엄한 풍모였다. 웃음기가 없는 사진의 얼굴은 더욱 두려울 정도로 근엄하기만 하였다.
‘저런 분이 어떻게…….’
더 이어가려던 생각은, 이쪽으로 돌리는 정 여사의 젖은 눈과 맞닥뜨리자 끊어지고 말았다.
“어제 비에 또 앨 태웠겠군.”
겉치레의 인사가 아닌 진정의 염려가 서린 그런 말부터 하면서 정 여사는 살그머니 손수건으로 눈언저리를 눌렀다.
“그럼요.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우네도 어서 이사를 해야지, 무슨 생고생인가그래?”
“글쎄요 뉘 탓인지. 그저 잘난 분들을 위로 모신 덕분 아네요?”
영선은 좀더 과격한 넋두리가 나오려는 것을 꾹 삼켰다. 자리가 다른 것이다. 오늘은 번거로운 잡담보다는 고인을 추모하는 근신함으로 분위기를 엄숙하게 해야 할 것 같아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애들 말 들으니까 아주버님 묘소의 잔디가 여간 곱게 덮이지 않았드래요. 작년엔 그렇지가 않았다는데요.”
“정말 그랬어. 작년 추석 땐 너무나 엉성해서 맘에 걸리길래 금년 한식 때 또 손을 봤더니 여름 장마 때도 고대루 있더군. 추석날 가보니깐 묘지기가 벌초도 참하게 해서 잡풀이었을까 쑥대가 섞였을까 아주 만족했어.”
“참말 다행이지 뭡니까? 어쨌거나 묘소엔 떼가 무성히 덮여야 해요.”
“워낙이 깨끗하시고 고고하시니깐 유택도 정갈하게 가꾸어지나 봐.”
영감님에게 말이 미치면 언제나 정 여사의 미간에는 자궁의 빛이 은은하게 일면서 고고하시고 깨끗하시다는 찬사를 하기에 희색이 만면에 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윤 박사는 청렴하고 근엄한 인격자로 그의 일생을 마친 학자이며 교육자인 까닭에…….
“차차들 오실 때가 됐군.’
정 여사는 상 앞에서 일어났다. 환갑이 박두한 나이인데도 몸매가 젊은이처럼 고왔다. 하얀 소복의 자태는 그의 창백한 안색으로 하여 더욱 처량하게 보였다. 영선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참 애들은요?”
“응, 걔들은 일찍 출근했어. 그렇지만 예배엔 꼭 참례할거야.”
“아범두 그럴 거예요.”
그들이 화문석을 다시 바로잡고 방석들을 배열하는 동안에 대청에서도 다과의 준비를 마쳤는지 딸과 며느리가 현관과 정원에서 오락가락했다.
“교회에선 몇 분이나?”
“목사님 내외분, 장로님 두 분, 그리고 남녀 제직 몇 명 해서 열 분쯤 오실 거야.”
대청의 벽시계가 열한시 십분 전을 가리키니까 영선의 남편인 상호가 바쁘게 대청으로 올라섰다. 정 여사가 맞이했다.
“부장님 오세요? 용케 틈을 내셨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애들은 아직 안 왔나요?”
“저기들 오는군요.”
사진의 윤 박사의 모습과 방불하게 이목이 반듯한 아들 형제와 윤 박사와는 쌍둥이처럼 흡사한 윤 부장이 응기중기 마루에 모이자 정원이 떠들썩하면서 목사가 거느린 십여 명의 남녀 교인들이 주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차례로 방 안에 들어와서 각각 자리를 잡고 시계가 열한 번을 알리자 예배는 시작되었다.
딸과 며느리까지 끼니까 넓은 방이지만 빽빽하게 만원이 되었다. 그들은 사진을 주목하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올리는 중간에 아멘 주여! 하는 참 넣기를 잊지 않았다. 목사의 간단하고도 심각한 설교가 있었고, 다분히 웅변조인 대머리 장로의 추보 기도가 감격적이었다고 영선은 섕각했다.
예배가 끝난 후 윤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담(私談)이 오가는 동안, 커피와 떡과 과자 실과 등등의 다과접시가 주인 여자들의 손으로 분주히 날라들었고, 그들이 돌아갈 때는 ‘추모’ ‘9·18’이라는 흰 글자가 완연한 카스테라가 담긴 케이크 상자들을 하나씩 들었던 것이다.
‘정성도 지극하시지. 저런 형님을 두고 어쩌면…….’
