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중동골목 술꾼들에게
실컷 두둘겨맞은 자판기 하나
찌그러든 허리춤을 움켜잡으며
절름발이마냥 구부정하게 서있다
그 동네에서 자판기는 꼭,
항구마다 길떠나는 사내들에게
순순히 품을 내주는 늙은 과부였다
반편생 가난에게 머리채 잡혀
기지배처럼 우는 사내들에게
늙은 여자는 단돈 300원으로
빗장뼈를 열어
종이컵가득 따뜻한 젖을 내주었다
홀짝홀짝 젖을 받아먹다가도
밤이면 술에 취해
세상을 향해 내뻗지 못한 주먹을
늙은 여자에게 퍼붓는 사내들
그럴때면
말없이 그 주먹을 다 받곤
다시금 젖을 물려주는,
자판기의 사랑을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오늘도 상처받은 것들은
가슴을 데우려 모여들고
어사오라며
밤새 가로등마냥 불 밝히고 서있는
저 자판기 하나
<차상>
밤송이(안양예술고등학교 공혜미)
티브이 화면 속, 긴 장대 휘두르는 남자
하늘을 점점이 물들이는 밤송이 따러
남자가 양팔 휘저으며 펄쩍펄쩍 뛴다
높다, 간절한 것은 언제나 우듬지에 있다
가장 잘 익은 밤은 저 끝에 있을 거라고
몽둥이로 밤나무를 후려친다
가을 끝자락, 이제 만성이 다 되어
묵묵히 몰매질 받아내는 밤나무
남자 팔뚝에 선명한 힘줄 설 때마다
겉잎과 속잎 사이 숨겨논 눈물 떨어진다
이미 반쯤 썩고 문드러진 밤송이를
발로 비비며 웃는 남자와 사람들
끝내 우듬지에 남겨진 밤송이 클로즈업,
그 가시 돋힌 오기 하나
내 안에도 끈질기게 매달려있다
<차상>
자동판매기(과천고등학교 권순호)
어머니는 자동판매기
파는 메뉴들은
옷, 용돈, 차비, 핸드폰, 컴퓨터 등
없는 것이 없다
동전 구멍으로 용돈을 달라 소리치면
빨간 불이 들어오고 난 버튼을 눌러
밑에 떨어진 용돈만 가지고 돌아선다
그렇게 자동판매기이신 어머니는
18년 동안 내 뒷모습만 바라보셨다
그러다 그 자동판매기가 고장났던 날
어머니는 수리공이 아닌 나를 찾으셨다
자동판매기 앞에 가만히 서니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흉터가 많았다
문득 저 구석진 곳에 불빛이 보였다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던 그 불빛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나를 기다려왔을 자동판매기
이젠 내가 좁다란 동전 구멍을 넓혀
내 마음 속 잠들어 있던
단어들을 집어 넣어야겠다
<차하>
자동판매기(숭의여자고등학교 김미화)
주렁주렁 감들이
붉은 석양처럼 익어가는 마을
멀리 바다건너 왔다던
번득이는 빠알간 자판기 하나
마을 한자락에 불쑥 솟아있다
거무튀튀한 사내들
평생 제 몸 태우며 모은 피와 땀
자판기는 낼름 받아먹는다
그녀들은 아직 따지 않은 캔
버튼을 누를때 마다 튀어 나오는
'베트남, 방글라데시, 네팔, 칠레'처녀
몸 안 가득 탄산 품은 캔
사내는 안고간다 업고간다
그녀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를
스프링같은 존재
오후의 노란햇살 부숴뜨리는
빠알간 자판기 위로
'베트남처녀와 결혼 하세요!'
현수막이 가을바람에 펄럭인다
<차하>
밤송이
-햇밤, 추석에 즈음하여(양서고등학교 박정수)
저렇게나 환한데 불을 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 속에
아슬히 숨어진 피의 길들이여, 이제는 눈을 감자.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오랜 스승의 편지가 휩쓸려가고 잠시 그를 잊었다
햇살이 속삭였다 친구처럼.
나는 잔잔한 물살을 지어낸다.
하늘은 아득해만 가는데
마음에서 종소리가 으깨어졌다. 멀어지는 연인의 기침소리가 비실거렸다.
나는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다.
벗긴다.
벗겨진다.
저렇게나 환한데 불을 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선생님, 저는 당신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차하>
또다른 시작의 자판기(진명여자고등학교 최라빈)
매일 똑같은 길을 걸으며
매일 똑같은 자판기 앞에서
매일 똑같은 음료를 선택한다
다른건 생각도 않는다
1초의 고민도 없다
나의 손이 가는곳은 언제나 그 버튼
다른건 생각도 않는다
앞으로 가는 걸까
맴맴도는 걸까
종잡을 수 없다
맴맴도는 거라면
나의 폐에 새로운 공기를 넣어보자
앞으로 가는 거라면
좀더 활짝 미소지어보자
이별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있듯…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다
달라진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새로운 자판기
선택을 향한 나의 손이 멈춘다
새로운 만남
맴맴도는 거라면
잠시 쉬어보자
앞으로 가는 거라면
활짝 미소지어보자
똑같은 음료를 선택한 나
하지만 다르다
불리어지는건 같아도
다른 만남
또 다른 시작
또 다른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