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0월 09일 음력 9월 13일 한로
2011년 10월 21일 음력 9월 25일 토왕용사
2011년 10월 24일 음력 9월 28일 상강
2011년 10월 27일 음력 10월 01일
2011년 11월 08일 음력 10월 13일 입동
2011년 11월 23일 음력 10월 28일 소설
2011년 12월 07일 음력 11월 13일 대설
2011년 12월 22일 음력 11월 28일 동지
2011년 12월 25일 음력 12월 01일 신묘년 구리수마수
2011년 12월 31일 음력 12월 07일 섣달 그믐
2012년 1월 06일 음력 12월 13일 소한
2012년 1월 18일 음력 12월 25일 토왕용사
2012년 1월 21일 음력 12월 28일 신묘년 대한
2012년 1월 23일 음력 01월 01일 임진년 설날
절입시간
2012년 02월 04일 음력 01월 13일 입춘 (立春) 02월 04일 19시 12분
2012년 02월 06일 음력 01월 15일 정월 대보름
2012년 02월 19일 음력 01월 28일 우수 (雨水) 02월 19일 15시 07분
2012년 02월 22일 음력 02월 01일 머슴날 영등날 중화절 그믐
2012년 03월 05일 음력 02월 13일 경칩 (驚蟄) 03월 05일 13시 15분
2012년 03월 20일 음력 02월 28일 춘분 (春分) 03월 20일 14시 10분
2012년 03월 24일 음력 03월 03일 삼짇날
2012년 04월 04일 음력 03월 14일 청명 (淸明) 04월 04일 18시 07분
2012년 04월 05일 음력 03월 15일 한식
2012년 04월 20일 음력 03월 30일 곡우 (穀雨) 04월 20일 01시 18분
2012년 04월 21일 음력 윤달 03월 01일
2012년 04월 23일 음력 윤달 03월 03일 삼짇날
2012년 05월 05일 음력 윤달 03월 15일 입하 (立夏) 05월 05일 11시 30분
2012년 05월 21일 음력 04월 01일 소만 (小滿) 05월 21일 00시 30분
2012년 05월 28일 음력 04월 08일 사월초파일..
2012년 06월 05일 음력 04월 16일 망종 (芒種) 06월 05일 15시 43분
2012년 06월 21일 음력 05월 02일 하지 (夏至) 06월 21일 08시 29분
2012년 06월 24일 음력 05월 05일 단오
2012년 07월 07일 음력 05월 18일 소서 (小暑) 07월 07일 02시 00분
2012년 07월 18일 음력 05월 29일 초복
2012년 07월 22일 음력 06월 04일 대서 (大暑) 07월 22일 19시 22분
2012년 07월 28일 음력 06월 10일 중복..
2012년 08월 02일 음력 06월 14일 유두..
2012년 08월 07일 음력 06월 20일 입추 (立秋) 08월 07일 11시 47분
2012년 08월 17일 음력 06월 30일 말복..월복?
2012년 08월 23일 음력 07월 06일 처서 (處暑) 08월 23일 02시 24분
2012년 08월 24일 음력 07월 07일 칠석..
2012년 09월 01일 음력 07월 15일 백중..
2012년 09월 07일 음력 07월 21일 백로 (白露) 09월 07일 14시 39분
2012년 09월 23일 음력 08월 08일 추분 (秋分) 09월 23일 00시 00분
2012년 09월 30일 음력 08월 15일 추석
2012년 10월 08일 음력 08월 23일 한로 (寒露) 10월 08일 06시 15분
2012년 10월 23일 음력 09월 09일 상강 (霜降)중양절.. 10월 23일 09시 17분
2012년 11월 07일 음력 09월 24일 입동 (立冬) 11월 07일 09시 22분
2012년 11월 22일 음력 10월 09일 소설 (小雪) 11월 22일 06시 48분
2012년 12월 07일 음력 10월 24일 대설 (大雪) 12월 07일 02시 12분
2012년 12월 21일 음력 11월 09일 동지 (冬至) 12월 21일 20시 07분
2013년 01월 05일 음력 11월 24일 소한 (小寒) 01월 05일 13시 25분
2013년 01월 20일 음력 12월 09일 임진년 대한 (大寒) 01월 20일 06시 45분
2013년 02월 04일 음력 12월 24일 계사년 입춘
2013년 02월 10일 음력 01월 01일 계사년 설날
2013년 02월 18일 음력 01월 09일 우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토왕용사 [ 土王用事 ]
봄·여름·가을·겨울에 한 절기씩, 1년에 4번 있다. 토왕지절(土旺之節)의 첫째날. 토용(土用)이라고도 한다. 즉 입춘·입하·입추·입동의 절기가 드는 날의 그 전날부터 역산(逆算)하여 18일째 되는 날이다. 토왕지절이란 오행설에서 토기(土氣)가 왕성하다는 절기이다. 오행설은 화·수·목·금·토의 다섯 원소의 기(氣)의 소멸·성장에 따라 천지 만상이 변한다는 것이 그 근본사상이다. 이것을 4계절에도 적용한다. 그러나 4계절에 5행을 적용하려면 특별한 고안이 필요하다. 봄에는 새싹이 트고 발육이 왕성하기 때문에 목을, 여름은 뜨거우므로 화를, 가을은 서리 맞는 쇠와 같이 냉랭하므로 금을, 겨울은 서리와 눈이 온 땅을 덮어 물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수를 배당한다. 따라서 토만 남게 되는데 4계절에 토기만이 빠질 수는 없으므로 각 계절의 끝 18일간씩 즉 4립(입춘·입하·입추·입동)전 각 18일간을 떼어 내어 토에 배당한다. 따라서 이 72일이 토에 해당하며, 그 일수는 1년의 약 1/5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이 날에 흙일을 하면 해롭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데, 흙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력에는 각 계(季)의 끝의 18일간 즉 토왕지절의 초일에 토왕용사라고 적혀 있으며, 이 날에 태양은 각각 황도상의 황경 27˚, 117˚, 207˚, 297˚의 위치에 온다. 여름의 토왕용사는 혹서의 시기에 있고 겨울은 혹한의 시기에 있다.
사월초파일
대한민국, 중화민국, 마카오, 홍콩에서 공휴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나 양력 4월 8일, 음력 4월 초파일, 5월 어린이날 등 다양한 날짜에 지낸다.
경(經)과 논(論)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을 2월 8일 또는 4월 8일로 적고 있으나, 자월(子月:지금의 음력 11월)을 정월로 치던 때의 4월 8일은 곧 인월(寅月:지금의 정월)을 정월로 치는 2월 8일이므로 음력 2월 8일이 맞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 등지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4월 8일을 석가의 탄일로 기념하여 왔다.
한편 1956년 11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양력 5월 15일을 석가탄신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을 석가탄신일로 보고 기념한다. UN에서는 1998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대회의 안건이 받아들여져, 양력 5월 중 보름달이 뜬 날을 석가탄신일로 정해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연등 축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각 사찰에서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1996년(불기 2540년)부터는 연등축제로 이름을 붙이고 동대문 운동장 - 조계사에 이르는 제등행렬을 비롯하여 불교문화마당, 어울림마당(연등법회), 대동(회향)한마당 등 행사가 추가되어 종합적인 축제로 전환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월 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적 행사.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불교에서는 불전(佛前)에 등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을 향공양(香供養)과 더불어 중요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한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등공양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지적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권5의 감통편(感通篇)에도 불등에 관한 설화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등불을 밝히는 참된 의미를 밝히고 있다. 등을 밝히는 것이 곧 연등이고,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의 미사'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으로는 그 날이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라 로마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이교 축제일이었다는 사실과 1세기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념하지 않는 일부 기독교 교단도 있다.
현재는 종교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문화적인 행사로 발전하였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축제이자 교회력 절기인데,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성탄전 4주일 동안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대림절로 지킨다. 대한민국 대통령령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상의 정식 명칭은 '기독탄신일'이다.
로마 및 이집트, 이교도 지역에서 행하던 태양 숭배 및 관련 신화에서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기념하고 있었다. 일년 중에 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지(冬至)에 즈음하여, 그 이후부터는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세력을 얻어 만물이 소생해 나갈 수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12월 25일이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이 이교 축제들은 교황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기원 350년부터 '그리스도교'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기독교에서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문화에 맞게 토착화된 증거로 볼 수 있다.
X-mas는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첫글자 Χ(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이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기원후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참배하러 왔다는 마태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현일(公現日,1월 6일)과 동시에 행해졌다.
또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1605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선물 교환은 고대 로마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미국에서 일반화되었다.
