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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須墓
위치 ; 애월읍 고성리 산124번지 산새미오름(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 애월읍 유수암리 1836'으로 잘못 나와 있다.)
시대 ; 고려
유형 ; 옛 무덤
문화재 지정사항 ; 2005년 10월 5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1100도로 서쪽으로 1994년 만들어진 제1산록도로 들어서서 4Km 쯤 되는 곳에 산심오름이 있는데 오름 바로 밑에 꽤 넓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삼별초의 항쟁 때 관군 金須 엠파스 한국학지식에는 다음과 같이 김수 장군을 소개하고 있다.〈생몰연대 ; ?~1271(원종 12). 고려의 문신. 본관은 광산. 사공(司空) 길(吉)의 후손이며 담략이 뛰어났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를 거쳐, 1271년 영암부사(靈巖副使)로 출보(出補)되었다. 이 해 진도에서 패몰한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이 제주로 들어가 계속 저항하자, 안찰사 권단(權□)의 명에 의하여 2백명의 관군을 지휘하여 제주를 지켰으나 패하여 전사하였다.〉 삼별초가 먼저 제주도에 들어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장군이 진을 쳤던 곳이라고 해서 '김수못'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항바드리 토성이 있고 산으로 오르면 붉은오름이 있다. 삼신오름 북녘 등성이는 장군대좌형이라고 해서 많은 묘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묘들 중 맨 위쪽에 김수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있다. 주위의 모든 묘가 용묘임에 비하여 이 묘 하나만 방묘(方墓, 사각형 묘)로 되어 있으며, 오랜 풍상을 말해 주듯 잘 다듬어 세운 돌은 거의 흙 속에 묻히다시피 하여 20cm쯤만 보이고 봉분은 거의 평지처럼 납작해져 있다.
산새미오름방묘는 현무암제 판석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으로 테두리를 만든 후 봉토를 한 방묘 형식이다. 반지상식 또는 반지하식의 구조로 판단되며, 무덤의 형태로 보아 우리나라 내륙 지방의 무덤과 유사하다. 이 유적은 현재 봉분이 삭평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무암 판석(20매)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만든 분묘다. 석곽의 규모는 480×290㎝ 정도로 제주도 내에서 가장 크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현무암 판석을 깊이 세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은 현무암 판석 20매를 이용하여 전면 5매, 후면 4매, 좌측면 7매, 우측면 4매로 직사각형으로 축조하였다. 특히, 전면에는 120㎝ 정도의 긴 판석을 이용하였다. 석곽의 길이가 480cm로, 도내 방형 석곽묘 가운데 가장 길다. 봉토가 함몰돼 평삭돼 있으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무신 정권 몰락 후 고려는 왕정복고를 이루면서 개경 환도를 단행했지만 삼별초는 계속적인 대몽 항쟁을 내세워 새로운 정부를 건립하였으며 진도로 남하하여 용장산성을 구축하고 통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삼별초가 진도에 거점을 잡자 고려 정부는 이러한 삼별초의 행동에 상당히 긴장하였으며, 제주마저 삼별초의 손에 넘어갈 경우 삼별초의 저항 기반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므로 고려 정부도 제주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삼별초로부터 제주를 방어하고자 하였으며, 삼별초는 제주를 마지막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제주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270년 9월 고려 정부는 김수(金須)와 고여림(高汝霖) 장군이 거느린 군대를 제주에 보내 방비케 하였다. 관군은 항파두리성 남쪽 약 4㎞ 지점 해발 650m 오름, 즉 기생 화산인 삼심봉에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제주시 화북동 일대 해안 지역을 방비하는 시설도 설치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일우)
당시 지영광군(知靈光郡=영암부사)였던 김수는 삼별초의 탐라 상륙을 막기 위하여 군사 1000여명을 거느리고 입도(入島)하였다. 먼저 제주도에 와 있던 고여림과 함께 도민을 동원하여 바닷가에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김녕리 묘산봉 남쪽 자락에 있는 김수장군신도비에는 처음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고 나중에 7200명의 정병을 조련영솔하고 제주해변에 환해장성을 축성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7200명이라 한 것은 근거 기록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한편, 진도에 있던 삼별초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李文京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했다. 1270년 11월 이문경 부대의 삼별초군은 제주의 서쪽 명월포(明月浦)를 통해 상륙하여, 관군을 공격 목표로 삼아 동쪽으로 나아갔다. 김수 장군은 삼별초를 막기 위하여 출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대촌성(大村城, 지금의 제주시 중심가)으로 후퇴하였다.(김봉옥은 《증보 제주통사》에서 김수 장군이 애월읍 유수암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속설이 있다고 밝혔다) 이문경은 이들을 추격하여 대촌성에 이르러 성주 고인단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는 송경(개경을 뜻함) 군사들을 잡기 위하여 왔으니 너희 땅에는 피해가 전혀 없을 것이다. 