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뒤에는 아마 물음표가 숨겨져 있을 겁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 - 아마 시적 화자가 원하는 - 은 누구도 하늘을 본 적이 없다. 겠지요. 뒤에 나오는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라는 구절로 의미가 한층 강화됩니다. 네. 누구도 하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적 화자의 말대로라면요. 시적 화자는 어디 있을까요? 시 안에 존재하진... 않는 것 같네요. 시 밖에서 3인칭으로 말하고 있죠.
밖에 나가면 하늘을 그냥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ellegarden의 노래 marry me에 나오는 가사처럼 It's a fine day I am wearing a blue shirts like the sky입니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가 말하려는 하늘이란 무엇이길래 넌 하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까요? 뭔가 또 말하겠죠. 봅시다.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하늘이 아니라, 맑은 하늘이 아닌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는 겁니다. 누가? 네가. 네가 라는 건 누군가... 일 수도 있지만 아마 여기서는 시를 읽는 독자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본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쇠항아리가 하늘이랍니다.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왔다는 거죠. 음. 하늘은 얼핏 보면 둥근 모양입니다. 둥근 것이 항아리와 닮긴 했죠. 왜 중세 국어에서도 천지인을 본떠 만든 모음, 그 중에서도 아래아는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떴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간 저번 연에 이어서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네가 본 것은 진정한 하늘이 아니라 쇠항아리 내지는 먹구름에 불과하다는 거죠.
시적 화자가 방금까지 했던 말 - 네가 본 것은 진정한 하늘이 아니다 - 에 공감하다면 당연히 다음 의문이 들겠죠. 진정한 하늘을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의문이. 시적 화자는 그 물음에 친절하게도 답을 줍니다. 이렇게 말이죠.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마음속의 구름을 닦고, 네 머리를 덮은 쇠항아리를 찢어버리라는 거죠. 음. 좋네요.
여기까지 읽고 불교의 선문답이 떠오르는 게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네요. 성철 큰스님이 남긴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제자들이 해석하기를 - 당시 제자들은 성철 스님의 상좌승이었고 지금은 각 사찰의 주지 스님이십니다 -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일 뿐이듯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긍정하라는 거죠.
그렇다면 먹구름은 특히 마음속의 구름은 욕심, 탐욕, 나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아크라시아 등을 의미할지도 모르지요. 마음의 수양을 통해 이런 나쁜 마음을 없애 버리자는 겁니다.
벼룩은 자기의 키 높이의 60배를 점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깨알만한 것이 말이죠. 대단해요. 우리들은 우리키의 만큼이나 뛸 수 있나요? 그러나 그 대단한 높이뛰기 선수인 벼룩을 작은 병에 가둬 뚜껑을 닫으면 그 높이만큼밖에 뛸 수 없다고 합니다.
한계가 생기는 거죠. 만들어진 한계가. 그렇다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선 뚜껑을 찢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을 가로막는 한계인 쇠뚜껑을 찢어버려야 합니다. 모 스포츠 브랜드의 슬로건처럼 임파서블 이즈 낫싱. 그걸 추구하자는 거죠.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마음속의 어두움을 닦아내고, 한계를 돌파하면 이런 경지를 얻게 되는 거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과 구원의 하늘을 보게 되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왜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말을 안하고 미소만 지어도 알아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을 깨닫게 되어 자신의 발걸음도 조심하게 되는 그런 경지가 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면 보통 수련가지고는 안되겠지요. 성철 스님의 말대로 수행에 용맹정진해야 말년에 이르러 겨우 얻게 되는 그런 성찰과 깨달음일 겁니다.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서러운 세상을 서럽게 살아가겠다는 시적 화자의 의지를 풍기면서 이 시는 마무리 됩니다. 마지막은 수마상관의 구조로 끝납니다.
결국 마음속의 어두움과 한계를 닦아내고 돌파하여 깨달음을 얻자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은 내적인 접근일 뿐이고 이 시의 작가가 신동엽이라는 걸 감안하고 당시 시대상을 본다면 또다른 접근과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그 해석이라는 것은 ...그냥 현대시 교재를 보세요.
에이브람스의 문학을 보는 4가지 관점 중에서 내재적인 관점 역시 있습니다. 먼저 시를 보고 이게 뭘지 고민한 다음 답을 보시면 좋습니다. 다가오는 것이 달라요. 고민을 해보고 안 해보고의 차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