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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 / 수잔 와이즈 바우어]
1 독서를 위한 첫 단계-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는 고전 교육
서른 살이 되던 해 나는 다시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시간 강사로 문학을 가르치고, 아이 넷을 기르느라고 학교를 떠나 있었다. 그런데 다시 강의실 교단 앞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학원생들은 하나같이 십 대 아이들 같아 보였다. 거기다 대학원 교과 과정은 성인을 염두에 두고 짜인 것이 아니다. 나만 해도 미국학 연구를 하면서 내게 맞춰진 스케줄에 우리 식구를 밀어 넣고 돈벌이가 좋은 다른 직업을 마다하고 연봉 6000달러로 근근히 살아가면서 대학에서 보조해 주는 기본형 의료 보험, 말하자면 출산 시 마취 정도만 보장하는 빈약한 혜택에 맞춰 지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다가올 수업 시간이 걱정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난 5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토론에서 방향을 잡는 역할을 했다. 나는 교수가 말해 주는 것을 가만히 앉아 받아적은 수동적인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아 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학원 수업은 다른 누군가의 지혜를 얌전하게 받아먹기만 하는 강의식 수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주 세 시간의 수업이 독학 과정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1년 6개월 동안 나는 도서 목록에 대한 안내를 받고 독서법을 조언받았다. 하지만 나는 고전을 혼자 공부할 작정이었다.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 나가면서 각 권의 내용을 요약하고 주장에 약점이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결론에 과장된 부분이 있는가? 빈약한 증명에서 도출되었는가?> 글쓴이가 사실을 무시하거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왜곡했는가? 어디에서 이론이 무너졌는가? 아주 흥미진진했다. 내 연봉의 80배를 받는 선배 학자의 논리를 깨부수는 일은 아주 고달픈 대학원 생활이ㅔ서 몇 안 되는 보상 가운데 하나였다.
독서는 모두 수업 준비용이었다. 수업 시간이면 대학원생들은 긴 탁자에 둘러앉아 그 주에 논의할 책에 대해서 소리 높여 토의했다. 담당 교수는 우리의 엉성한 추론 과정을 지적하고 부적절한 언어 사용에 대해 충고하고 이따금씩 타오르는 불길에 물을 끼얹었다. 이런 식의 다소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들은 집에서 혼자 하는 독서에 기반을 두었다. 대개 <엑스파일>을 시청하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며 보내던 저녁 시간에 나는 집중하여 필수 도서 목록을 헤치며 책을 읽었다. 집안 꼴은 형편없어지고 멀더가 유령 사냥을 하러 떠나는 광경을 놓치긴 했지만, 어느덧 나는 머릿속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 구조를 창조해 나가고 이론들 사이에 관련성을 만들어 내고 이론의 거미줄 위에 나만의 새로운 이론을 쌓아 가게 되었다. 좀 더 글을 잘 쓰고 명료하게 사고하는 폭넓게 책을 읽게 되었다.
게다가 과중한 노동으로 나는 정신 장애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논문을 끝내기 위해 밤늦게 까지 깨어 있고 아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거실 바닥의 장난감 기차 트랙에 갇힌 채 박사 논문 계획서를 작성했고, 전공 필수 프랑스어 시험 전날 밤은 식중독에 걸린 네 살배기 아이의 기저귀와 배갯잇을 빨면서 보냈고, 가치 있는 말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연구회 자리를 내내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여기 좋은 소식이 있다. 정신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대학원이라는 탈수기를 고통스레 통과할 필요는 없다. 채용 기회가 많지도 않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직업을 얻으려는 계획만 없다면 말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생의 빠듯한 생활비와 대학 의료 보험 정책에 굴복하지 않고도 읽고 쓰고, 친구들과 토의하며 학습해 왔다.
미국의 교육자 토머스 제퍼슨에게는 대학 강의가 오히려 역사책을 진지하게 읽어 나가는 데 불필요해 보였다. 1786년 제퍼슨은 대학생 조카에게 혼자서 공부를 해 보라는 편지를 썼다. 그런 다음에 과학 강의를 들으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과학 강의를 신청하고, 역사서는 너 혼자서 읽을 수 있단다. 역사 수업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도 있어. 책에서 얻어야만 한단다. 그러니까 네 스스로 해 본다면 역사 수업을 듣는 대신 다른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그러잖으면 낭비되었을 자투리 시간을 잘 쓸 수 있단다."
