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석원 한양대 교수·중국문화전공
엊그제 일식(日蝕)이 있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식을 두고 어른들은 '불개(火犬·화견)가 해를 잡아먹었다'고 했다. 만약 백년 전까지만 해도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했다면 단 한 가지의 답이 나왔을 것이다. '하늘'이다. 옛날에는 모든 현상을 '천의(天意·하늘의 뜻)'로 여겼던 까닭이다. 그만큼 하늘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놈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흔히 듣는 말이었다.
천자(天子) 역시 '하늘의 아들'에 불과했으니 그도 하늘은 그야말로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 어떤 천자도 하늘 앞에 당당했던 자는 없었으며 천하를 손에 쥐어 기고만장했던 진시황조차도 하늘 앞에서는 사시나무 떨 듯 떨어야 했다. 그러니 일반 백성이야 오죽했겠는가?
천자가 하늘을 두려워했던 것은 간단하다. 삼라만상 모든 현상은 하늘이 지배하며 제왕은 단지 하늘의 명(命)을 받아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믿은 까닭이다. 이른바 '왕권천수설(王權天授說)'이다. 쉽게 말해 하늘이 오너라면 천자는 CEO인 셈. 경영권을 위임받은 CEO는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하늘 역시 천자를 평가하는데 잘못하면 '천의'를 조짐(兆朕)으로 내렸다. 일종의 고과표(考課表)인 셈이다.
그 고과표에 지진·가뭄·일식 따위가 있었다. 특히 가뭄은 민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긴장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뭄이 몇달 지속되어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지기라도 하면 농심(農心)부터 타들어간다. 당연히 제왕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되어 즉시 '내 탓이오!' 하고는 대응책을 마련한다.
우리의 경우를 보자. 평소 소의간식(宵衣�d食·새벽에 일어나 일하고 저녁 늦게서야 식사를 함. 곧 정사에 부지런함)했던 세종대왕은 18일간이나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등 전전긍긍했는가 하면, 태종은 제왕의 존엄에도 불구하고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우민정신(憂民精神)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천의는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노한 하늘'에 '잘못했나이다' 하고 빌어야 했다. 좀 어려운 말로 양재(禳災·재앙을 물리침)다. 여기에는 몇 가지가 있다. 기우제(祈雨祭)는 대표적인 경우며 일식 때 행했던 '구식(救蝕)', 지진 때의 '벽괴제(�J怪祭)'가 그렇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먼저 제왕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었으니 이를 공구수성(恐懼修省)이라 했다.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부덕을 통감하면서 덕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피전감선(避殿減膳·임금이 근신의 뜻으로 궁전을 피하여 묵고 음식의 가짓수를 줄임)과 철주금렵(輟酒禁獵·술을 금하고 사냥 따위의 유락을 삼감)하며 심지어는 궁녀를 윤번제로 입시(入侍)토록 하는가 하면 때로 환속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다음에는 시정(施政)에 대한 반성이다. 혹 억울한 사람은 없었는지 또 부세가 과중하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이어 사면과 감세조치가 따랐다. 이 모든 것이 다양한 양재의 하나였다.
그런데 하늘이 '천의'라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늘은 화가 나서 천명(天命)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이 같은 기미(機微)를 재빨리 눈치 채고 하늘의 명을 뒤집어 놓는 것이 '혁명(革命)'이다. 곧 '천명을 완전히 뜯어고친다'는 뜻이다. 물론 이번에도 하늘은 직접 나서지 않는다. 민심을 움직여 백성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민란(民亂)이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지금 같은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어디 '하늘'이 있겠는가. 하지만 민심을 거역하고 지탱할 수 있었던 천자는 일찍이 없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그만큼 민심은 무서운 것이다.
요즘 정치판의 싸움이 가관이다. 정치인들 이번 일식에 양재라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하는 수 없다. 선거라는 혁명으로 갈아치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