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개별 심판(「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0~1022항)
심판의 기준은 ‘본성’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을 때 하느님 본성에 참여할 수 있어
믿음으로 변하는 본성에 따라 살 곳이 정해지는 것이 ‘심판’
콩나물 하나를 다듬더라도 그 다듬는 ‘기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실 때도 반드시 그 ‘기준’이 있을 것이고 심판의 공정성을 위해 그 기준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죽음 뒤에 받는 ‘개별 심판’(사심판) 때의 결정이나, 마지막 때 전체적으로 받는 ‘최후의 심판’(공심판) 때의 결정이 다를 수 없습니다. 개별 심판 때 천국이면 최후의 심판 때도 천국입니다. 다만 최후의 심판 때는 부활한 육체를 지니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만 다릅니다. 사심판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결정되고 공심판 후에는 천국과 지옥 둘만 남습니다.
교리서는 심판의 기준에 대해 “각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1021)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행실과 믿음’이 심판 기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행실은 있었으나 믿음은 없었습니다. 사실 행실보다 더 중요한 심판 기준은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잊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경계하며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도 말합니다.
독일 밤베르크 주립도서관 소장 ‘모든 인간들의 심판관’. 우리는 하느님 자녀임을 믿을 때 비로소 하느님 사랑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믿음으로 본성이 변하면, 그 본성대로 살 곳이 정해지는 것이 ‘심판’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인 오랜 명제는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행위는 흉내낼 수 있지만 믿음은 본성을 결정짓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것에 맞는 행위가 뒤를 따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버지를 사람으로 믿으면 자신도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믿으면 자신의 본성도 하느님이란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믿는 본성대로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1920년 어느 날, 인도에서 늑대에게 자란 두 여자아이 아말라와 카말라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인간에게 발견되어 인간의 생활 방식을 강요받았습니다. 그 스트레스로 동생은 1년 뒤, 언니는 10년 뒤 사망하였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데 사람의 행위를 강요하니 얼마나 그 스트레스가 컸을까요? 믿음을 먼저 바꿔주지 않고 행동만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를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의 믿음이 바뀔 수 없음을 알았다면 그 아이들을 늑대와 살게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같은 본성을 가진 것들 속에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겉모양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이라 믿느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같은 본성을 지닌 것들과 함께 사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살려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자신이 사람이라고만 믿고 사람처럼만 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피조물은 자신의 생존을 우선으로 행동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본성상 자신의 생존을 희생하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본성상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 부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나의 본성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어 하느님 자녀의 행동이 나오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자신을 하느님 자녀라 믿으면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구약의 십계명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고 새로운 계명도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믿으면 그 자녀의 본성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찾으면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려고 하는 걸음마를 멈출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원숭이가 인간 흉내를 낸다고 해서 인간이 되지는 않습니다. 본성은 노력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받습니다. 아말라, 카말라도 자신들의 본성이 늑대가 아니고 인간임을 믿게 되었다면 인간으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임을 믿을 때야만 비로소 하느님 사랑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변하는 것이 ‘본성’이고 그 본성대로 살 곳이 정해지는데, 이것이 ‘심판’입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08일자]
94. 천국(「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1029항)
천국의 기쁨은 관계에서 온다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공동체며 하느님과의 친교 완성되는 천국
불순종으로 이끄는 자아 버려야 사랑·기쁨·평화 맺을 수 있어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으로 가벼운 하이킹 등반을 떠났던 자신만만했던 청년 ‘아론 랠스톤’은 그만 호박돌을 잘못 짚었다가 돌과 함께 굴러떨어져 절벽 사이에 고립됩니다. 함께 굴러떨어진 호박돌에 오른손이 끼이게 된 것입니다. 다용도 칼로 자신의 팔을 짓누르는 돌을 긁어내 보지만, 칼만 무뎌질 뿐 돌은 그대로고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음식과 물 없이 5일(127시간)을 버팁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할 지경까지 가서야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일을 감행합니다. 바로 칼로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무뎌진 칼로 정신을 잃지 않으며 손을 잘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애인도 있고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어머니도 계십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팔을 자르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겠지만 자신 때문에 아파할 이들을 위해서 그 아픔을 감당해 보기로 합니다. 먼저 팔을 부러뜨린 다음 무딘 칼로 살과 힘줄을 자릅니다. 그리고 한쪽 팔을 남겨놓고 자신을 짓누르던 호박돌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팔을 자르고 기쁨의 함성을 올립니다. 그 지옥과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폰테바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게 천국 가는 길을 보여주는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 머물러도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천국의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에덴동산은 천국이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친교를 이룰 수 있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1028 참조)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1024)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가 완성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로 인한 불순종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불순종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2015) 천국의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살아 있는 자아가 또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자아를 끊어내고 다시 에덴동산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말씀의 칼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옥처럼 살다가 천국에 갑자기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과 이웃과의 온전한 친교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의 복된 공동체입니다.”(1026) 이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복된 친교의 완성은 마지막 때에서야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천국의 행복은 교회를 통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1025)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은 교회에 충만하고 교회의 성사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니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천국의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천국 시민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행복의 감정이 솟아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지는 것처럼(로마 5,5 참조) 기쁨과 평화 또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충고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 머물러도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라는 천국의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권고하십니다. 마음에 행복한 감정이 사라지고 있을 때 동시에 성령의 불도 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있다면 또한 자신과의 싸움도 격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성령으로 자신을 이긴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회복입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