윤 박사의 소상 대상 이후애도 해마다 정 여사는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알심있는 추도식으로 윤 박사의 기일을 기념했고, 그럴 때마다 영선은 저 혼자만이 알고 있는 어떤 비밀로 하여 은근히 고인에 대한 저항의식과 정 여사에 대한 동정심이 얽힌 착잡한 심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추도식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7년 전에 그 일을 당한 때부터 이날까지 정 여사의 오로지 남편만을 위하는 갸륵한 자세를 볼 때마다 솟구치는 반항심인 것이다. 영선 혼자만의 비밀이란 이런 것이다.
윤 박사는 서울에서 멀리 D시 K대학에 출장 강의를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저명한 국문학자인 윤 박사는 이일간 그 대학의 강의를 맡았던 것이다. 영선의 고향도 D시여서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가면 윤 교수의 명강의를 대학생들은 물론이요, 어쩌다가 들어본 청중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바람에 영선의 어깨가 으쓱 오르곤 했었다.
오 년 전의 초겨울. 영선은 친정 아버님의 진갑잔치에 참석차 D시에 가 있었는데 서울 정 여사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다. 가족묘지의 매매 관계로 꼭 윤 박사의 직접인 의견을 들어야 하겠는데 대학으로 전화하니까 퇴근했다 하여서 하숙으로 하니까 아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남에게 내용을 말할 수는 없고 자네는 이미 내용도 좀 알고 있는데다가 그곳에 있어 손쉽게 찾기 쉬울 테니까 빨리 연락하여 이러이러한 대답을 서울 집으로 해달라는 긴급한 부탁이었다.
영선은 즉시 윤 박사의 하숙으로 먼저 달려갔다. 과연 윤 박사는 거기에 없었다. 하숙이래야 윤박사의 친지의 집이니까 그 주인도 퍽 친절하게 어디 가실 만한 곳을 더듬어 생각하다가 혹시 이런 곳을 가보라는 제의를 하였다.
윤 박사의 아주 절친한 친구댁이라고 가끔 들르시는 데가 있는데 다행히 그 집을 알고 있다면서 길목과 집모양까지 가르쳐주어서 영선은 됐구나 싶어 쏜살로 그곳을 찾아갔다. 변화하지 않은 골목을 접어들어서 이윽히 들어가니까 또 갈래 골목이 나오고 그 골목의 둘째집이 바로 그 육중한 쇠장식을 붙인 노란 대문을 달고 있었다.
영선은 굳게 닫혀 있는 문짝을 똑똑 두드렸다. 바로 문간방에 사람이 있었던 모양으로 빗장은 얼른 벗겨지고 영선은 머리가 반백인 마님풍의 여인에게 혹 윤 박사님이 와 계신가고 물었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영선은 급하고 반가운 맘에 앞뒤 체면없이 여인의 뒤를 따라 불쑥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노마님은 좀 당황해하는 얼굴로 영선을 힐끗 돌아보더니 거기서 좀 기다리라는 표현을 손으로 했다.
뜰에는 벌써 어둠이 기어들어 어슴푸레하게 마님의 얼굴도 보이고 섬돌에 놓여진 화분들도 보였으나 방 안에는 환하게 불이 커져 있었다. 좀 으슥진 지역에 위치한 탓인지 황혼도 일찍 찾아든 듯하였다. 부엌에도 불이 밝혀 있어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얼씬거렸다. 전체로 보아서 분위기만은 명랑했고, 또 영선의 기대도 백 퍼센트 정당하여서 손톱만한 어두운 추측이 끼어들 수 없었다.
노마님이 방문 밖에서 나직이 중얼대자 미닫이가 방긋이 열리면서 먼저 여자의 얼굴이 빠끔히 내다보았다: 순간 영선은 깜짝 놀랐다. 유명하던 당지 명사의 미망인이었던 것이다.
‘잠잠하게 묻혀 있더니 저분이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
영선은 무의식으로 두어 발짝을 그쪽으로 옮겨갔다. 미닫이는 탁 닫겨졌다.
‘저 여인의 남편이 아주버님의 절친한 친구였던가?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가 부다.’
아까 노마님께 서울에서 온 제수라는 전갈까지 분명하게 하였으니까 아주버님이 계시다면 냉큼 나와주리라고 믿었는데 방 안이 감감한 것으로 혹시 부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문 밖에 서 있을 때 마나님이 안 계시다고 잘라 말했을 것이 아닌가. 마나님은 귓속말처럼,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하고 문간방 쪽으로 가버렸다. 부엌의 일하는 여인들이 가끔씩 영선을 힐끔거리곤 했다.