서방교회(성공회, 개신교, 로마 가톨릭)에서는 매년 12월 25일이다. 동방정교회, 특히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율리우스력의 12월 25일에 해당하는, 12월 25일보다 13일 늦은 1월 7일이 크리스마스이다. 일반적으로 12월 24일을 전야제로서 '크리스마스 이브'라 하며 일부 나라에서는 다음날을 복싱 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독교와 서구 문명이 퍼지면서 크리스마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리는 명절이 되고 있어서, 대한민국에서도 공휴일로 정해져 있다. 대한민국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할 당시 이름은 기독탄신일이었고 현재도 법령 및 관공서 공휴일 규정상으로는 기독탄신일로 정해져 있으나 일상 생활에서는 성탄절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 대한민국의 많은 초등학교들이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겨울방학식을 가진다.
사우디아라비아 (종교의 자유가 없음), 이란, 오만, 아랍에미리트 같은 아랍 이슬람국가들에서는 성탄절이 공휴일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신앙하는 직장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출근할 수 있도록 종교적인 면에서 배려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어도 공휴일이 연장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외한 타이완, 홍콩, 마카오만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쉬고 있고, 기독교 인구가 매우 적은 일본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며, 헤이세이 천황의 탄생일(12월 23일)과 근접해 있어 연계론이 있다.
세시풍속
오랜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명일 또는 좋은 시절. 옛날에는 계절에 따라 가일(佳日) 또는 가절(佳節)이라 하여 좋은 날을 택해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절이 된 것이다. 대개 명절로는 정월의 설날과 대보름, 이월의 한식, 사월의 초파일, 오월의 단오, 유월의 유두(流頭), 칠월의 백중(百中), 팔월의 추석(秋夕), 십일월의 동지(冬至)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시월은 상달이라 하여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말날[牛日(우일)]과 강신일(降神日)이 있었으며, 십이월에는 납향날[臘享日(납향일)]과 그믐날에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다. 이러한 명절은 보름마다 한번씩 있는 절기(節氣)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의미있는 날을 택하여 정한 것이다. 지금은 정월의 설과 대보름, 그리고 팔월의 추석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명절이 그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옴에 따라 생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동지
동지는 반드시 음력 11월에 들어서 음력 11월을 동짓달이라 불렀다. 또한 동지를 작은설로 부르며 크게 축하했다. 민간에서는 동지에,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처럼,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옛날에 동지 (옛날 서당은 이 날에 입학하였다.)를 정월(正月)로 삼은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
동지 팥죽 - 동지 때 쑤어 먹는 팥죽. 새알심을 넣어 쑨다. 옛날에는 동지를 큰 명절로 지냈으나 요즘은 제사를 모시지 않고 붉은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는다. 붉은팥죽은 옛날부터 액운을 막는 절기 음식으로서, 지방에 따라서는 초상 때나 이사를 하였을 때에 액운을 막기 위해 팥죽을 쑤어 집 안팎에 뿌리고,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애동지 - 동지가 동짓달(음력 11월) 초승에 들면 '애동지'라 하는데, 이때는 팥죽을 쑤어 먹지 않는다. 윤달이 들어 있는 2006년과 2009년, 2014년 등이 애동지이다.
동짓날 날씨로 새해의 농사를 점치거나 달력을 선물로 보내는 풍습이 있다.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기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였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어 끓인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이다. 동짓날에 궁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백강(白薑)·정향(丁香)·계심(桂心)·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호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御璽;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파란 표지의 달력을 선사하였다. 동짓날은 부흥을 뜻하는데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이다. 동짓날부적으로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또 동짓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동지 팥죽은 새알심이라 불리는 찹쌀경단을 함께 섞어 끓이기도 한다. 그 전래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목은집≫·≪익재집≫ 등에 동짓날 팥죽을 먹는 내용의 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는 이미 절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에도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군학회등≫·≪규합총서≫·≪부인필지≫ 등의 문헌에는 구체적인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팥에 약 8∼10배의 물을 붓고 팥알이 충분히 퍼지도록 삶은 다음, 체에 걸러서 껍질을 제거하고 가라앉힌다. 가라앉힌 웃물을 떠서 솥에 붓고 쌀을 넣은 다음 중간 불에서 끓이다가, 쌀이 거의 퍼졌을 때 가라앉은 팥앙금을 넣고 고루 섞어서 다시 끓인다.
이 때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둥글게 새알모양으로 빚은 새알심을 함께 끓인다. 새알심이 떠오르고 팥죽색이 짙어지고 걸쭉하게 되면 소금으로 간을 한다. 식성에 따라 설탕을 넣어 먹기도 한다. 동지팥죽의 새알심은 가족원 각각의 나이수대로 넣어 먹기도 한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기에 앞서 대문이나 장독대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사하거나 새 집을 지었을 때에도 팥죽을 쑤어 집 안팎에 뿌리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또한, 병이 나면 팥죽을 쑤어 길에 뿌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병마를 쫓는다는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친지나 이웃에서 팥죽이나 녹두죽을 쑤어 보내는 풍습이 있으며, 여름 삼복에 팥죽을 쑤어 먹는 풍습이 있어 복죽(伏粥)이라고도 하였다. 겨울철의 별미음식으로 점심 또는 간식으로 널리 쓰였으며, 주막이나 행인의 내왕이 많은 길목에는 팥죽을 파는 집이 있어서 요기음식으로도 널리 보급되었다
섣달 그믐
제석(除 1년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밤. ‘제야(除夜)’라고도 한다. 한해를 마감하는 ‘덜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섣달 그믐을 속칭 ‘작은 설’이라고 하여 묵은세배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즉, 그믐날 저녁에 사당에 절을 하고, 어른들에게도 세배하듯 절을 한다.
이는 1년의 마지막 순간에, 한해가 무사히 간다는 뜻으로 드리는 인사이다. 이로 인하여 이 날은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오고 가는 사람의 등불이 끊이지 않았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2품 이상의 조관(朝官)들이 왕을 만나고 ‘묵은해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또,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하였다. 지방관아에서는 소총을 쏘고 징도 울렸다. 대궐과 지방관아에서의 이와 같은 풍습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관상감에서 행하였던 ‘대나(大儺)’라는 의식의 유속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잡귀를 물러가도록 위협하는 연종제(年終祭)의 일종으로 보이며, 수세(守歲)도 이와 같은 뜻을 지닌 풍속으로 보인다. 수세란 제석 때 민간에서 집안 곳곳에 등불을 밝히고 밤샘을 하는 풍속을 말한다.
수세는 ‘별세(別歲)’ 또는 ‘해지킴’이라고도 하는데,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집안의 모든 곳에 불을 켜놓고 남녀노소가 닭이 울 때까지 밤을 새웠다.
고려시대에 민간에서는 문 위에 복숭아나뭇가지를 꽂고 마당에서 폭죽을 터뜨렸다고 한다. 한편, 이 때를 기하여 각도의 감영과 여러 군에서는 제석 전에 토산물인 꿩·닭·포·물고기·담배·술 등을 공물로 바쳤는데, 이때 각종 물건의 이름을 기록한 종이를 ‘총명지(聰明紙)’라 한다.
한편, 세모(歲暮)에는 옛날부터 생치(生雉)·생전복·대추·생선알·육포(肉脯)·마른생선·감자·귤·건시(乾枾) 등을 친척 또는 친지들 사이에 주고받는데, 이것을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이나 차례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주부들은 밤을 새우다시피 한다. 이때 남자들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또한, 세밑의 바쁜 중에도 각 집마다 부뚜막 헌 곳이 있으면 새로 바르고 외양간도 치우고 고치며, 거름도 퍼내어 설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믐날 마당을 깨끗이 쓸어 그 쓰레기를 이용하여 마당 한 구석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이는 모든 잡귀를 불사른다는 신앙적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도 세모에 세찬이라 하여 70세 이상 되는 조관(朝官)과 명부(命婦)에게 쌀과 어류 등을 나누어주었다.
또, 한해 동안의 거래관계를 이날에 모두 청산하는 관행이 있었다. 따라서, 이날 각 가정에서는 새해의 준비와 1년 동안의 거래의 청산에 몹시 분주하여지고, 밤중까지 빚을 받으러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기만 하면 정월 보름께 까지는 빚을 독촉하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또, 제석에는 윷놀이·옛날이야기·이야기책 읽기 등 흥미 있는 놀이로 밤을 새우는데, 전라도나 제주도에서는 세투(歲鬪)라 하여 투전이나 화투를 하며 밤을 지새운다. 이 때는 대개 편을 짜서 음식내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거리고시: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지내는 마을 제사.
