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佔畢齋),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김숙자(金淑滋)의 아들로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431년 6월 밀양부 서쪽 대동리(大同里)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숙자는 선산에 은거한 길재(吉再, 1353~1419)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 정몽주 -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으며, 김종직 또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은거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출사의 길로 나섰다. 1446년 과거에 낙제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1453년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창녕 조씨(曺氏)와 초례(醮禮)를 올렸다. 1456년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낙향을 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무렵 그의 인품과 학문에 감화를 받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459년의 연보에 ‘선생은 사문(斯文)을 진작시키고 후인(後人)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쇄소(灑掃)의 예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제자들이 앞에 가득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1459년 형의 권유로 문과(文科)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한 김종직은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藝文)을 겸하게 할 적에는 형 김종석(金宗碩)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서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종직은 수찬(修撰)에 선발되었다. 이후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하였고,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나가게 되었다. 1471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발견했다. 김종직은 “그 따위 자광(子光)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은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이곳에 올랐다는 구전(口傳)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함양 사근산성(咸陽沙斤山城:사적 152)이 함락되면서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 군수(郡守)인 정무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원래 조선시대 객사(客舍) 자리인 지금의 함양초등학교 안에서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다가 1979년 이곳으로 이전·복원했다.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에 걸린 유자광(柳子光)의 현판을 철거한 것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2층 누각이며 넓이는 93.2㎡(28.18평)이다. 주심포양식이며 자연석 주초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함양군청 앞 도로변에 연관된 건물 하나 없이 홀로 자리잡고 있는데, 건물 왼쪽과 뒤쪽에는 민가가 있으며 전면은 도로와 인접해 있고 주변은 보호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함양초등학교에는 김종직이 학사루 앞에 심었다는 느티나무(천연기념물 407)가 있다.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參校)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