이윽하여서, 정말 이윽하여서였다. 윤 박사가 정장을 하고 코트까지 팔에 결친 채로 유유하게 대청으로 걸어나왔다. 얼마나 들떠 있었던지 신방돌 위에 점잖게 놓인 윤 박사의 구두가 그제야 영선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제수씨가 어떻게 예까지 오셨소?”
윤 박사는 마루 끝에서 영선에게 그렇게 말하고 얼른 구두를 신었다. 마땅히 주인댁이 나와서 먼저 온 손님을 보내기도 하고, 아무리 불청객이긴 하지만 자기 집을 방문한 손이니 어쨌든 한 마디의 인사라도 있어야 할 텐데, 비로 쓴 듯이 대청이 적적하여서 영선의 가슴에는 비로소 때늦은 의혹심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원 이럴 수가 있담?’
꼭 무슨 꾸중 맞을 장난이나 하다가 어른에게 들킨 애들처럼 윤 박사의 태도도 석 연치 않으려니와 주인댁의 실례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네. 형님에게서 아주 긴급한 전화가 왔어요.”
“어서 나가십시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 뜨락을 거의 다 왔다 싶었는데 안방문이 화닥닥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윤 박사가 홱 돌아섰다.
“이거…….”
여인이 무엇을 내미는 모양이라 영선도 머리를 돌렸다. 여인은 마루 끝에서 섬돌 앞에까지 다가간 윤 박사에게 무엇을 쥐어주는 듯했다.
“이거 당신이 떨어뜨린 수표예요.”
영선은 분명히 들었다. 여인이 가만히 속삭였지만 화살처럼 쨍하게 자기의 고막에 와서 박히는 것을…….
‘당신? 당신이라?’
당신이란 호칭은 친구의 미망인쯤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러대지 못할 대명사가 아닌가. 그 집의 대문을 나와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영선의 발끝이 바르르 떨리려고 했다.
‘설마……이 근엄한 아주버니가 설마……훌륭한 아내를 두고 어떻게 감히…….’
발등에 불이 날 듯싶게 이 구석까지 쫓아온 영선에게 윤 박사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일도 없이 천연스럽게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영선의 존재는 잊은 듯이…….
어느 다방에 마주 앉아서야 윤 박사는 그 긴급상황이라는 용건을 물었다. 여전히 진중하고 고고한 태도였다. 영선은 정 여사의 부탁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빨리 서울에 회답을 하라는 부탁을 한 후에 그와 헤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다면 저렇게 침착할 수만은 없을 거야.’
영선은 끝내 자기의 의혹을 망념(妄念)이라고 고집했다. 어느 가정에서든지 주부가 좀 아둔하거나 세련되어 있지 못하면 방문객에게 그런 비례쯤은 감행할 수 있을 것이요, 그 미망인은 곧 그런 종류의 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자고로 망녕된 추측이 화를 빚어내게 마련 아닌가.’
윤 박사로 말하면 정인군자로 너무나 이름이 높은 분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은 누구나가 다 윤 박사를 사내가 아니라고까지 비난했다. 자주 모이게 되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나 담배를 피우나 몰취미하기 이를데없고, 더구나 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돌부처인 까닭이었다. 아무리 점잖은 체하던 학자님들도 곁에서 간드러지게 시중을 드는 젊은 여인들에게는 녹초가 되어 작부들의 허리를 껴안는 것은 물론이요, 유방을 만지기도 하고 체면없이 여인들의 하반신을 더듬으면서 갖은 추한 농담 짓거리들을 하는 중에서 윤 박사만은 석상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께서 무슨 비법을 가지구 계십니까? 주인어른을 꽉 잡아매서 꼼짝 못 하게 하는 비법 말입니다. 십 여 년을 술자리에 동석해왔지만 여자들에게 농 한번 거는 것을 여태껏 못 봤어요. 기집들 보기를 술상 위의 술병이나 그릇 대하듯이 도무지 무감각하단 말입니다. 처음 몇 번은 체면유지나 부인 조심하느라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는데 두고두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생리적으로 무감각한 모양이니 어디 구분이 사냅니까?
부인은 기뻐하실는지 몰라도 친구들간에는 졸장부라는 호칭이 싹 돌았습니다. 어떻게 그 누명을 벗도록 부인께서 주인 어른을 해방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친우들이 정 여사에게 그런 항의를 가끔씩 했을까. 그래 정 여사가 남편에게 그런 전언을 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의식적으로라도 태도를 능쳐서 자리에 어울리도록 하라고 충고(?) 를 했더니,
“원 별소릴 다 듣겠네. 그런 여인들에게 무슨 ㅎᅟᅳᆼ미로 손을 댄단 말요? 내 눈엔 당신 한 사람 이외엔 모든 기집들이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요. 알았소? 비난하라면 하라지 맘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어떻게 하라구들 야단야? 참 별소릴 다 듣겠네.”