인기척이 없는 시각에 나물·떡·마른 명태(다른 생선은 금한다) 등을 새 그릇에 담아서 산에 올라가 밥을 짓는다. 준비해 온 제물을 마을 뒷산의 선버렁바위 위에 차려 놓고 산제를 지낸 뒤 당산(堂山)에 들러 당산제(堂山祭)를 지내고,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 짚에 싸서 그 자리에 두고 마을로 내려온다. 마을에 들어와서는 타작마당에 병풍을 두르고 본격적인 동제를 지낸다. 이 때 설 차례를 지낸 집집에서 밥과 찬을 내와 타작마당에 벌여 놓고 마을의 태평과 개인의 복을 함께 빈다. 요즈음은 이러한 마을제사를 대부분 절에 맡겨 간단히 지낸다.
대보름
한국의 대표적인 세시명절의 하나.상원(上元)이라고도 한다. 음력 1월 15일은 대보름, 음력 1월 14일은 작은 보름으로 불린다. 농사력(農事曆)으로 볼 때 이 시기는 대보름에 이르기까지 걸립(乞粒)을 다니면서 마을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이다가 농사철로 접어드는 때이며, 마을공동의 신격(神格)에 대한 대동의례·대동회의·대동놀이 등이 집중된 때이기도 하다.
작은 보름에는 수숫대의 껍질과 속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서 물감으로 채색한 뒤 벼·보리·밀·옥수수·콩·목화 등의 이삭 모양을 만들어 짚단에 꽂아 긴 장대 끝에 묶어서 집 옆에 세우거나 마구간 앞 거름더미에 꽂아놓는다. 이것은 낟가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해 오곡이 낟가리처럼 풍성하게 여물어줄 것을 바라면서 즐기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그 유래가 매우 오래 되었으며 내농작(內農作)이라는 궁중의식으로 채용되기까지 했다. 음력 1월 15일 대보름에는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으며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를 했다. 이날 밤 들판에 나가서 그해의 새싹이 잘 자라고 전답의 해충이 소멸되도록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띄우기·바람개비·꼬꼬대·실싸움·돈치기 등을 즐겼으며, 어른들은 다리밟기·편싸움·횃불싸움·줄다리기·동채싸움·놋다리밟기 등을 했다. 이와 같이 대보름날 밤에는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결하는 경기를 조직하여 집단적으로 즐겼다.
통명농요(通明農謠)가 전해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통명동 골마을의 1980년대 정월 대보름 행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보리기풍[麥祈風] :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보리 풍년을 위한 점치기이다. 각 가정마다 수수깡을 잘라서 보리 모양을 만든 뒤 이것을 거름 속에 꽂아두었다가 대보름 아침에 거두어 불사르며 거기서 나온 재를 모아둔다. 이 재를 봄보리 갈 때 뿌리면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② 보름밤 지키기:정월 열나흗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 하여 잠을 자지 않는다. 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놓는다. ③ 찰밥과 묵은 나물:대보름날 새벽에 찰밥을 먹는다. 찰밥은 멥쌀·찹쌀·조·수수·보리 등 여러 가지 곡물을 넣어 지은 오곡밥인데, 찰밥에는 고사리·시래기·호박고지 등 묵은 나물과 콩나물 등의 나물이 곁들여진다. 대보름날 오곡밥을 지으면 먹기 전에 나물과 함께 성주·조왕·삼신·용단지 등 집의 주요 가신(家神)에게 먼저 떠올린다. 찰밥을 많이 먹을수록 좋다고 여겨 대보름날 '나무 아홉 짐과 찰밥 아홉 그릇 먹는다'는 말이 있다. 특히 자기집 찰밥뿐만 아니라 여러 집의 찰밥을 먹는 것이 좋다. ④ 부럼:대보름날 저녁에 부럼을 깬다. 밤과 같은 경과류를 딱 소리가 크게 나도록 깨문다. 부럼을 깨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고 치아가 튼튼해져서 건강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⑤ 귀밝이술:새벽에 찰밥을 먹은 뒤 맑은 술을 마신다.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마시게 하는데 이렇게 하면 귀가 밝아지고 눈이 잘 보인다고 믿는다. ⑥ 새쫓기와 모기날리기:농사철이 되면 참새 때문에 피해가 많으므로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새를 막기 위한 예방을 한다. 아이들이 논이나 들에 나가 "후여 후여" 하면서 새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집의 마당이나 논·들에 서서 모기 날리는 시늉도 한다. ⑦ 소밥주기[農占]:대보름날 아침에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가지고 외양간에 가서 소에게 준다. 이때 소가 밥과 나물 중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⑧ 달맞이:대보름날 저녁에 달맞이를 하기 위해 초저녁 달이 뜨기 전에 산이나 동산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이때 꽹과리·징·북 등 갖가지 악기를 동반한 농악패가 함께 올라간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농악대 중 상쇠가 악기를 울리면 달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마음 속으로 소망을 빈다. ⑨ 달점[月占]:보름날 저녁에 떠오르는 달의 빛깔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달의 빛깔이 붉으면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달이 허옇게 비추면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밖에 달이 뜨는 위치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⑩ 불놀이:달맞이 하러 동산에 올라갔다가 불놀이를 한다. 깡통 속에 솔방울이나 관솔을 넣어 불을 지핀 뒤 깡통을 돌리면 불꽃이 원을 그리는 듯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⑪ 동제(洞祭)`: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제를 올린 후 크게 굿을 한다. 정월 대보름 밤이면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에도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내기 전 골매기돌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금줄 사이사이에 백지를 드문드문 끼워놓는다. 정월 대보름 낮에는 골매기 주변에서 농악을 울리며 한바탕 논다. ⑫ 귀신날:정월 열엿새를 귀신 달기날 또는 귀신날이라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예방주술을 행한다
당산제;동제(洞祭) ·동신제(洞神祭) ·대동치성(大洞致誠) ·산제(山祭)라고도 한다. 지내는 장소는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사당이다. 제단은 미리 청결하게 닦고 주변에 황토를 깔아놓으며, 솔가지를 끼운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제주(祭主)는 마을사람 중에서 연로하고 상기(喪期)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한다. 제주는 1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육류를 먹지 않으며 상인(喪人)이나 병자를 만나지 않는다. 제삿날은 지방마다 다른데, 보통 제주의 운수가 길(吉)한 날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제물은 전날 차려놓으며, 제삿날 자시(子時)에 동신제문(洞神祭文)을 읽으면서 제사를 지낸다. 이 날 오전 중에는 동회를 소집하여 제사 비용의 지출, 당산제의 상황을 보고하고 다음해의 제사비용 등을 결정한다.
제사가 끝나면 일종의 오락행사인 굿을 하며 제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는데,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동네 사람의 참여를 막고 마을사람 전체가 참여하여 음복하는, 신인합일적(神人合一的)인 향연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당산제에는 마을사람 가운데서 선출된 제관이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무당을 전혀 참여시키지 않는 것과, 마을사람 중에서 뽑힌 제관이 주관자 노릇을 하지만 모든 진행을 무당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특히 별신굿 ·당굿 ·도당굿이라고 한다.
별신제 ;
별신굿이라고도 한다.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하는 점에서 동제(洞祭)와 유사하나, 동제는 동민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는 데 비하여 별신제는 무당이 주재하는 점이 다르다. 오늘날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은 중요무형문화재 82-가호, 남해안별신굿은 중요무형문화재 82-라호, 은산별신제는 중요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 중요무형문화재 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 충청북도무형문화재 8호인 제천오티별신제, 경상북도무형문화재 3호인 영해별신굿놀이 등이 전승되고 있다.
충청남도 은산(恩山)에서 전승되는 은산별신제는 3년을 주기로 정월 또는 2월에 거행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은산 지방에 전염병이 창궐할 때 마을 한 노인의 꿈에 장군이 현몽하여 “나는 백제를 지키다 부하와 함께 억울하게 죽은 장군인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잘 매장해주면 마을의 병마를 없애주겠다”고 말하며 장소를 가리켜주고 사라졌다. 노인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 장소로 가보니 수많은 백골이 산재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백골을 잘 매장하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더니 전염병이 사라졌고, 그 은공을 갚기 위해 별신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은산 마을 뒷산(당산)에는 옛날 백제의 토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고, 고목이 울창한 숲 속에 당집이 있어 이곳에서 은산별신제를 거행하였다. 장군을 제사지내기 때문에 축문에 중국과 한국의 역대 명장들의 이름이 나열된다.