전문 역사가라면 이들이 보여 주는 명백한 피상적인 판단에 불쾌감을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제퍼슨의 편지는 당시 일반적이던 이해 방식을 보여 준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을 훈련하고 채우기 위해서 독학이라는 방법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라고는 책장 가득 꽂힌 책들과 독서한 내용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취미가 맞는 친구 한두 명 그리고 '그러잖으면 낭비되었을 자투리 시간'뿐이다. 대학 교육에 대한 현대 비평가라면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어차피 박사 학위란 반드시 정신을 훈련하고 채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해럴드 블룸이 알아챘듯이, 이것은 '대부분 잊어버린 대학 교육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이제 대학은 고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제퍼슨의 조카는 이런 식으로 교육에 있어서 특혜를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발전을 위해 혼자 공부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남성에 비해 학교 교육의 혜택을 훨씬 덜 받았던 18세기와 19세기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에게는 짧은 정규 교육만 허용되어 배움의 기회가 제한되었던 지난 두 세기 동안에 미국 여성은 일기와 비망록을 쓰며 독서한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서로 만나면서 자기 정신 계발을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 예법서 저자인 엘리자 파라는 예법서 독자뿐 아니라 지적인 수양을 쌓으려는 젊은 여성 독자에게 단호하게 조언했다. "독학은 학교 교육이 끝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수많은 여성이 파라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남북 전쟁 때 오하이오에 살았던 메리 윌슨 질크리스트는 스물넷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집에서만 지냈는데, 그녀는 오하이오 여자 대학에서 고작 1년 정도 교육받았을 뿐이었다. 질크리스트는 대학에서 삼각 측정법, 영문학, 프랑스어, 음악, 논리학, 수사학, 신학 등을 배웠지만, 이들 학문에 정통하기는 커녕 기초적인 토대를 이해할 만한 시간도 충분히 갖지 못했다. 하지만 질크리스트는 집에 돌아와서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읽은 책의 목록을 일기에 적었다. 샬럿 브론테,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헨리 필딩, 윌리엄 워즈워드, 베르길리우스, 소포클레스, 데이비드 흄, 그녀는 학습 동기를 계속 부여하기 위해서 이웃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기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메리 카펜터와 통화를 하면서 세익스피어를 함께 읽기로 했다." 남부 출신의 10대 호프 서머렐 챔벌레인은 여러 어려운 책 가운데 훔볼트의 <코스모스>, 밀턴의 <실낙원>, 드 스탈 부인의 <코린>, 프랑수아 기조의 <문명의 역사>에 대해서 자신의 독서 일기에 썼다. 그녀가 주도하여 만든 그 독서 모임은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굶주린 정신에 선사하는 평화"였다.
정신은 굶주려 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고 자신이 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책들 때문에 잔뜩 겁을 먹었으면 어찌하겠는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숙지하라."라고 아이작 와츠는 독학에 대해 쓴 <정신의 개선>에서 독자들에게 조언했다. "현재 자신의 지식 정도가 얼마나 얕고 불완전한지를 고통스러울 만큼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쾌활한 권고는 비난이 아니라 안심시키려는 의도이다. 잘 훈련받은 정신이란 타고난 천재와는 상관없는, 노력의 결과이다. 사려 깊은 사상가는 "총명한 천재와 능숙한 재치,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와츠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아무리 "얕고" 무지한 정신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학구적인 태도로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연습을 하면, 감각이 발달하고 이해력이 최고로 높아진다."
