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실댁
원래 약골인 이 진사가 고뿔을 달고 살더니 골골하다가 마침내 드러눕고 말았다.
불과 서른여섯에 천석꾼 집안의 대주(大主)가 병석에 들자
부인인 심실댁은 서방을 살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남편에게 전념코자 우선 집안 살림을 정리했다.
대부분 소작을 주고도 문전옥답을 자영하느라 들인 머슴들을 소작인으로 바꿔 모두 내보내고
나이 지긋한 찬모 하나 빼고 하녀들도 내보냈다.
용하다고 헛소문만 났던 저잣거리 황 의원과도 왕래를 끊었다.
경면주사(한약재로 쓰는 광물)에 우황·녹용·해구신까지 얼마나 재산을 쏟아부었던가.
그러고도 이 진사는 병석에 눕고 말았으니!
천왕봉 아래서 백년 묵은 산삼 일곱뿌리를 캤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실댁이 저잣거리 주막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벌써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자 영감들이 몰려왔다.
스물대여섯 된 수염이 텁수룩하고 덩치가 산 같은 심마니가 가운데 앉아 삼베 보자기를 펼치자
이끼에 싼 잘생긴 동자삼 한뿌리가 나왔다.
나머지 여섯뿌리는 감춰놨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빙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동자삼을 구경하고 있는데 손이 하나 쑥 들어와 번개처럼 동자삼을 낚아채
와그작 씹어 먹는 게 아닌가.
모두가 아연실색해 그를 보니 볼이 부풀어 오른 이 진사 부인 심실댁이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입만 벌리고 있는데
심실댁이 산삼을 씹어 먹으며 발딱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자 심마니는 코가 꿰여 따라 나갔다.
“걱정하지 마시오. 산삼값은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
이 진사 댁에 걸어갈 동안 산삼 한뿌리를 다 먹어치운 심실댁은 입을 닦으며 대문에 들어섰다.
심마니는 대청마루에 앉아 매실청 탄 물을 한사발 마시며 아직도 쿵쿵 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마니는 세번 놀랐다.
심실댁의 당돌한 배짱에 놀랐고 그의 미모에 놀랐고 고래대궐 같은 집에 놀랐다.
심실댁이 물었다.
“나머지 여섯뿌리는 어디 있소?”
“소인의 산속 너와집에 있습니다.”
심마니가 답하자 심실댁이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집 행랑방에서 자고 내일 새벽 함께 그리로 떠납시다.”
새벽 식사를 하고 심마니와 심실댁은 집을 나섰다.
심실댁은 남장을 하고 초립을 썼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널 때 심실댁은 심마니 등에 업혔고 산길을 오를 땐 심마니가 심실댁 손을 잡아끌기도
엉덩이를 밀기도 했다.
꼬박 한나절을 쉼 없이 걸어 폭포 옆 너와집에 닿았다.
한참 만에 심마니가 이끼에 싼 산삼 여섯뿌리와 바짝 마른 웅담과 녹용을 들고 왔다.
“지난가을에 반달곰을 덫으로 잡았고 사슴을 올봄에 잡았지요.”
심실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전부해서 얼마를 드릴까요?” 하고 심실댁이 묻자
“마님께서 원하는 것은 다 주겠다고 했지요?” 하고 심마니가 답했다.
이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심마니는
“소인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우르르 쾅쾅 갑자기 천둥번개에 폭우가 쏟아졌다.
먹구름이 계속 몰려오고 비는 문을 때렸다.
심실댁의 고함은 뇌우가 삼켜버렸다.
심실댁이 가쁜 숨을 가다듬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저기 약초도감과 <동의보감>은 누가 보는 것이요?”
심마니가 계면쩍은 얼굴로 “소인이 가끔씩 읽습니다” 답하더니 이어
“여기 산에 들어오기 전에는 의원 밑에서 탕제도 짓고 진맥도 짚었습니다” 했다.
심실댁이 너와집 다락 속을 들여다보고 꽤 놀랐다.
하수오·지네·당귀·후박 등 약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처사님, 저희 집 대주를 좀 살려주십시오.”
심실댁은 심마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매달렸다.
“계곡물이 넘쳐 오늘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심마니가 말했다.
그날 밤 밤새도록 너와집이 흔들렸다.
심실댁의 요란한 외침은 폭포 소리가 잡아먹었다.
이튿날 심마니는 온갖 약재를 지게에 지고 심실댁과 함께 지리산을 내려갔다.
그는 그날 저녁부터 손수 약탕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약을 달였다.
이 진사는 심마니가 혼을 넣어 달인 약 세첩을 먹고 나니 약효가 완연히 나타났다.
심실댁은 새벽마다 별을 보고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 정화수로 약재를 달였다.
처서에 이 진사는 언제 아팠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났다.
심실댁이 이 진사에게 큰절을 올리며
“소첩은 더는 이씨 가문의 종부 자리를 지킬 수 없는 몸이 됐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했다.
이 진사는 아무 말 없이 거금의 돈표를 심실댁 손에 쥐여주며 눈물을 떨궜다.
심실댁도 이 진사 무릎에 엎드려 흐느꼈다.
심실댁과 심마니는 밤배를 타고 밤안개 속으로 사라졌다더라.
첫댓글 아!
심마니....!
민대감 지리산으로 갈꺼나...
심실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