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11.中共軍의 介入과 1次 攻勢
■ 한편,
1950年 10月 下旬,
아군은 全 戰線에 걸쳐 빠르게 國境을 향해 北進하고 있었는데
10月 25日 西`北部地方에 進擊 中이던 韓國 軍 第 1 師團 第 15 聯隊는
師團의 先峰으로써 청천강을 넘어 운산 바로 북쪽 전투에서
중공군 1명을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근처에 中共軍 2萬 餘 名이 있다고 진술하여 1 師團長 白 將軍은
美 8 軍에 大規模의 中共軍 介入 情報를 알렸으나 이를 믿지 않았다.
■ 같은 날,
國 軍 第 6 師團이
청천강上流에 있는
"운산"에서 中共軍에 포위되었고, 이를 救援하기 위해 투입된 美 第 1 騎兵師團도 그달 26日에 포위되어 苦戰하였다.
■ 10月25日~11月 3日까지의 이 운산지구 전투에서 中共軍의 參戰이 公式的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美 8 軍은 진격작전을 中止하고 美軍은 청천강의 남쪽까지 後退할 것을 命하였으나.
제7연대는
진출로가 중공군의 공격 경로와 엇갈렸던 관계로 北進을 계속하여 10月 26日에는
國軍 第2 軍團 예하 第6 師團은
이미 중공군의 배치선을 넘어
진격작전을 속행함으로써
북한군 제40사단 소속의 혼성병력
3,000여명이 저항하는 저지선을 돌파하여
先頭인 7聯隊 수색소대는 國境地域인 초산의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부른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때 이미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힌 상태였고 바로 사단본부에서 "포위됐으니 무조건 철수하라"는 연락이 왔다.
■ 이 시간에 뒤 따르던 제 2연대가 퇴로를 차단당해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포위망에 갇힌 7연대 역시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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