하고 정색하며 화까지 내더라고 하였던 것이다.
교인들이 돌아가고 가족들만이 남아 안방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정 여사는 시종 윤 박사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크는 기어코 목멘 소리를 냈다.
“오늘은 언제나 아버님이 즐긴시던 반찬이나 음식을 준비하는데 우리끼리 먹기 죄송스럽지 뭐냐? 내년부턴 아예 그분이 안 즐기시는 음식을 만들어 야겠어.”
정 여사는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애석한 듯이 가만히 혀를 찼다. 그리고 이내 수저를 놓았다. 상호가 일부러 큰소리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원 아주머님두. 안 계신 형님만 생각하시지 전 염두에도 안 두시는 모양이군요. 덕분에 제가 이렇게 잘 얻어먹지 않습니까?”
“참, 형제분이 식성이 꼭 같으시니깐……성격은 아주 판이하시지만 외모나 식성은 너무나 방불하시지.”
“그러니까 해마다 이대로 장만하셔서 잘 먹여주세요. 그런데 얘들아! 너희두 묘소에 가야지 않아? 시간들이 어떠냐?”
“걔들은 직장 때문에 곤란하잖아요? 추석에 갔으니까 오늘은 그만두라죠.”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바로 엊그제 다녀왔으니깐. 당신이나 가셔야죠.”
영선은 얼른 정 여사의 제의에 동의하고 남편과의 동행을 희망했다. 상호 내외는 집으로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큰댁 성묘에 참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천천히 더 먹구 식혜랑 과일이랑도 들구 각기 직장으로 가거라.”
정 여사는 아들 형제에게 이르고 다시 사진 앞에 정좌하였다. 정 여사의 가슴에 크고 깊숙하게 박힌 못은 평소에도 그렇게 신중하기만 하여서 외도 한번 못 해보고, 주초(酒草)도 입에 대지 않는 분이 화투니 마작이니 하는 잡기 따위는 멸시하는데다가 음악에나 일반 오락에도 그렇게 몰취미할 수는 없어 세상의 잔재미라고는 영 모른 채로 살아가는 학자였는데, 운명 때도 너무나 허무하게 이슬처럼 사라져간 그 쓰라린 사실인 것이다.
D시에서 이일간의 출장강의를 마치고 귀가한 바로 그날 밤에 자정이 가깝도록 서재에서 연구자료를 펴놓고 집필하는 줄만 알았는데 정 여사가 따끈한 식혜를 가지고 들어가니까 벌써 테이블 앞에 쓰러져 있었다. 아들들이 몰리고 의사가 달려와서 즉시 S대 병원에 입원했으나 뇌출혈이 있었던 탓으로 나흘 만에 숨을 거두었고, 시신마저 집 안에 모시지 못한 채 장례식을 마친 것이 더욱 크나큰 못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날 밤만 하여도 진작이나 가볼 것인데 하필이면 추석 전날밤이라 이것저것 손 보느라고 틈을 내지 못하다가 느지막이 끓인 식혜를 가지고 가니까 벌써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 한.중에도 이처럼 망극한 한이 어디 또 있을까.
“아이 원통해라!”
부지중에 새어나온 정 여사의 피듣는 한탄이었다. 정 여사는 어깨를 들먹이며 새삼스럽게 흐느꼈다. 눈물이 철철 흘러내려 틱 밑으로 줄줄 떨어졌다.
“형님! 왜 이러세요? 인제 삭을 때도 됐는데 그러시네?”
“나신 분이고 나 때문에 살아가신 분이었는데 이 매정한 것이 백 년이나 살으실 줄 알구 매사에 너무너무 등한했어. 아이 원통해라!”
“아주머니! 이러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주머니 같으신 현처가 어디 또 계시겠기에 무심하니 등한하니 하세요? 자 그만 일어나셔서 성묘갈 채비나 하십시오.” :
상호 내외가 달래서 일으키고, 딸과 며느리도 한 마디씩 위로하고, 아들 형제가 물러간다는 인사를 하고 대문 밖으로 나간 후에, 정 여사는 상호 내외와 딸을 데리고 윤부장의 차에 올라 묘소로 향하였다.