별신제는 꽃받기, 기마대의 진치기, 무녀의 주원(呪願), 상당(上堂) ·하당(下堂) ·소지(燒紙) ·신장(神將)세우기 등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약 15일이 걸린다. 임원은 대장을 비롯하여 별좌(別座)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이며 기수만도 31명이고, 제물 운반인까지 치면 100여 명의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비용은 마을 공동의 재산과 유지의 기부금, 걸립 수입으로 충당한다. 임원이 되는 사람들은 부정이 없고 신중을 기해야 하며, 대장은 하급 임원에게 수당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제물을 만드는 화주집은 금줄을 쳐 부정을 막으며, 제당 근처도 신역(神域)으로서 금기하고 임원들은 매일 목욕재계하여 정성을 다한다. 당집에서 별신제를 지낸 다음날에는 시장 안에 있는 고목나무 앞에서 거리제를 지낸다. 이 때 상인들은 돈과 곡식을 내놓는다. 별신제의 마지막날에는 은산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신장을 새로 만들어 세우고 진목(陳木:神木)을 꽂아둔다. 별신제는 평년에는 정초에 별신당에서 산신에게만 지내고 본제사는 3년에 1번씩 지낸다. 은산별신제는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군대의식을 더한 장군제적 성격을 띤 것이 특징이다.
장군제; 마을 수호신으로서 장승에게 지내는 동제(洞祭).
장승제라고도 한다. 액운을 막고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지낸다.
음력 정월 14∼15일에 행하는 은산 별신제(중요무형문화재 9)에서는 독산제(獨山祭)까지 끝낸 다음날 시장 길가에 있는 장승터에 장승을 세우고 지낸다.
이 제사가 끝나면 14∼15일간의 별신제가 모두 끝난다.
당산제;마을의 조상신 ·수호신에게 마을사람들의 연중무병과 평온무사를 비는 제사...
동해안별신굿;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동해안 어민들이 풍어와 안...
남해안별신굿;남해안 지역에서 벌이는 마을 풍어제의 하나.
하회별신굿탈놀이;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전승되어 오는 민속가면...
제천 오티별신제;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水山面) 오티리에서 행해지는 별신제.
영해 별신굿놀이;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리(城內里)에서 전해내려오는 별신굿.
제주도에서는 입춘일에 큰굿을 하는데, ‘입춘굿’이라고 한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심방〔首神房:큰무당〕이 맡아서 하며, 많은 사람들이 굿을 구경하였다.
이 때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옥황상제·토신·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철갈이 : 제주도에서 가신(家神)에게 한해 동안 집안의 행운을 비는 무속의례. 일명 ‘벨롱갱이’라고도 한다. 특히, 부(富)의 사신(蛇神)인 칠성을 모시고 있는 집안에서 행한다. ‘철’은 계절, ‘갈이’는 교체의 의미를 지니는 말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행하는 제의라는 뜻이나, 흔히 음력 정월이나 초가을에 택일을 하여 집안에서 행한다.
본토의 안택(安宅) 또는 고사에 해당한다. 제의의 대상은 가신 전체이며, 제상의 차림은 굿의 규모를 크게 하느냐 작게 하느냐에 따라 다소 다르나 보통 문전상·조왕상·안칠성상·밧칠성상 등을 차려놓으며, 심방(무당)은 요령·신칼·산판 등 무구와 장구만 가지고 평복차림 그대로 제의를 집행한다.
제의순서는 심방에 따라 다소 다르나 일반적인 것은 부엌신인 조왕, 문신(門神)인 문전, 집터의 신인 오방토신, 곡물의 수호신인 칠성, 집안 출입로의 신인 주목지신(柱木之神)·정살지신, 낟가리신인 눌굽지신 등의 차례로 비념(작은 규모의 의례)을 한다. 조왕 비념은 부엌의 솥에서 메밥을 짓고 솥뚜껑만 열어 무남제(향나무가지를 잘게 깬 것)를 밥 위에 꽂아놓고, 심방이 솥 앞에 앉아서 요령을 흔들며 가내의 안전을 빈다.
문전 비념은 문전상을 상방(마루방) 앞쪽 문 앞에 내어놓고 심방이 그 앞에 앉아 장구를 치며 〈문전본풀이〉를 노래하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액을 막아 행운이 가득하도록 비는 것이다. 오방토신 비념은 오방토신에게 집터를 오방에서 지켜주어 모든 액을 막아주도록 빌며 물그릇에 여러 가지 제물을 말아 숟가락으로 사방에 조금씩 떠 던지는 것이다.
칠성 비념은 안칠성상을 ‘고팡〔庫房〕’에 차리고 밧칠성상을 상방 뒷문 앞에 차려놓아 〈칠성본풀이〉를 노래하고 고팡의 곡식을 잘 지켜주고 부를 이루어주도록 비는 것이다.
기원이 끝나면 칠성눌을 갈아 덮는다. 칠성눌이란 뒤꼍에 밧칠성신을 모신 곳인데, 기왓장에 오곡을 조금씩 놓고 그 위에 다시 기왓장을 덮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띠를 엮어 덮은 것이다.
이 때 1년 묵은 오곡을 새 것으로 갈아놓고 띠를 갈아 덮는다. 주목지신 비념·정살지신 비념·눌굽지신 비념은 집안 출입로인 ‘올래’와 낟가리 자리인 ‘눌굽’에 가서 물그릇에 말아놓은 제물을 숟가락으로 떠 던지며 각각 소임을 지켜주어 행운이 내리도록 비는 것이다. 이 철갈이는 신년 가신제(新年家神祭)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부의 뱀신인 칠성에의 기원과 칠성눌 갈아 덮기에 중점을 두는 점이 특색이다
화반花盤;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정월보름날 당굿을 하기 전에 마을의 집집을 돌며 굿놀이를 벌여 잡귀를 쫓아주고 재물과 곡식을 거두던 행사. 그 재물과 곡식으로 당굿을 지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및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제주 풍속에 산·숲·내·못·물가·평지·나무·돌 등에 신당을 만들고 위하였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신방(神房:무당)들이 신대를 앞세워 들고 나희(儺戱)를 벌이며 징과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면 사람들은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바치니 이것을 가지고 당굿을 하였는데 이것을 화반이라 하였다.
이 기록에서 말하여주듯이 화반은 오늘날 걸립패(걸궁패)가 집집을 돌듯 신대를 앞세워 심방들이 각 가호를 돌면서 굿을 해주면 집안에서는 재물과 곡식을 바쳤고, 이것을 모아다 마을의 당굿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굿은 당굿을 하기 위한 전제행사로서 행하여진 행진형태의 굿이었다. 한편, 화반이라는 말은 ‘굿돎’ 또는 ‘굿돌이’라는 우리말의 이두표기로서 굿을 하며 마을을 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영등날 중화절
영남 또는 해안지방에서 섬기는 풍신(風神). ‘2월할만네’·‘영등할망’이라고도 한다. 음력 2월 초하룻날 제주도에 들어와 바닷가를 돌면서 해녀 채취물의 씨를 뿌려 풍요를 주고 어업과 농업에까지 도움을 준 다음, 2월 2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방신(來訪神)이다.
이 신이 찾아오는 2월을 제주에서는 ‘영등달’이라 부르는데, 이만큼 영등할망은 2월의 내방신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여러 마을에서는 이 신을 위하여 영등굿을 벌인다. 영등할망은 외눈박이섬에서 찾아온다 하기도 하고 강남천자국에서 들어온다 하기도 하며, 제주도에 와서 바닷가를 돌면서 보말(고동의 일종)을 까먹으며 다닌다 하여 2월달에 보말 속이 비는 것은 이 신이 찾아온 증거라 한다.
또 2월에 날씨가 추우면 옷 좋은 영등할망이 왔다 하고, 비가 오면 우장 쓴 영등할망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영등할망이 나가기 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서는 안 되며 빨래를 해서도 안 된다. 만일 빨래를 하여 풀을 먹이면 집에 구더기가 인다는 전승이 있다.
이 신은 남한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영동신과 동류의 것으로 보인다. 그 명칭은 지역에 따라 영동할만네·영동할맘·영동할마니·영동할마시·영동바람·풍신할만네·영동마고할마니 등 다양한데, 이 신은 2월 1일에 내려오며,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비가 온다고 전승된다.
그리고 거의 풍신(風神)으로 관념되고 있으며 농업·어업에 관련된 신으로 개인의 신앙대상이 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제주도의 영등할망은 주로 어업의 수호신으로 촌락적 신앙대상이 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풍신제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 있는 ‘영동할머니’가 해마다 2월 초하루가 되면 인간 세상을 보기 위하여 딸과 며느리 중 어느 한 사람만을 데리고 지상에 내려와 스무날 만에 올라간다고 한다.
그런데 딸을 데리고 내려올 때는 아무 탈이 없으나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올 때는 그 며느리가 노하여 폭풍을 일으키므로 전답을 휩쓰는 일이 심하다고 하며, 이 피해를 막기 위하여 농가에서는 ‘바람올린다.’고 하여 영동할머니와 그 며느리에게 빈다는 것이다. 풍신은 농사에 관계된 신으로 잘 빌어 노하지 않아야 농사가 잘 된다고 믿는다.