다만 너희 백성이 상하지 않도록 송경 군사들과 구별할 것이니 성문을 통과시키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인단이 성문을 열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양군의 전투가 송담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 어느 쪽에게도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수의 부대는 현재의 화북동 오현고등학교 앞거리 동제원(東濟院)에 진을 쳤다. 삼별초군은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격전지는 동제원 서쪽 바로 옆에 있던 송담천을 경계로 관군과 삼별초군 간에 일진일퇴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송담천은 제주교대 동쪽을 흐르는 화북천이라고도 하고 화북주공아파트 동쪽에 있는 삼수천이라고도 하는데 명확하지 않다.(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제원은 주 동쪽 9리, 송담천은 주 동쪽 13리라고 되어 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관군은 대략 1,000여 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삼별초 이문경 부대의 수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송담천 전투 결과 김수와 고여림 장군을 비롯해 제주 방어에 나섰던 관군은 모두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처음에는 유리한 전투를 벌였으나 '토착민이 관군에 협조하지 않고 적(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패배했다. (김수장군신도비에는 '이문경이 관군에 혼재하였다가 도처에서 방화 파괴하고 삼별초와 내통'하였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하였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고려말의 문장가 최해의 졸고천백(拙藁千百 券一)에는 김 문정공(金文正公) 묘지라는 제목에서 삼별초와 김수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문정공은 김수의 아들 김태현이다.
부친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수(須)는 누차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金須)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高宗) 을묘년(고종42년=1255)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는데, 체격이 크고 용모가 수려하며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벼슬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능력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지원(至元) 기사년(원종10년=1269)에 어사(御史)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지영광군(知靈光郡)이 되었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강도(江都=江華島)에 있던 사람과 물자를 겁략하여 배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탐라(耽羅)를 먼저 점거하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이에 본국에서는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게 하는 한편, 전라도에 첩문(牒文)을 내려보내 정관(正官) 가운데 평소 백성들이 신뢰하고 복종하던 사람을 선정하여 군대를 이끌고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시중이 거기에 선발되자 지체 없이 가서 군사를 뽑아 곧장 탐라에서 고여림을 만났는데, 역적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진도(珍島)를 지키며 탐라에는 건너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밤낮으로 보루를 쌓고 무기를 설치하여 공격로를 차단하여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관이 머뭇거리고 관망하며 힘을 쏟지 않는 바람에 적들이 다른 길로 공격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 대의(大義)로서 군사들을 격려하였으므로 군사들이 이에 감격하여 용기백배하여 고함을 치며 다투어 올라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살육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토착민들이 적을 도와줌에 따라 중과부적의 상태가 되어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싸움터에서 죽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최채기 역, 拙藁千百. 2006년 한국고전번역원 刊)
삼별초군의 희생도 많았는데 피가 강물처럼 흘러 송담천의 바위는 피에 젖어 지금도 붉다는 설이 전해질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사태 수습을 마친 이문경 부대는 더 동쪽에 있는 조천포로 나가 그 곳에 진을 쳤다. 삼별초군이 송담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제주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진도 함락 이후에는 제주를 마지막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일우)
구좌읍 김녕리 묘산봉(괴살메 또는 花山岳) 남쪽 자락에 있는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行監察御史靈光副使光山金公須將軍神道碑銘>에는 김수 장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수의 초명은 '用之'이며, 시조로부터 14세손이고, 그 7대조부터 계속 무장으로서 공을 세웠다. 장남인 그는 고종42년(을묘)에 급제했으며 2군8현을 관장하는 영광부사로 재직할 때 제주에 오게 되었다. 부인은 고씨이며 102세까지 살았다.