‘모르면 부처님이더라고 형님은 저렇게나 철석같이 아주버님의 순결을 믿구 계시니 참 가엾기두 하단 말야.’
영선은 실심해서 곁에 앉아 있는 정 여사를 곁눈으로 훔쳐보며 또 저 혼자의 푸념을 뇌까려보는 것이다. 칠 년 전 D시에서 목격한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윤 박사를 의심할 수 있었지만 윤 박사의 천연한 자세에서 영선은 일단 의혹심을 풀었으나, 그 후로는 왠지 윤 박사 자신이나 영선 자기가 서로 간격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서먹서먹해지기가 일쑤여서 되도록이면 맞닥뜨리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윤 박사의 장례식이 S대학 교정에서 거행되었을 때 영선은 분명코 D시의 미망인을 군중 속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슬프디슬픈 예식이 끝나고 영구가 마지막으로 유족들의 손에서 영구차로 옮겨지는 순간에 달려들 듯이 다가서는 그 여인을 영선은 무심코 보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 모인 사략들은 대개 학색이나 친구분들의 애절한 조사에 함께 눈물을 짜기 마련이어서 거기서 눈물을 홀린다거나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여인들을 눈여겨볼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 미망인이 통곡이나 할 듯이 허위적대며 영구 쪽으로 다가올 적에도 그 여인을 주목하는 시선은 아무데서고 없었던 것이다. 다만,
‘어쩜 저 이가 기어코 쫓아 올라왔구나.’
하고 영선만이 섬짓해서 그 여인에게 자주 눈을 보냈었는데, 과연 그 미망인은 슬픔과 울분을 ㅅᅟᅡᆷ키느라고 입술을 깨물면서 연신 손수건으로 샘솟듯하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관식이 집행될 때에도 그 여인은 대담히 교인들 틈에 끼어 서서 시종 흙 속을 지키고 있다가 영선이 잠깐 한눈을 판 새에 어디론지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았다.
‘지독히도 연연하던 사이던가 봐. 그 여인도 박복하지. 남편도 애인도 다 잃고 말다니…….’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윤 박사와 그 미망인은 부부관계를 가겼었고 그도 잠깐이 아닌 꽤 오랜 시일을 묻어두고 비밀히 생활해온 것이라고 영선은 단정했다. 그런들 그렇게도 형님은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인가. 워낙 윤 박사가 신중하니까 그럴 틈도 주지 않았겠지만 정 여사의 윤 박사를 신임하는 정도가 하늘같이 높은 탓도 있었으리라. 여인도 대담무쌍하기 이를데없었다. 장례식장에라고 또한 장지(舞地)라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을 텐데 당당히 인파 속에 섞여들다니, 그것은 대담성보다도 너무나 지극한 추모의 애정이 만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겠눈가!
“다 왔어. 이봐요! 왜 멀거니 앉아 있는 거야?”
상호가 뒤를 돌아보고 호통을 쳐서야 영선은 꿈에서 깬 듯이 몸을 움직여서 정 여사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렸다. 길에서 백 미터쯤 올라 걸으면 조망이 좋은 곳에 윤 박사의 유택이 있는 것이다. 애들 말대로 유택은 비단결같이 고운 잔디로 덮여 있었다.
모두의 배례가 끝나고 정 여사와 딸은 묘소의 앞뒤를 살펴 하나씩 섞인 잡풀을 뽑아내고 있었다. 윤 부장은 허리에 두 손을 꽂고 앞을 바라 망연히 서 있고 영선은 윤 박사의 묘비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맘속으로 탄식했다.
‘이 가족묘지의 용건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아주버님의 아지트를 습격할 일도 만무했고, 따라서 당신의 비밀은 영겁에 묻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이 묘지 때문에 내가 당신의 비밀을 영원히 나 혼자 간직하게 되어 나는 얼마나 다행 이겠어요?’
“그때 이건 참 자알 장만하셨죠. 아주머니께서 맘에 지피시는 영감(靈感)이 라도 발동하셨던 모양입니다.”
상호가 불쑥 돌아서며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때 정 여사가 D시에 장거리 전화까지 걸어 소란을 떨었던 덕분으로 다음해에 윤 박사는 평안히 이 좋은 자리에서 안치될 수 있었으나 또한 그것 때문에 자기의 비밀도 탄로되고 말았으니 세상의 일이란 묘하게도 어긋난다고 영선은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윤 박사의 비밀은 참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미망인 자신이 들추지 않는다면 영선은 정 여사에게나 남편인 상호에게나 윤 박사의 자녀들에게나 절대로 입을 열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이 혹 앞뒤 분별이 없는 경망한 여자라면 모른다. 또는 윤 박사가 아직 생존했더라면 혹시 모른다. 그러나 윤 박사는 비밀과 함께 이미 사라졌는데 정 여사나 그의 자녀들에게 무슨 이익된 점이 있다고 이 사실을 알려줄 것이란 말인가.