이 풍신설화는 시어머니와 딸과 며느리간의 묘한 삼각적 이해 관계를 농사의 풍년·흉년과 관련시켜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초하루에 바람이 불면 그 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딸을 데리고 오며,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온다는 속신이 있다.
풍신할머니는 심술기가 많아, 비가 오면 풍년이 들기 때문에 먹을 것이 넉넉하며 서둘러 딸을 데리고 오지 않아도 일년 내내 배불리 먹을 수 있으므로 자기 딸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길쌈과 관계된 이야기로, 베를 짤 때 비가 오면 습도 조절이 잘 되어 베짜기가 좋아 딸이 베를 잘 짜라고 두고 오고, 바람이 불면 기후가 건조하여 베올이 떨어져 베를 짤 수가 없으므로 며느리가 베를 짜다 골탕먹으라고 며느리를 두고 온다는 것이다.
강원도 지방의 풍신할머니는 계수나무 숲에서 사는 신으로 셋이 있다. 이 세 신은 2월 10일부터 올라간다고 하는데 2월 10일에 제일 손위 할머니가, 다음 2월 15일에 그 다음 할머니가, 그리고 2월 20일에 마지막 할머니가 올라간다고 한다. 이 세 할머니 외에 함께 대동한 수행원 몫을 하는 수부를 위하여 ‘수구밥’이라는 것을 따로따로 옆에 놓는다.
중화(中和)>란, 중용(中庸)과 같은 말로, 《중용》에 의하면 만물은 중화에서 자라난다고 한다. 여기서 연유하여 중국에서 농사를 시작하는 날을 중화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796년(정조 20)에 처음으로 중국의 풍습을 본떠 임금이 어전(御殿)에서 공경(公卿)과 근신(近臣)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중화척(中和尺)을 나누어 줌으로써 비롯되었다. 중화척은 반죽(斑竹) 또는 이깔나무로 만든 자[尺(척)]인데, 농업에 힘쓰라는 이유로 주었다.
삼짇날
음력 3월 초사흗날로 명절의 하나.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다. ‘삼월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 또는 상제(上除)라고도 쓴다.
또,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 들판에 나가 꽃놀이를 하고 새 풀을 밟으며 봄을 즐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짇날에는 9월 9일에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또 나비나 새도 나온다. 이날 흰나비를 보면 그해에 상복을 입게 된다고 하며,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보면 그해 운수가 좋다는 말이 전하여온다. 이때가 되면 사내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논다.
계집아이들은 물곳 풀을 뜯어서 대나무 쪽에다 풀 끄트머리를 실로 매고 머리를 땋아 가느다란 나무로 쪽을 찌고, 헝겊조각으로 대쪽에다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만들어 입혀 새 각시 모양을 해서, 요·이불·베개·병풍을 차려놓고 ‘각시놀음’을 하고 논다. 삼짇날 전국 각처에서는 한량들이 활터에 모여 편을 짜 활쏘기놀음〔弓術會〕을 연다.
활을 쏠 때는 기생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활 쏘는 한량들 뒤에 나란히 열을 지어 서서 소리를 하여 활 쏘는 이의 기운을 북돋아준다.
그리고 화살 다섯 개가 과녁에 바로 맞으면 이때 기생들은 북을 울리고 “지화자 지화자……”라는 소리를 하면서 한바탕 춤을 춘다. 또, 수탉을 싸움 붙여 ‘닭쌈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봄철 여러 가지 떡을 하여 먹는다. 진달래꽃을 꺾어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가면서, 둥글게 지져 먹으니 이것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가늘게 썰어 오미자(五味子)물에 넣고, 또 꿀을 타고 잣을 넣어 먹으니 이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더러는 진달래꽃을 꺾어다가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만들기도 하며, 붉은 색으로 물을 들이고 꿀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며, 시식(時食)으로 제사에도 사용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어서 떡을 하는데, 이것을 ‘고리떡〔環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날에는 부드러운 쑥 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들어 먹으니 이것을 ‘쑥떡’이라고 한다.
한식
명절의 하나.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든다.
한식은 어느 해나 청명절(淸明節) 바로 다음날이거나 같은 날에 든다. 이때는 양력 4월 5, 6일쯤으로 나무심기에 알맞은 시기이다. 우리 나라에서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나무를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다. 그래서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아 3월 한식에는 꽃이 핀다.’는 말이 전한다.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舊火〕을 일절 금단하던 예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의 옛 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또한, 개자추전설(介子推傳說)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 국란을 당하여 개자추 등 여러 신하를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할 때, 배가 고파서 거의 죽게 된 문공을 개자추가 자기 넓적다리살을 베어 구워먹여 살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또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이날 문에 버드나무를 꽂기도 하고 들에서 잡신제(雜神祭)인 야제(野祭)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기도 한다. 특히,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고 하며, 한식날 비가 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제사)하고, 민간에서는 술·과일·포·식혜·떡·국수·탕·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지낸다. 이를 명절제사, 곧 절사(節祀)라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성묘하고,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식수도 하고 사초(莎草)도 한다.
만일 조상의 묘가 멀 때에는 묘지기가 대리로 제향(제사)를 올려준다. 이날 성묘하는 습속은 당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며,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신라 때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禁刑)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 내병조(內兵曹)에서는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전 안에 있는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주었다. 한식날부터 농가에서는 채소 씨를 뿌리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든다. 흔히,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국가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어 매우 꺼린다.
단오
단오는 일명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한다.
<열양세시기(洌陽勢時記)>에는 이날 밥을 수뢰(水瀨:물의 여울)에 던져 굴원을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으므로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산에서 자라는 수뢰취〔狗舌草〕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한다. 또 쑥으로도 떡을 해서 먹는데 떡의 둥그런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수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술의날', 수릿날(戌衣日·水瀨日)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술의'와 '수리'는 모두 수레를 뜻하는 것으로, 한국의 옛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 수레가 중요한 기구였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수리'는 '신(神)'과 '높다(高)'는 뜻이 있어서, '높은 신이 오시는 날'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월과 일이 모두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되는 날은 생기가 넘치므로 좋은 날이라 생각하여 대개 명절로 정하고 이날을 즐겨 왔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는 글자 이며, '오(午)'는 다섯을 뜻하므로 단오는 '초닷새(음력 5월 5일)'를 칭한다. 아울러 이 시기는 파종이 끝나는 때와 맞물려, 새로 지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한반도에 농경이 정착된 후부터 단오가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삼한(三韓) 시대에 5월에 씨뿌리고 난 뒤 하늘에 제사지내던 풍습이 있었고 이를 수릿날이라 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따르면 '삼한사람들은 5월이 되면 씨를 다 뿌리고 난 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 줄을 지어 뒤를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구부렸다가 치켰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당단을 맞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오를 수릿치날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그네뛰기와 쑥으로 수릿치 절편(角)을 만들고, 조상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토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오라는 명칭과 이념은 중국에서 전해졌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사내용은 토착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삼국 사람들은 이날 씨름과 태껸을 하고 편을 나누어 활쏘기를 하였다. 또한 단오는 보릿고개를 넘기고 살아난 이들의 축제로 보리이삭을 거두는 시기에 맞추어 잔치를 벌였다.
복날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 있는 세 번의 절기. 첫 번째 복날을 초복(初伏)이라 하고, 두 번째 복날을 중복(中伏), 세 번째 복날을 말복(末伏)이라 한다. 초복은 하지(夏至)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立秋)로부터 첫 번째 경일이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린다. 그러나 해에 따라서는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삼복기간은 여름철 중에서도 가장 더운 시기로 몹시 더운 날씨를 가리켜 ‘삼복더위’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복날에는 보신(補身)을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여 먹는다. 특히, 개를 잡아서 개장국을 만들어 먹거나, 중병아리를 잡아서 영계백숙을 만들어 먹는다. 또, 팥죽을 쑤어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여 팥죽을 먹기도 한다. 한
편, 아이들이나 여인(아낙)들은 참외나 수박을 먹으며, 어른들은 산간계곡에 들어가 탁족(濯足 : 발을 씻음)을 하면서 더위를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기도 한다. 복날과 관계 있는 속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고 한다. 이러한 속신 때문에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복 날에 목욕을 하였다면, 중복 날과 말복 날에도 목욕을 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복날마다 목욕을 해야만 몸이 여위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복날에는 벼가 나이를 한 살씩 먹는다고 한다. 벼는 줄기마다 마디가 셋 있는데 복날마다 하나씩 생기며, 이것이 벼의 나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벼는 이렇게 마디가 셋이 되어야만 비로소 이삭이 패게 된다고 한다.