와츠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요즘도 지적이고 야망 있는 많은 성인들이 어떤 분야든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기에는 스스로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심도 있는 독서와 글쓰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평범한 교육의 결과를 극복해 보려고 고심한다. 하지만 와츠의 권고는 여전히 옳다. 교육이 아무리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지적으로 책 읽는 법과 독서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법, 발견한 내용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독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지속적이고 본격적인 독서는 고전을 혼자 공부하는 데서 중심이 된다. 아이작 와츠가 끊임없이 얘기하듯이 관찰과 독서, 대화와 강의 듣기는 모두 독학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관찰을 하면 주위 환경에서만 배우게 되고, 대화와 강의듣기는 가치 있지만 몇몇 주위 사람들의 견해에 제한적으로 노출되는 반면, 독서는 가장 중요한 자기 수양법이라고 와츠는 결론짓는다. 혼자 하는 독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모티머 애들러가 '위대한 대화'라고 불렀던 대화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상 사이의 대화 말이다. 독서는 우리를 언제 어디서든 이러한 위대한 대화로 이끈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진지한 독서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에도 그랬다. 게다가 요즘은 활자로부터 멀어져 영상에 기반한 시각 문화로 향하고 있는 현 세태를 우려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읽기와 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텔레비전과 영화에 인터넷까지 더하여 활자 언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활자 문화 이후로 옮겨 가는 중이다. 인쇄 문화는 종말을 맞이할 운명이다. 너무 슬픈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묵시록적인 성찰을 싫어한다. 스트리밍 기법으로 이루어지는 오락물의 폐해와는 별개로 독서가 예전보다 더 어려워지거나 더 쉬워진 것은 아니다. 1814년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평하듯이 말이다. "혁명 이후 세대인 젊은이들은 자네나 나보다 훨씬 행복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네. 그들은 어머니 배 속에서 모두 배워 기성화된 세계로 나오지. 책에 관한 정보는 더는 필요 없네. 천부적이지 않은 모든 지식은 멸시받거나 최소한 무시된다네."
제퍼슨이 현 단계의 지식 문화를 두고 내뱉는 탄식은, 독섲보다는 자기 표현을 찬미하는 철학의 부상에 대한 애도로 보인다.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도 집중을 요하는 독서는 어렵고 등한시되는 활동이었던 것이다.
사실 독서는 훈련이다.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거나 명상하거나 발성 연습하는 것과 비슷하다. 능력 있는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뒤뜰을 뛰어서 가로지를 수 있지만,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내미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마라톤에 무작정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생일 축하 노래나 찬송가를 그럭저럭 부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역의 예술 공연장으로 씩씩하게 걸어나가 <아이다>에서 주인공 역할을 마음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문이나 <타임>, 스티븐 킹을 쉽사리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 없이도 곧장 호메로스나 헨리 제임스로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휘청대거나 뒤죽박죽되거나 지치면 스스로 부적합하다고, 양서는 결코 읽을 수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사실 문학 공부를 하는 데는 책을 재미로 읽을 때와는 다른 숙련 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혼자서 양서 목록 전체를 읽어 나갈 수 없으며 이런 일에 파고들 수 없다고 해서 부적합한 정신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저 준비가 안될 것일 뿐이다. 리처드 포스터가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감명 깊게 주창하듯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 사상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포스터는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글자 읽는 법을 알기 때문에 공부하는 법을 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한 권의 책을 공부한다는 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다 초심자에게는 특히 그렇다. 테니스든 타자든 처음 배울 때에는 숙련해야 할 세부 사항들이 수천 개나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대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진행할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일단 능숙해지면 그 기구들은 제2의 본성이 되어 테니스 경기나 타자 치는 문서에 집중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연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세부 사항의 미로를 필요로 하는 엄밀한 기술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보통 본격적인 독서법과 공부하는 법을 훈련시키지 않는다. 중고등학교이 임무란 이른바 수능 시험 수준의 독해가 가능하고 신문과 스티븐 킹 정도를 수월하게 흡수하는 독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대학 교육은 신입생들에게 본격적인 독서법을 가르치며 기초적인 문자 해독 능력을 보충하고 발전시켜야 하지만, 대다수의 대학 4학년생들은 고교 3학년생보다 그다지 낫지 않다. 학생들은 종종 자기 능력이 보잘것없다고 느끼다 어느새 졸업을 맞이한다.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려면 책 읽기가 기적처럼 수월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호메로스는 여전히 장황하고, 플라톤은 여전히 뚫어 내기 불가능하며, 톰스토파드는 여전히 당혹스럽도록 제멋대로다. 그래서 그런 책들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확신하며 곧잘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독서의 방법만 보강하면 된다. 