상호에게만은 다르다. 부부일신이라니 그에게 함구령만 내리면 알려도 무방하다. 또한 아내와 자녀같이 직계가 아니니까 윤 박사의 비밀이 직계에게처럼 직접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선은 상호에게는 더욱 그 사실을 폭로할 수 없었다. 상호도 남자다. 그 근엄한 형님이 그랬다는데 나 좀 어떠랴고 흉내내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구가 할 수 있을까.
‘허위덕이 재를 넘고 새침데기 골로 빠진다.’
는 속담대로 새침데기인 윤 박사는 그런 일이라도 저질렀지만 남편만은 그렇지 않다. 상과를 나온 탓으로 이때까지 은행으로만 돌다가 재작년에 부장이 되어 꽤 유혹이 있음직했건만 겉으로는 덜렁이 같으나 실속은 알찰뿐더러 입으로는 거침없이 외설을 내뱉어도 행동만은 결백하여서 영선은 은근히 남편에게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영선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남편인 상호는 그의 형님처럼 그런 큰 비밀을 깔고 앉을 위인이 못 되고 대뜸 드러낼 양성적인 성격이기에 영선은 남편에 대한 자신을 반석같이 굳히고 있으면서 오직 정 여사만을 동정하는 것이다. 그처럼 배신한 남편을, 생존했을 때도 고인이 된 후에도 한결같이 떠받드는 정 여사가 너무나 가엾어서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그러나 이런 영선을 정 여사를 가엾어하는 그 정도 못지 않게 은근히 가엾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아무도 아닌 바로 정 여사인 것이다.
삼 년 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정 여사는 작은아들과 함께 수석이 아름답고 수림이 짙은 계룡산에서 달포를 지낸 일이 있다. 차남이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겠다고 먼저 그곳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의 공기가 참으로 맑고 청신할 뿐 아니라 절의 경내도 유수하고 조용하니 어머님도 여기서 휴양을 하라는 간곡한 청원을 받고 내려갔던 것이다.
갑자기 돌아가버린 남편의 장례 후에 정 여사는 마음의 깊은 상처와 여러 가지의 뒤처리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집안의 기둥이 부러졌으니 그 허전하고 쓸쓸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지만 경제적인 타격도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맘은 언제나 슬픔에 잠겨 있는데 몸은 하냥 분망하기만 하여서 이래저래 정 여사의 건강은 날로 쇠잔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윤 박사의 소상이 지나고 대상을 앞둔 여름인지라 자녀들은 간절히 어머니의 전지(轉地) 휴양을 권유하던 차였고 정 여사는 그들의 뜻을 받아 계룡산으로 가서 아들이 주선해놓은 T산장의 특실에 기거하면서 맘껏 신선한 공기와 가려한 경개를 즐기고 있었다.
아들은 T산장 바로 곁, 수림 속에 자리잡은 여관의 한 방을 차지하고 공부를 하는 까닭에 하루 한번씩만 어머니와 만나고 있었다. 정 여사의 일과란 새벽에 일어나 절에 왕래하며 좌우측의 수림에서 발산하는 청결한 공기를 마시고, 천태만상으로 ㅎᅟᅳᆯ러내리는 계곡의 청량한 묵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물소리야 밤에 잠자리에서도 싫도록 듣는 것이지만 그 천태만상의 암석을 흐르면서 또한 기무하게 형태와 소리를 만들어내는 그 수석을 내려다보며 서서히 보행하는 그 순간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서 그런 모든 자연의 향연은 날마다 정 여사의 육체를 살찌게 해주었다.
한 삼주일쯤 지났을까 하는 어느 날 석양에 뜻밖에도 시아우인 상호가 아들을 따라 왔다. 휴가를 얻었는데 동창생들이 부장된 턱을 내라고 하여 유성 호텔에서 한바탕의 잔치를 치러주고 왔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동부인해서 올 일이지 어쩜 혼자만 오셨조그래?”
“아주머니두 딱하십니다. 아 사내들이 우르르 덤비는데 어떻게 그 틈에 낍니까?”
“동서를 일루 먼저 보내심 되잖아요? 부장님은 나중에 오시구요.”