한편 ‘복날에 비가 오면 청산(靑山) 보은(報恩)의 큰애기가 운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충청북도 청산과 보은이 우리 나라에서는 대추가 많이 생산되는 지방인 데서 유래한 속설이다. 대추나무는 복날마다 꽃이 핀다고 하는데, 복날에는 날씨가 맑아야 대추열매가 잘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날 비가 오면 대추열매가 열리기 어렵고, 결국 대추농사는 흉년이 들게 된다. 따라서, 대추농사를 많이 하는 이 지방에서는 혼인비용과 생계에 있어서 차질이 생기기에 이를 풍자해서 만든 말이라고 하겠다.
유두
음력 6월 보름으로, 명절의 하나. 복중(伏中)에 들어 있으며 유둣날이라 한다. 이날은 일가 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 풍속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고려 희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에 “동도(東都 : 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중경지≫ 권2 풍속 조에도 보인다.
≪고려사≫ 명종 15년 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 동류수에 머리를 감아 상서롭지 아니함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동류수에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이 청(靑)이며,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란 일반적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에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신라 때 옛말의 뜻을 취한 이두(吏讀)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소두(梳頭)·수두(水頭)라고도 표기하였는데, 수두란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로서 ‘물맞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부른다.
이날 아침 각 가정에서는 유두면·밀전병·수단(水團)·건단(乾團), 그리고 피·조·벼·콩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새로 나온 과일과 같이 사당에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 하며, 농가에서는 연중 농사가 잘 되게 하여달라고 농신(農神)에게도 고사를 지낸다. 민간에서는 이 무렵에 나오는 오이·참외·떡·국수 등을 장만하여 사당에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을 하였다. 농촌에서는 논이나 밭에서 물이 새지 말고 농사가 잘 되라고 용신제나 유두고사[農神祭(농신제)]를 지냈다. 이 때 사당에 올리는 벼·콩·조를 각각 유두벼·유두콩·유두조라 한다. ≪동국세시기≫ 6월 월내조(月內條)에는 피·기장·벼를 종묘에 천신 하였으며, ≪예기 禮記≫ 월령(月令)에는 중하(仲夏)의 달에 농촌에서 기장을 진상하면 천자가 맛을 보고 먼저 종묘에 올리는데, 이는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참외 등을 따고, 국수와 떡을 만들어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고 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강한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다. 이 날 사당에 유두 천신하고 나서 한집안 식구가 단란하게 유두면·수단·건단·상화병(霜花餠)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등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논의 물꼬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면서 고사를 지낸다.
그 다음에는 자기 소유의 논·밭 하나 하나마다에 음식물을 묻음으로써 제를 마치게 된다. 이렇듯 유두는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갈 무렵에 몸을 깨끗이 하고 조상과 농신에게 정갈한 음식물로 제를 지내며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풍속 중의 하나이다.
칠석
음력 7월 7일로 세시명절의 하나.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의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왕 시대의 고분 안쪽 벽화에 견우와 직녀가 그려졌다. 동쪽에 직녀성이 수줍은듯 희미하게 비치고 서쪽에서는 견우성(牽牛星)이 휘황하게 빛을 발하는데 이는 마치 서로 마주보며 정겨워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두 별을 보게 되는데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 하늘의 목동 견우(牽牛)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織女)가 지나치게 사랑에 빠져 게으름만 피우는 데 노한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그들을 은하수 동·서쪽 끝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애태우는 두 남녀를 보다 못한 까치와 까마귀들이 매년 칠석날 밤이면 상제 몰래 하늘로 날아가 날개를 펼쳐 오작교(烏鵲橋)를 놓아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이날 저녁에 내리는 비를 견우와 직녀가 해후하는 눈물, 이튿날 오는 비를 이별의 눈물이라고 한다.
주(周)나라 왕자 교(喬)가 봉황곡(鳳凰曲)을 울리며 신선이 되어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의 부인과 만났다는 날이 바로 칠석이다. 서왕모(西王母)가 자운거(紫雲車)를 타고 전상(殿上)에 내려와, 장수(長壽)를 원하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요지 선도(瑤池仙桃)를 올린 날 역시 칠석이다. 또 이 날 양귀비(楊貴妃)의 혼이 재생하여 장생전(長生殿)에서 오매(寤寐:깨어있는 때나 자는 때)에 그리워하던 당명황(唐明皇)을 만나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比翼鳥: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가 되고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連理枝: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일컫는 말)가 되자”고 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이 전설은 중국 한(漢)나라에서 고려에 전해져 공민왕(恭愍王)은 왕후와 함께 대궐 내정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를 드렸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이날 잔치를 벌이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베풀었다. 민간에서는 이날 절식(節食)으로 밀국수·호박부침 등을 먹었으며, 부녀자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걸교(乞巧) 풍습과 함께 마을 서낭당에 가서 자녀의 무병과 장수를 빌기도 한다. 또 의복과 책을 볕에 쬐어 말리고, 글공부하는 서당소년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풍속도 있다.
칠석(한자: 七夕)은 동아시아 전해 내리어오는 전설인 견우와 직녀 전설 속에서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날짜는 음력 7월 7일이고, 일본은 양력 7월 7일이며, 칠성날로도 불린다. 이날 민간에서는 명절 음식으로 밀국수·밀전병·호박부침·백설기 등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처녀들은 견우와 직녀 두 별을 보고 절하며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기원하고, 많은 사람이 이날 밤 견우와 직녀를 소재로 삼아 시를 짓기도 한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壽命神)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가정에 따라서는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한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처녀들이 바느질을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乞巧)라고 한다. 칠석날 밤이면 궁중이나 민가에서 부인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는 이른바 걸교제(乞巧祭)를 지내는 일이 한(漢)나라 시대에 이미 행해졌다. 이 풍속이 당(唐)나라 시대에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의 걸교나 일본의 ‘다나바다마쯔리〔붕기제=棚機祭〕’는 그 예들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이 날 왕후와 더불어 궁중에서 견우와 직녀성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관들에게 녹(祿:녹봉)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연희를 베풀고 선비들에게 명절 과거를 보게 하는 등 중요 명절로 여겼다고 한다. 직물이나 바느질은 실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직녀라는 별 이름 자체가 직물(織物)이나 바느질과 관련된다는 관념에서 걸교가 더 중요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근래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점치는 풍속이 행해졌다. 처녀들이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솜씨를 좋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그 이튿날 나가 봐서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칠석날에는 칠석차례라 하여 햇벼가 익으면 사당에 천신하고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우물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백중
명절의 하나. 음력 7월 15일로 백종(百種)·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종은, 이 무렵에 과실과 소채(蔬菜)가 많이 나와 옛날에는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중원은 도가(道家)의 말이다.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일년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 한다.
1월 15일을 상원(上元), 10월 15일을 하원(下元)이라고 하며 7월 15일의 중원과 함께 삼원(三元)이라 하여 초제(醮祭)를 지내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망혼일이라 하는 까닭은 이날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놓고 천신(薦新)을 한 데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불제자 목련(目蓮)이 그 어머니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7월 15일에 오미백과(五味百果)를 공양했다는 고사에 따라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어 공양을 하는 풍속이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나 고려 때에는 일반인까지 참여했으나 조선시대 이후로 사찰에서만 행해지고 민간에서는 소멸되었다.
백중이 되면 여러 행사가 있어왔다. 우선 각 가정에서 익은 과일을 따서 조상의 사당에 천신을 한 다음에 먹는 천신 차례를 지냈으며, 옛날에는 종묘(宗廟)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하는 일도 있었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준다.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산다. 그래서 ‘백중장’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백중장은 장꾼들이 많고 구매가 많은 장이다. 취흥에 젖은 농군들은 농악을 치면서 하루를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씨름판이 벌어지며 장터에는 흥행단이 들어와서 활기를 띠기도 한다. 이러한 백중 명절은 중부 이남지방이 성대하다. 또한 이날은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위로하며 논다. 이것은 바쁜 농사를 끝내고 하는 농군의 잔치로서 이것을 ‘호미씻이’라 한다.
제주도에서는 일손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가 일을 더 많이 한다.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하며 밤에는 횃불을 들고 늦도록 해산물을 따기도 한다. 한라산에는 ‘백중와살’이라는 산신이 있어 백중을 고비로 익은 오곡과 산과(山果)를 사람들이 따 가면 허전하여 샘을 내고 바람을 일으킨다고 해서 산신제를 지내는 일도 있다.
신라 때에는 백중을 기해서 삼 삼기가 시작되었다. 도성 안의 부녀자를 두 파로 나누고 공주로 하여금 각 파를 이끌어 한 달 동안 삼을 삼아 8월 가윗날에 그 성적을 심사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 한턱 내도록 하는 것이다.
