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소평은 첫번째 도전에서 '國民說得(인민설득)' 이라는 正攻法을 택했다.즉 고양이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힌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의 얘기다.그의 이같은
발언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인민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수 있는 것이 좋은 정치임을 說破한 것이다.
여기서 인민을 잘살수 있게 하지 못하는 정치는 이미 좋은 정치가 아니 라는 그의 소신을 엿볼수 있는
것이다.그의 다음번 도전은 保守派의 거두이며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陳雲(진운)을 공략하는 일이다.
진운은 중국 공산당의 원로로 중앙지휘부 내에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는 만만치 않는 거목이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등소평이 추진하려는 개혁개방정책이 강한 집단적 抵抗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진운은 소련공산당의 해체와 연방의 붕괴 같은 異變이 중국에서도 일어 날수 있다는 疑懼心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진운은 체제수호를 위하여 등소평을 적극 牽制할수 밖에 없었다.자칫하면 당의
중앙지도부 내에서 大大的인 권력투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一觸卽發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막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지닌 등소평이 반드시 强攻으로 나올 것이란 것이 보수파들의 판단
이었다.
2, 1992년 2월 초순은 중국의 春節(설날) 연휴로 인하여 중국 전역에서 官民 모두가 일손을 놓고
쉬고 있을 때였다.이러한 기간중에 소수의 側近만 거느린 등소평이 진운의 아성인 上海로 조용히
잠입했다.이러한 意外的 등소평의 行脚은 진운의 虛를 찌른 것이다.그러나 등소평은 진운에 몸을
낮추고 宥和的인 제스처로 조용히 접근한 것이다.4일동안 2번 열린 兩者會談에서 두사람 사이에
信賴가 구축되고 드디어 劇的인 大妥協이 이루워진 것이다.결국 보수와 혁신 세력간의 갈등은
아무탈 없이 등소평의 승리로 끝이났고,그의 개혁개방 정책도 거침없이 巡航길에 오르게 된다.
그들은 보수와 개혁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대타협을 이루워 냈다.우리 처럼
黨利黨略에 만 집착하여 패거리들 끼리 泥田鬪狗나 하는 한국 정치현실이 많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명박이나 그네의 경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는 민주공화국
임에도 국가나 국민들보다 패거리와 자신들의 이권 챙기기에 바뿌다.즉 대인배는 못되어도 소인
배 작태를 이제는 거두웠으면 한다.
3, 객가인 등소평은 '급할수록 돌아가라' 는 속담대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
'붉은 자본주의 시범사업'은 정치적 도시인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먼저 광동성 深玔(심천)을 포함한 한정된 몇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여 외국 자본을 끌어
들이고 공장을 건설하는 일을 착수한 것이다.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먼지역을 巡訪하면서 사업
의 進陟 상황을 직접 점검하고 지방관리들 및 지역주민의 의견과 여론을 청취하였다.고령의 최고
지도자가 열정적으로 모든 일을 직접 챙기고 현장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감히 누가 게으름을 피우
고 딴맘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현 중국의 '붉은 자본주의' 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등소평의
開發戰略은 한국의 開發獨裁 방식을 모델로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한국의 浦項製鐵이 너무
부럽고 탐이 난 나머지,일본의 新日本제철 측에 '중국에도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만들어 줄수
없겠느냐' 고 심각한 어조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그랬더니 신일본 제철측에서 '글쎄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중국에는 朴泰俊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렵겠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4, 그랬더니만 등소평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 참,박태준을 중국으로 데려 올수도 없
고.....' 라며 중얼거렸다고 한다.이후 등소평은 천안문 사건을 무력으로 無慈悲하게 진압했으며
그 와중에 수천명의 死傷者를 내게한 장본인 이지만,지금은 중국에는 모택동 다음가는 큰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이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키려는 자가 바로 현재의 시진핑(국가주석,군사위원회
주석)이다.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지만 客家人 얘기로 다시 돌아가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
한 화교중에 객가인 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을 보자,
' 우선 싱가포르의 前 수상 이광요(李光耀)를 들수가 있다.그는 영국의 케임부리지 대학에 유학한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인데,1954년에 인민행동당을 창설하고 서기장에 취임하여 對英 독립교섭에
참여하는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1959년에는 英聯邦 내의 싱가포르 자치령의
수상이 되었고,1963년에 말레이지아가 연방으로 독립하자 싱가포르 自治州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다 1965년에 말레이지아 연방에서 탈퇴하고는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면서 마침내 싱가포르
공화국의 수상자리에 오르게 되었다.싱가포르 경제는 원래 中繼貿易을 주축으로 하는 상업활동과
금융,운수,보험등의 서비스 업에 의존하고 있다.그러나 1965년 독립한 후반부터 이광요 수상의
적극적인 공업화정책과 多國籍企業을 대상으로 한 外資導入 촉진으로 크게 발전 하였다.이러한
성공은 石油精製,造船,전자,전기기계 공업등의 분야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이어 추진한 관광
자원화 정책이 결실을 맺어 매년 관광객수가 300만을 웃돌고 10억불 이상의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5, 이광요를 독재자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30년 넘게 장기집권 하면서 싱가포르를 일류
국가로 만들어 놓았다.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수상인 오작동(吳作棟) 역시 客家 출신이다.
그리고 이광요 전수상의 아들인 이현룡(李顯龍)이 현재 부수상직을 맡고 있다.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지만 객가인을 조상으로 둔 華僑 집안에서 대를 이어 정권을 掌握하고 있는 셈이다.5백
만 싱가포르 인구중 78%가 중국계이다고,이중에 객가인은 18 만명 쯤 된다고 한다.싱가포르에는
이광요 전수상 이외에 胡文虎(호문호)라는 객가 출신의 기업가가 있다.그가 바로 그 유명한
'타이거 밤' 이란 膏藥으로 부자가 된 사람인데,자신이 객가인 임을 드러내놓고 자랑할 정도로
자긍심이 강하다.그의 회사제품인 '타이거 밤' 은 효능이 좋아서 싱가포를 찾는 관광객들 에게도
널리 일려져 애용되고 있고,우리에게는 '호랑이 코기름 연고' 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