“처음엔 속리산으로 갈 예정으로 유성에서 손님을 치렀는데 중도에서 변경된 셈이죠. 대전까지 오니까 블현듯 이리루 오고 싶더군요.”
“아무켠 잘 오셨어요. 이왕 오셨으니깐 며칠 푸욱 쉬어서 가세요. 수석이 여간 기묘한 게 아녜요.”
그들의 첫 대면의 담화는 이런 것이었다. 윤 부장은 잠깐이니까 아들과 한방에서 거처하겠다 하였다. 그는 오일간만 숙박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내일이면 윤 부장이 귀경하겠다는 밤이었다. 으슥해서 아들이 책을 들고 정 여사의 방으로 왔다. 아들이 어머니를 찾는 시간은 대개 점심 후 이지 밤에는 일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웬일이냐?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서 왔니?”
“저 오늘밤은 여기서 자구 가야 할까 봐요.”
“왜?”
“숙부님 친구들이 오셨어요.”
“몇 분이나?”
아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름어름하다가 푹 내밸듯 말했다.
“세 분요.”
“그래? 또 술타령 하시겠지?”
“네. 그렇기도 하지만 방이 비좁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로 가겠노라고 빠져 나왔어요.”
“잘했다. 실컷 책 읽다가 여기서 평안히 자렴.”
정 여사는 아들을 곁에 두고 잘 일이 대견해서 아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며 은근히 좋아했다. 워낙이 말수가 적은 아이이긴 하나 모처럼 모자 간의 대화도 있을 법하건만 아들은 침울한 얼굴로 잠잠히 책만 있다가 쓰러져 잤는지, 깜박 먼저 잠들었던 정 여사가 눈을 떠보고 다시금 아들의 배 위에 누비이불을 덮 어주었다.
다음날 새벽에 정 여사는 살그머니 일어나 일과대로 절에 올라가는 청신한 길을 걷고 있었다. 올라갈 때는 좌측이 계곡이어서 자연히 눈은 그쪽으로 향하게만 되는 것이다.
정 여사가 우연히 계곡 건너편에 시선을 던졌을 때 벌써 그쪽 수림 속을 거니는 한쌍의 남녀를 보게 되었다.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고 둔덕처럼 가늘게 뻗어 있는 그렇게 보이는 풀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멀리나마 딱 째인 체격이며 뒷모습이 눈에 익어 자세히 주목하고 가는데, 남자가 손을 들어 무엇을 설명하는 모양으로 후딱 머리를 돌리는데 보니까 영락없는 윤 부장이었다.
‘친구분들은 다 어떻게 하고 혼자 나왔을까? 저 여잔 또 누구며?’
윤 부장은 여자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앙마 어제 친구분들이 어디서 데리고 온 술집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들 하필이변 시아우가 왜 혼자 차지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정 여사의 발길은 자꾸 헛놓였다.
정 여사는 달리다시피 걸음을 빨리하여 물 위에 세워진 정자로 갔다. 앞질러 거기서 그들을 기다려 찬찬히 여인을 살피려 함이었다. 정 여사는 정자의 이쪽 기둥 뒤에 쪼그리고 앉아 완전히 몸을 숨겼다. 거기서는 좀더 가까이 그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들은 천천히 다가오고 여인의 얼굴과 모습이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정 여사는 여인을 보고 좀 놀랐다. 술집의 여인인 줄 알았더니 그런 티는 조금도 없이 아주 앳되고 세련되고 청순해 보여서 대학 막 졸업 했거나 아니면 대학의 재학생으로만 보였다.
‘하기야 오샌 요정의 기생들 중에 여대생들이 많다고들 하지 않던가?’
정 여사가 정찰하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태연히 지나갔다. 물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 음성도 탁하지 않고 맑은 것처럼 들은 듯도 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 여사가 날마다 돌고 있는 절의 경내를 건성견성 다녀서 산장으로 돌아오니까 아들은 벌써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얘. 어제 숙부님 친구들이 여자들도 데리고 왔었니?”
“왜요?”
그는 좀 당황해하면서 눈을 크게 떠 어머니를 마주 보며 되물었다.
“숙부님이 웬 여대생 같은 여잘 데리구 제곡 건너편 길을 거닐더라. 그 여자도 어제 왔었어?”
“글쎄요. 전 못 본 것 같은데요. 아마 나중에 왔나 보죠.”