백중 무렵이 되면 삼이 자라서 그 껍질을 베끼기에 알맞게 익은 때이므로 직조작업을 권장하는 뜻에서 왕녀를 주축으로 하여 집단작업인 두레삼 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중양절
명절의 하나로 음력 9월 9일.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중양은 양이 겹쳤다는 뜻이니 양수인 홀수가 겹친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도 다 중양이 될 수 있겠으나, 중양이라고 하면 중구를 가리킨다. 중구는 음양 철학적인 중일명절(重日名節)의 한 대표적인 명절이었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상국(賞菊)·등고(登高)·시주(詩酒)로 즐겨 온 날이었다. 당송 대(唐宋代)에도 관리들의 휴가일로서 추석보다도 훨씬 성대한 명절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시대부터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 중구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시가를 즐긴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해져 있는 규례이다. 내외신하들과 송나라·탐라(耽羅)·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그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다시 세종 때에 중삼·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성종 때에는 추석에 지내던 기로연(耆老宴 : 노인 잔치)도 중구로 바꾸어서 지내었다.
또한, 성균관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던 절일제(節日製)도 인일(人日 : 1월 7일)·중삼·칠석·중구에 보였다. 여기에서 특히 추석에 지내던 기로연을 중구로 바꾸었다는 사례는 상징적이다. 그만큼 관(官)과 상층에서는 음양 철학적인 경향을 많이 띠었고, 그것은 보름명절〔望日名節〕보다 중일명절을 크게 쳤다는 것에서 선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일반농어민사회에서는 어디까지나 추석·백중(百中 : 7월 15일)·대보름(1월 15일) 등 보름명절이 훨씬 성대하였다. 더구나 중구 때는 벼수확과, 목화따기 및 콩·팥·조·수수·깨·고구마·감자에 무·배추 등 김장채소 거두기까지도 겹치는 농번기였으므로 명절로 즐길 겨를이 없는 때였다.
1년 중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에는 복이 들어온다고 하여 1월 1일, 5월 단오(5일), 7월 칠석(7일) 등을 명절로 지내왔다. 중양절이 되면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읊거나 산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또한 가정마다 화채를 만들어 먹고 국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였다. 이날 제비들은 따뜻한 강남을 향해 떠나고 뱀과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간다.
옛날 중국의 어느 마을에 신통력을 지닌 장방이란 사람이 살았다. 어느날 장방이 환경이란 사람을 찾아와 "9월 9일 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니 식구들 모두 주머니에 수유꽃을 넣었다가 팔에 걸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환경이 장방의 말대로 식구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놀다가 이튿날 집에 내려와 보니 집안의 모든 가축들이 죽어 있었다. 그후부터 중양절이 되면 산에 올라가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중양절은 제비가 강남(江南)으로 간다고 전하며, 이 때쯤 되면 제비를 볼 수 없다. 이 날은 유자(柚子)를 잘게 썰어 석류알, 잣과 함께 꿀물에 타서 마시는데 이것을 ‘화채(花菜)’라 하며 시식(時食)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또 이 날 서울의 선비들은 교외로 나가서 풍국(楓菊) 놀이를 하는데, 시인 ·묵객들은 주식을 마련하여 황국(黃菊)을 술잔에 띄워 마시며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즐겼다. 각 가정에서는 ‘국화전(菊花煎)’을 부쳐 먹는데 3월 3일에 진달래로 화전을 만드는 것과 같다.
설날과 추석은 말할 것도 없지요.
참고로....
동지와 설과 대보름
동지를 작은 설〔亞歲〕이라고 하며, 정월초하루(설)에 시작되는 새해의 의미는 정월대보름〔上元〕까지 지속된다. 여기서 동지·설·상원의 시기와 의미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역법(曆法)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 부여족이 이미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경우, 태양력에 관한 기록이 ≪서경≫에서 보이지만, 4,000여 년 전부터 태양력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 나라도 중국의 태양력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24절기의 역법으로도 알 수 있다. 24절기는 태양년(太陽年)을 태양의 황경(黃經 : 춘분점으로부터 황도에 따라서 잰 각거리)에 따라 스물 넷으로 갈라서 계절을 구분한 것이다.
24절기의 명칭은 남중국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24절기 명칭의 뜻이 우리 나라의 기후조건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태양력의 24절기는 5년에 2회의 윤달을 만든 태음력보다 기온변화와 농사의 시절 변화의 기준으로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태양태음력을 사용해온 것이다.
동지·설·상원의 관계는 태양력과 태음력의 병용을 근거로 해명될 수 있다. 태양력의 하나인 24절기 가운데서 대표적인 명절로 남아 있는 것은 입춘과 동지이다. 동지는 태양력에 기준한 명절이고, 설과 상원은 태음력에 기준한 명절이다. 동지는 작은 설로 생각되고 있어서 동지를 지내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인식되어왔다.
≪후한서≫ 율력지(律曆志)를 보면 “세수지야(歲首至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세수, 즉 연초를 동지로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동지나 하지는 해 그림자가 가장 짧은 때와 긴 때로서, 특히 동지는 역법의 계산기준이 되는 시기이므로 동짓날의 측정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후한시대(85∼220)에는 동지를 세수로 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 12개월의 명칭에 12지(支)의 이름을 붙여서 동지가 드는 음력 11월을 자월(子月), 12월을 축월(丑月), 1월을 인월(寅月)…… 등의 순으로 부르게 된 것도 동지를 세수로 쳤던 시대의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동지는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태양의 힘이 가장 약화된 날로 인식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낮이 점차로 길어지면서 태양의 힘이 차츰 왕성하여지므로, 동지가 1년의 출발기준이 되었다. 즉, 동지에 태양이 죽었다가 그 다음날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동지를 한 해의 출발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태양의 변화를 통하여 1년 주기를 인식하였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말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해’라는 말에는 태양·년·낮 시간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태양을 해라고 하고 1년을 한 해라 하며, ‘해가 길다.’·‘해가 짧다.’고 할 때의 해는 ‘낮의 시간’을 뜻한다. 이리하여 ‘태양=년’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태양을 통해 1년이라는 시간 주기를 인식하였다는 의미가 이해된다.
동지는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설이 될 수 있었는데, 후대에 작은 설로 격하된 이유는 적어도 태양력과 태음력의 선후관계, 즉 태양력문화와 태음력문화의 복합현상으로 추정된다.
동지가 원래 설이었다가 차츰 태음력의 설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작은 설로 되었는지, 태음력의 설에 태양력의 설인 동지가 끼어 들면서 작은 설로 인식되었는지는 더욱 깊은 고찰을 요한다.
그러나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한 데는 태음력 기준의 설에 버금하는 종속적이고 하위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우리민족의 역법은 태음력이 근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24절기에 의한 태양력의 가치도 인정되는 것으로 보아, 태양력이 태음력에 종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설날(음력 1월 1일)은 태양태음력에 의한 새해의 출발이다. 오늘날의 음력 정월은 동지에서 두 달 지난 입춘이 드는 달로 되어 있다. 태음력은 달〔月〕의 주기를 기준으로 한 달력이므로 태양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과는 그 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력에서는 매달 삭망을 양극으로 하는 날짜와 차고 기우는 달의 모양이 정확히 일치한다.
매달 초사흘이면 초승달이 떠오르고, 보름날이면 보름달이 솟아오르며, 초하루에는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을 근거로 생겨난 새해의 시작이 설이다.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달의 모양과 동식물 및 인간생활의 변화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믿어왔다. 그러므로 달이 없어지면 물리적인 삶이나 한 집단 또는 사회내의 생활이 중지되는 전이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월초하루는 달이 극도로 이지러진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묵은해와 작별을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전환점이므로 통과의례의 전이기에 해당한다. 기존의 질서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질서에 통합되기 전까지 전이기를 거치게 되는데, 새로운 질서와 상황에 순조롭게 통합되려면 이 전이기를 삼가고 조심하는 가운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설이 신일(愼日 :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대보름 역시 태음력에 기준한 날짜이다. 보름은 설과 반대로 달이 완전히 차 오른 상태이다. 잠복과 죽음의 시기인 그믐이나 초승의 전이기를 끝내고 활동과 활력의 시기인 보름의 통합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설과 대보름이 완전히 별개의 성격을 지닌 명절은 아니다. 설과 대보름을 달의 기울고 차는 상태로 본다면 대칭적이지만, 명절로서의 설과 대보름은 그 사이에 전개되는 각종 세시풍속과 새해의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로 연결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은 동지를 작은 설로 지내왔으며, 설을 쇠면서 설과 상십이지일로 연결되는 대보름도 설 명절의 일환으로 생각하였다. 태음력과 태양력의 병용과 태양력이 태음력의 종속적인 역법으로 사용되었음을 이해할 때 “동지에 죽었던 해(태양)는 설에 소생한다.”고 인식할 수 있다.