학교에서 독서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 시작하면 될 일이다. 고전적인 교육 방법은 독자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자기 개발서는 세상에 넘쳐난다. 그렇다면 고전 교육의 특장점은 무엇인가?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어떤 책은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켜 버리고, 어떤 책은 잘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서투른 치료는 병보다 나쁘다." "아는 것이 힘이다." 등 인상적인 명언을 만드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던 베이컨은 모든 책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받을 만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베이컨이 묘사한 이해의 세 단계인 맛보기, 삼키기, 소화하기는 그가 고전 교육법에 친숙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전적인 인문학 교육 기관에서 공부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맛보기'는 학습 주제에 간한 기본 지식 획득하기이다. 두 번째 '삼키기'는 지식의 평가를 통해서 스스로 이해하기이다. 이 지식은 타당한가? 사실일까? 이유는? 세 번째는 '소화하기'로, 주제를 자신만의 이해 방식 속에 접어 넣는 것이다. 여기서는 생각의 통로가 바뀌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맛보기, 삼키기, 소화하기는 사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평가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베이컨처럼 고전적인 교사는 학습의 일반적으로 3학과라고 알려진 세 단계(문법, 논리, 수사)로 나눈다. 교육의 첫 단계는 문법 단계이다. 이 경우 '문법'이란 각각의 학문 주제에 대한 기초 지식의 벽돌을 쌓은다는 의미이다. 어린 초등학생들은 무조건 정보를 받아들이라고 교육받는다. 평가하지 말고 그저 배우라고 말이다. 암기와 반복은 가장 초보적인 학습법이다. 아이들은 일련의 지식에 친숙해지면 되고, 지식을 분석할 의무는 없다. 비판적인 사고는 교육의 두 번째 단계, 즉 논리(혹은 변증법) 단계에서 일어난다. 일단 기초적인 정보가 쌓이면 학생들은 분석 기술을 배운다. 학생들은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결정하고 원인과 결과, 역사적 사건, 과학적 현상, 언어 그리고 의미 사이의 관련성을 구축한다. 중고등 교육의 마지막 단계인 수사 단계에서 학생들은 지금까지 쌓아 올리고 평가한 사실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을 표현하도록 배운다. 그래서 교육의 최종 시기를 거치는 동안 우아하고 명료한 글과 말, 즉 수사 연구로 의견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고전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사실을 배우고 익힌 내용을 분석하고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후 모든 학습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고전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세 가지로 나눈 단계를 독서에도 적용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첫 번째 독서를 하면서 분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책에 대해 평가하려면 먼저 책의 중심적인 생각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 평가를 마친 "이 생각이 정확하게 제시되었는가? 결론은 타당한가?"를 물어본 다음에 최후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의하는가 혹은 아닌가? 이유는 무엇인가?
교실에서는 처음 두 단계를 건너뛰어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수많은 초등학교 교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뭔가를 제대로 배우는 기회를 가지기 훨씬 이전부터 여섯 살배기 아이들에게 내용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끈질기게 물어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질러가는 사고가 습관이 되어 학습 중인 주제를 이해하기도 전에 의견부터 내세울 태세인 사람들도 허다하다(시청자 전화 참가 라디오 방송이라면 아무거나 청취해 보기 바란다).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수사 단계로 곧장 건너뛰는 버릇을 갖게 되면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결론을 이끌어 낼 태세로 플라톤이나 세익스피어, 토마스 하디에게 다가간 정신의 소유자는 그들의 밀도 높은 관념에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독서 과정에 성공적으로 돌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관념을 이해하고 난 다음 평가하고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의견을 정립하는 과정을 토앻 그것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엉터리로 배운 여섯 살배기 아이처럼 이해하고 평가하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견해를 만드는 과정으로 직행하려는 성급함 때문에 우리는 실패한다. 영국의 추리 소설가 도로시 L. 세이어스는 옥스퍼드에서 했던 연설에서 20세기 고전 교육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면서 옛날식 '학습도구들'이 망실된 것에 대해서 애도했다.
"오늘날 문자 해독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사람들도 자연스레 광고와 대량 선전물의 영향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례없이 민감해졌으리라는 사실이 기이하다거나 불운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없습니까?....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음직한 성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토론 중에 평균적인 수준의 토론자들이 질문을 던지거나 상대방 토론자의 주장을 논박하는 데 기막힐 정도로 무지한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 만큼 초조해진 적이 없습니까?.... 이걸 생각해 볼 때 그리고 공적인 업무 대부분이 토론과 회의를 통해 처리되는 것을 생각할 때 무언가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육의 엄청난 결함, 즉 제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난처한 불안 증세를 통틀어 거슬러 올라갈 때 원인으로 나타나는 결함은, 제자들에게 '학과목'은 종종 제대로 가르치지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는 유감스럽게도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사실 그리고 아이들은 오로지 학습하는 방법만 제외하고 모두 학습했다는 사실 아닌가요?"