한편, 제주도는 이 방묘가 김수 장군의 묘라고 확언할 수는 없으나 제주도내 고려말~조선전기에 조성된 방형석곽묘가 대부분 원형이 훼손되거나 이장돼 있어 제주도 묘제사 연구를 위해서 원형의 방묘 석곽묘의 보전이 필요하다고 하여 2005년 4월 26일 도지정 문화재 지정을 예고했다. 도(道)는 삼신오름 방묘를 묘제의 축조 양식과 매장 방법 등이 제주도 묘제변천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자, 일설에는 김수 장군 묘로 전해지는 등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했다.(제주의 소리 2005년 4월 27일)
그러나 피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김수장군의 아들 태현의 묘가 개경 선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김수 묘 북쪽 연못은 김수못이라고 불리며 그 북쪽 가에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監察御史靈光副使光山金公諱須將軍遺蹟碑文이라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오호라! 이곳 제주의 삼심악(三心岳)은 고려의 충신 김수(金須)장군 순절지(殉節地)이다. 이 비의 서남쪽 수십보 거리에 있는 장방형의 거분(巨墳)이 바로 이 지방에서 구전(口傳)해오는 김수 장군 묘이고, 동북쪽에 있는 못이 구전(口傳)해오는 김수 장군지(金須將軍池)이다. 묘의 규모로 보아 당시 조정에서 얼마나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예장(禮葬)을 명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며 지명(池名)이 지금껏 사민(士民)들의 입에 전래(傳來)하는 것으로 보아 공의 의열(義烈)이 얼마나 당시의 인사(人士)들을 감복시켰는지 알 수 있다. 장군은 고려의 원종시인(元宗時人)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군은 신라 왕자 흥광의 후예(後裔)로 관향(貫鄕)이 광산이요, 대장군 김경량(金鏡亮)의 자(子)다. 어려서부터 담략(膽略)이 과인(過人)하고 청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고종(高宗) 4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에 이르고 다시 영광부사로 나갔다가 때마침 삼별초의 난이 터져 왕명을 받들어 군(軍) 200을 영솔하고 고여림 장군과 함께 이곳 제주로 건너와 도민들과 더불어 환해장성(環海長城)을 구축하고 삼별초군의 상륙을 저지(沮止)했다. 그런데 위장(僞將) 이문경이 군중에 잠입하여 적과 암암리에 내통을 하고 군심을 교란시킴으로 전(戰)을 하다가 사태가 불리하자 장군은 적진 중으로 돌입(突入)하여 좌충우돌 무수한 적을 무찌르다. 기력(氣力)이 진(盡) 시석(矢石)아래 절사(節死)을 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공의 충절을 포상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첨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를 추증하였고 유족에게도 후한 미곡(米穀)이 하사되었다. 그런데 풍상세월(風霜歲月) 속에 자손들은 이 장군의 유적지를 망각(忘却)의 성(城)에 두고 있다가 금년 봄에야 비로소 발론(發論)되어 이 지역을 답사 확인을 하고 사단(祀壇)과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사적비(事蹟碑)를 마련하고 이 유적지(遺蹟地)에도 표석(表石)을 봉수(奉竪)하게 된 것이다.
오호라! 현회(顯晦)가 유수한 것인지 감춰졌던 장군의 충절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도다. 이 비(碑)는 후손 종중(宗中)이 전담(專擔)으로 세우는바 그 효사(孝思) 또한 가상타 하겠다. 명(銘)하노니,
한라산 하늘에 솟고 남해 창파 땅을 덮었다. 아득한 천년사(千年史)를 어느 곳에 물을거나. 장군묘(將軍墓) 장군지(將軍池)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지금도 파도(波濤)소리 삼별초의 함성(喊聲)인 듯 푸른 나무에 스치는 바람 장군의 호령인 듯 산해는 예 같은데 인걸은 어디갔나. 왕명을 거역(拒逆)했기에 별초(別抄)는 역(逆)이 되고 왕명을 받들었기에 장군은 충(忠)이 됐으며 백성을 침해(侵害)했기에 별초(別抄)는 적(賊)이 되고 백성을 지켰기에 장군은 성인(成仁)을 했다.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 있어 청사(靑史)가 증명을 한다. 창상(滄桑)이 수없이 바뀌어도 이 글은 닳지 않아 장군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무궁토록 전하리라.
檀紀四千三百二十年(西紀一九八七) 丁卯十月 日 星州 李栢淳 謹撰 礪山 宋泰炅 謹書〉
현재 제주도 방묘는 대부분 원형이 훼손되거나 이장되어 있다. 이 유적은 축조 방식과 매장 방법 등에서 제주도 묘제 변천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유적의 축조 시기는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경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나, 무덤의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정밀 조사를 거쳐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050821, 보완 140302, 2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