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됐던 전직 특수부대원이 대부호의 요청에 따라 풀려난다. 조건은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 기한은 6주. 매력적이나 뭔가 구린 데가 있는 대부호의 아내, 대부호를 못 마땅해 하는 여자 경찰과 얽히고설키면서 대부호의 주변을 조사하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조직에 습격을 받아 생명의 위기에 처하고….
이건 딱 펄프 픽션’이다. 영웅을 내세운 싸구려 서사구조란 이야기다. ‘펄프 픽션’은 알다시피 1920년대 대공황의 음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추리소설의 변종. 머리보다는 몸 쓰기를 즐기는 터프한 주인공이 쿨하게, 그러나 속 시원하게 사회 부조리와 맞서는 구조다. 이 소설은 대체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색다르다. 미래세계의 이야기여서다. 하늘을 나는 택시는 예사다. 신체능력을 극대화해 주는 ‘뉴라켐’, 인간 정신만 ‘전송’해서 몇 백 광년 떨어진 행성 간을 오가는 ‘니들캐스트’기술 등 용어해설이 따로 붙어 있을 정도다.
인류가 태양계를 넘어 행성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한 시대, 인간은 돈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 기억을 디지털화 해 칩에 저장하고 유기체(신체)를 바꿔갈 수 있기 때문이다.(이 저장장치가 소설의 제목인 ‘얼터드 카본’이다) 그러니 살인은 '유기체손상’으로 바뀌고,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도 단지 기억장치를 ‘저장소’에 보관하는 데 그친다. 신체를 옷처럼 바꿔가며 300년 넘게 산 대부호 뱅크로프트는 자살 후 저장해 둔 기억을 활용해 ‘부활’했다. 자살 직전의 기억이 보관되지 않은 그는 자신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주인공 코바치는 그의 의뢰를 받아 범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매춘과 도박이 나오고, 영생을 누리는 ‘메트 족’과 달리 몸을 빼앗기기도 하는 빈곤층도 등장한다. 코바치는 밑바닥 인생을 위해, 그리고 오래 전 헤어진 사랑을 위해 악의 집단과 맞선다.
여기서 소설은 ‘사이버펑크’와 만난다. 1980년대 막 시작된 정보화 시대에 발 맞춰 선보인 ‘사이버펑크’는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회 병폐와 계급 갈등을 주로 다루는 SF다.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이들은 대체로 ‘펄프 픽션’이나 ‘사이버펑크’라면 고개를 흔든다. 재미만 추구하느라 깊이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쉽게 말하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드보일드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를 배웠다고 이야기했단다. ‘사이버펑크’쪽에서도 ‘뉴로맨서’를 쓴 윌리엄 깁슨이나 영화 ‘블레이드 런너’의 원작자 필립 K. 딕은 문명의 예언자 대우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학, 넓게는 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해 온 만큼 대중성이 있다 해서 마냥 외면할 것은 아니란 얘기다.
소설은 현란하면서도 매혹적이다. 탄탄한 줄거리에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숨 가쁘게 진행되는 액션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나름대로 깊이가 있다. 인간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식이다. “평생을 통해서 같은 몸으로 같은 사람을 두 번 이상 만나지 못한다면…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낯선 사람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여자에게 사랑은,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멋진 펄프 픽션이자 사이버펑크의 번듯한 ‘적자’이다. 이 소설은.
김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