문법과 논리, 수사는 정신을 훈련시키는 학습 방법이다. 지식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주장이 타당하지 평가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우아하고도 명료하게 제시하는 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주장하는 법은 당장이라도 배울 수 있다. 유망한 단 한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중세의 가정교사처럼, 이 책이 독자 개개인을 고전 교육 단계로 이끌고 가서 훈련시켜 줄 것이고, 그러면 여러분은 책에 대한 본격적인 사색에서 좌절보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떻게 시작할까?
스스로 정신을 훈련시키는 목표에 돌입하는 우리에게 과거에 혼자 공부했던 이들이 제공해 주는 한두 가지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빠듯하게 추진하면서 정신을 바쁘게 만들지 말라"고 아이작 와츠는 충고한다. "특히 서로 아무 연관성도 없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이해하는 데 혼란스러워지면서 어떤 하나의 주제로 완벽에 이르지 못한다." 느리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한 번에 한 과목만 공부해야 한다. 이 책으로 시작하기 바란다. 읽고 분석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이 책이 철저하게 안내해 줄 것이다. 제대로 마칠 때까지 이 공부에만 몰두한다. 일단 이해(문법)와 평가(논리), 의견 표현(수사) 단계를 통과하여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이후 2부의 독서 목록으로 넘어간다. 이들 목록은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다. 목록에 오른 책들을 순서대로 읽으면 한 번에 하나의 탐구 분야(소설, 자서전, 역사)에만 몰두하는 셈이 되며, 이전 독서가 다음 책의 하부 구조를 세워 주고, 이후의 독서는 이전의 내용을 보강하고 명료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한 번에 하나의 목록에만 집중한다. 고전을 혼자 공부하는 동안에는,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젊은 시절 탐닉했던 독서법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는 만년에, 광범위하고 인상적이지만 체계 없이 게걸스레 책들을 집어삼키는 독서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 같은" 정신만을 남겨 놓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주제든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제퍼슨은 조카에게 연대순으로 체계적인 독서를 하라고 충고했다. 달리 말하면 씌어진 순서대로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19세기의 교육자 리디아 시고니도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점에 동의했다. 시고니는 항상 '연대기'에 기반한 독서를 권장했다. "어떤 중요한 시대, 가령 한 제국의 파멸을 기억해 두고서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것은 좋은 연습이다. 세계사를 구석구석 이어 주는 몇 개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지식의 별자리가 형성되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될 것이다."
이 책에서 추천하는 도서 목록들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어떤 분야의 기초가 되는 작품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읽어 나간다면 그 주제를 파악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언제 읽을까?
리디아 시고니는 체계적인 독서가 여성에게 특히 필요하다고 "젊은 여성들"에게 경고한다. "사소한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느라 너무 머뭇거리기 때문에 지적인 입맛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자가 되자. 이것은 남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일들로 쉴 틈 없이 바쁘다. 집안일과 공과금 납부, 서류 작업, 아이들과 가족, 식사 준비와 소비재 구매, 이메일뿐 아니라 늦은 밤 텔레비전의 엄존하는 유혹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자잘한 용무 말이다. 스스로 정학 독서 계획을 지키기 위한 사투는 종종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고 설거지를 끝내고서 이런 생각에 빠지면서 패배하게 된다. '난 하루 종일 일했어. 몇 분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있어도 돼.' 어느덧 세 시간이 흐르면, 한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자주 들르는 웹사이트 두어 개를 일별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주방까지 깨끗하게 정리한 상태가 된다.
현대 사회의 타락에 대한 묵시록적인 선고는 되도록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다. 현대적인 매체와 오랜 인고를 요하는 책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여유 시간 속으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자투리 시간'을 단숨에 삼켜 버리는 방식에 있다. 나라고 해서 플라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가 한두 시간 후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메일에 답해 주기로 했던 시간이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는 식으로 말할 위인은 아니지만, 나도 종종 독서에 바치기로 했던 시간을 스팸 메일 처리와 링크 확인, 더 형편없게는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고 날려 버리곤 한다.
정신적 삶에 관한 고차원적인 언어는 어떤 점에서, 자기 계발을 위한 실용적인 계획에 특권을 넘겨주어야 한다. 문법과 글쓰기, 논리와 분석, 추론에 정통하려면 이것들이 살아 나갈 여분의 정신적 공간을 깎아 내는 일을 해야 한다. 고전을 혼자 공부하는 것의 첫 번째 과제는 플라톤식 독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를 활동이 아닌 사상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줄 30분의 자투리 시간을 찾아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