“그럼 친구분들을 다 어쩌구?”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머리를 푹 숙여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아들의 표정과 말에서 정 여사는 직감적으로 어떤 기미를 알아챘다. 비록 자신에 대한 탐색에는 맹점이 있었지만 정 여사는 본래 눈치 빠르게 비밀 사건을 캐내는 데는 귀신같다는 이름을 얻고 있는 터였다.
“너 바른 대로 말해! 어젯밤에 그 젊은 여자가 네 방에서 숙부님과 동숙한 거지?”
“네?”
아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눈과 입이 한꺼번에 크게 열렸다.
“여관에선 행여 들킬까 봐 감쪽같이 네 방을 이용한 거 아냐?”
“원 어머니두…….”
“숙부도 딱하지. 하필이면 술집 여잘 데리구 네 공부방을 이용하다니 말이 되니?”
“술집 여자가 아녜요. 전부터 잘 아는 모양이던데요?”
“전부터 잘 알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람.”
정 여사의 눈앞에 정숙하고도 근실한 영선의 환한 얼굴이 아른댔다.
“어찌 되긴 뭐가 어찌 됩니까? 그러실 수도 있잖아요?”
“뭐가 어째? 어린 녀석이 좋은 것 본뜨겠네! 그러실 수도 있다니?”
“세상의 모든 남성이 다 아버님같이 그렇게 청백한 줄 알으셨다간 환멸을 느끼시게 됩니다. 그저 눈 딱 감고 입을 꼭 덮어두세요.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공부만 들이 파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언제 이런 엉뚱한 수작을 할 만큼 자랐나 싶어 정 여사는 아들의 제법 거무스름한 수염자리를 훔쳐보며 쓴 입맛만 다시는데 윤 부장이 번드레 윤이 나는 얼굴로 산장으로 왔다.
“아주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너 왜 어젯밤에 안 왔어? 친구들은 다 여관으로 가버리고 나 혼자 잤다.”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있을까. 아무 주저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 그 얼굴에 물이라도 뿌리고 싶도록 극도의 증오심이 끓어올라서 정 여사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외면했다.
“저 오늘은 올라가봐야겠습니다. 큰댁엔 어멈이 자주 들르는 모양이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잘 쉬시다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십시오.”
“조반은 어떻게?”
끝내 잠잠할 수도 없어서 정 여사는 겨우 그런 짤막한 말만 냈다. 형수의 변색된 표정을 전연 모를 리도 없건만 그는 어디까지나 태연하고 침착했다.
“전 벌써 거기서 들었습니다. 또 대전에 들러서 가야 하니까요. 그럼 편안히 계시다가 오십시오.”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봉투 하나를 따로 조카에게 주면서,
“약소하다만 어머님 휴양비에 보충해라.”
하고 그곳을 떠났다. 정 여사는 시아우의 당찬 체격과 훤칠한 뒤통수에서 문득 남편을 느꼈다. 뒷모습까지도 방불하건만 내용은 어찌 그다지도 천양지판인가. 형은 지나치도록 고고하고 청순한데 아우는 그 반대로 행동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정 여사는 어젯밤의 일로 미루어 윤 부장에게는 그런 종류의 여자 관계가 상당할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다만 윤 박사와 달리 성격이 다양하고 능청스러워서 꼬리를 잡히지 않았을 뿐이라는 단정을 내렸다.
‘우리 동서만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야.’
정 여사는 서울에 돌아와서도 영선에게는 절대의 비밀로 해두었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그 비슷한 눈치만 나타나도 동서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온순하고 너그러운 듯하면서도 죽은 최씨가 산 김씨 셋을 당해낸다는 최씨라 그런지 뚝심만은 꼭 가지고 있는데다가 남편의 외도 방면에는 심하리만큼 강한 질투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남편이 말로만 흥청거릴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이날까지 가정이 평온했을 것이다. 만일 열의 하나인 어떤 기미만 챈다 하더라도 동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갈 것이고 집안은 이내 뒤죽박죽이 되지 않겠는가. 차남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땅 속에 깊이깊이 묻어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문제는 자기 자신이다.
‘이 사실만은 나만이 알고 있는 영원한 비밀이어야 한다.’
그러자니 자연히 정 여사눈 동서를 측은히 여기게 되고 그 반면으로 그렇게도 깨끗하게 일생을 마친 남편에게 대한 추모의 정을 날이 갈수록 더욱 높직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 여사의 깊숙한 비밀을 까맣게 모르는 영선은 아직도 윤 박사의 비석에서 눈을 떼지 않고 또 한 번 맘속으로 뇌어보았다.
‘정말이지 우리 형님은 가엾으셔…….’
(1971년)
2016년 12월 1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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