아울러 엄밀한 의미에서 설은 작은 설이던 동지에서부터 정초를 거쳐 설의 대단원인 대보름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정월초하루는 설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지에서 대보름까지를 설로 잡을 때 통과의례의 순차적 단계에서 보면 동지는 묵은해에서 분리되는 단계이고, 새해로 옮겨가는 설날은 전이단계이며, 대보름은 새해에 통합되는 단계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석
한국의 대표적 명절 가운데 하나.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가위·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도 중추절이나 월석·추중(秋中)이라 하여 명절로 삼는다.
정확한 유래는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유리왕(儒理王) 9년 나라 안 6부(六部)의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가르고 두 왕녀(王女)를 각각 우두머리로 삼아 음력 7월 기망(旣望;16일)부터 한 달 동안 베를 짜게 하고, 마지막 8월 15일에 승부의 판정이 나면, 진 편에서 이긴 편에 음식을 대접하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밤새도록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가배>가 오늘날 <한가위>의 <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뜻은 가운데(中) 또는 반(半)의 어근인 <갑>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어서 가을의 반 즉 중추(仲秋)의 한국식 표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음력 8월 15일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은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고려시대에 나온 노래인 《동동》에도 이 날을 가배라 적었음을 보아 이 명칭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윗날이 신라 이래 국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에서 나온 《수서(隋書)》 동이전 신라 조에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에도 신라국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 대회를 하였다고 쓰여 있다.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산둥[山東(산동)]지방에 사는 신라인들이 신라가 발해와 싸워 이긴 8월 15일을 명절로 삼아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고 가무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가 6부였음은 1988년 4월 15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竹邊面) 봉평리(鳳坪里)에서 출토된 신라비석에 쓰여 있어 확인되었다. 이 비석은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것으로 6부 중의 하나인 탁부 출신의 박사가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가배풍속과 관련된 6부의 존재가 분명해졌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추석행사를 가락국에서 나왔다고도 했는데, 이처럼 가윗날은 한국의 고유한 명절로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이는 정월 대보름날의 예축적 의례와 서로 의미가 통하여 수확 경축적 의례라 하겠다. 따라서 지역별로 다양하고 풍성하며 다채로운 민속들이 나타난다.
한국의 전통 4명절인 설날 •한식 •중추 •동지에는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추석 차례 또한 조상을 기리는 추원보본(追遠報本) 행사이다. 호남지방에는 ‘올벼심리’라 하여 그 해 난 올벼를 조상에게 천신(薦新)하는 제를 지내며 영남 지방에서도 ‘풋바심’이라 하여 채 익지 않은 곡식을 천신할 목적으로 벤다. 일부 가정에서는 새로 거둔 햅쌀을 성주단지에 새로 채워 넣으며 풍작을 감사하는 제를 지낸다. 가윗날에는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즐기는데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것을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고 한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라고 할 정도로 추석을 전후하여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유교에서의 추석
유교의 핵심은 인간행위의 기본이자 모든 덕의 으뜸으로 삼고 있는 ‘효’ 사상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의 근본정신은 가장 귀한 생명을 조건 없이 주고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준 부모와 선조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효는 부모 생시뿐 아니라 사후에도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통해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계실 때 섬기듯이 함(중용 19장)”이라는 정신으로 이어진다. 유교에서는 이렇듯 조상에게 지극정성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신령(神靈)이 흠향(歆饗; 기쁘게 받음)하게 되며 강복(降福; 하늘에서 복을 내리는 일)도 따르게 된다”고 믿는다. 유교 조상제사에는 사당제(祠堂祭), 이제(爾祭), 기제(忌祭) 등이 있는데 형식상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4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 부분은 마음을 집중시키고 신령의 임재(臨齋)를 준비하는 단계로 제사 전 마음을 모으는 제계(祭戒), 음식을 차려놓는 진설(陳設), 신령이 임재하게 하는 강신(降神) 등이 있다.
둘째 부분에선 효성의 상징적 표현인 제물을 드리면서 흠향을 간청한다. 여기에는 생시와 같이 정성스럽게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과 술을 바치는 헌작(獻爵) 등이 있다.
셋째 부분은 신령이 제사를 흠향하고 강복하는 의식이다. 신령이 흠향하도록 문을 닫는 합문(闔門)과 다시 들어가서 차나 숭늉을 드리는 헌다(獻茶)와 제물의 일부를 제주(祭主)에게 먹도록 하는 수작(受昨), 신령의 흠향이 끝났음을 알리는 이성(利成) 등이 있다.
마지막 넷째 부분은 신령에 드리는 의식을 끝내는 마무리 의식으로 작별인사를 올리는 사신(辭神)과 서로 축복하면서 제물을 나누어먹는 음복(飮福) 등이 있다.
유교의 모든 제사의식은 자손들이 죽은 이를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며, 신령이 감사의 제사를 흠향하게 되면 하늘에서 자손들에게 복을 내려준다. 아울러 신령한 복을 받은 후손의 자세는 “그 복을 독점하지 않고 친척‧이웃과 나누며 더 나아가 삶 자체를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신령에 화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의 추석
추석 차례는 유교 뿐 아니라 불교 의식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백장청규(百丈淸規)》라는 책에는 차례의 뜻을 ‘한 솥에 끓인 차(茶)를 부처님께 바치고 또 공양드리는 사람이 더불어 마심으로써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되고 또 절 안의 스님과 신자가 같은 솥에 끓인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이질 요소를 동질화시키는 일심동체 원융회통의 의례가 차례’라고 설명해 두고 있다. 불교식 명절 제사법의 전문가인 태고종 열린선원의 승려 법현은 “차례(茶禮)는 하늘과 조상에 차(茶)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豫)”라고 강조한다. 법현은 “신라 경덕왕 시절 충담스님이 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을 비롯해 조상님 사당에 며느리가 차를 올리도록 한 고묘(告廟) 등 역사적 근거가 분명히 존재한다.”라면서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중된 한재 이목 선생 집안에서도 차를 올렸다는 기록과 그 후손들은 현재 숭늉 대신 차를 올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식 가정제사 기본 지침에 따르면 차례 상차림은 간소함을 원칙으로 하고 고기·생선류는 제외한다. 육법공양물에 해당하는 향·초·꽃·차·과실·밥을 올리고 국·3색나물·3색 과실을 갖춘다. 불교 제사는 꽃을 갖춤으로써 육법공양물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소개하는 가정제사 절차를 살펴보면 영가 모시기-부처님과 영가(靈駕, 조상 영혼) 모심, 제수 권하기, 불전 전하기(경전 또는 게송 독송), 축원(문) 올리기, 영가에게 편지 올리기(생략 무방), 영가 보내기, 제수 나누기로 제사를 마치고 나면 가족이 둘러앉아 음복(飮福)하며 조상을 기리고 서로 덕담을 나눈다. 불교식 축원문에는 조상의 살아생전의 삶을 간략히 되새기고 자손들의 화합과 모든 중생의 성불, 하루속히 부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등이 담긴다.
천주교에서의 추석
과거에 천주교는 죽은 이 앞에서 절을 하고 그들을 섬기는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여겨서 제사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다. 이러한 조상 제사문제는 과거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가 되기도 했고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선조들을 공경하는 민족적 풍습인 제사가 과연 교리에 어긋나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나자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제사 의식은 그 나라 민속일 뿐,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라는 훈령을 내려 제사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이 때부터 천주교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존경을 표현하는 민속적 예식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다만 제사 절차상 조상에 대한 효심이 지나쳐 미신적인 요소로 변질된 부분이라든지, 하느님만을 섬기는 천주교의 교리에 걸맞지 않게 생각되는 행위는 금지된다. 천주교의 명절 미사는 가톨릭 전례와 한국인의 전통 제례가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설이나 한가위 등의 명절에는 본당 공동체가 미사 전이나 후에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조상에게 대한 효성과 추모의 공동 의식을 거행함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친다.
천주교는 명절이나 탈상, 기일 등 특별한 날에는 가정의 제례보다는 위령미사를 우선해 봉헌하도록 하고 있다.
2003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상장 예식》에 따르면 차례상에는 촛불 두 개와 꽃을 꽂아 놓으며 향을 피워도 된다. 벽에는 십자고상을 걸고 그 밑에 조상의 사진을 모신다. 사진이 없으면 이름을 정성스럽게 써 붙인다. 다만 위패에 신위(神位)라는 글자를 적어서는 안된다. 이어 성호를 긋고 성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선택해 봉독하기, 가장의 말씀, 부모·자녀·가정·부부를 위한 기도 등을 거쳐 차례 음식을 음복하고 성호를 긋는 것으로 차례를 마친다. 또한, 한국 천주교는 설과 한가위를 이동 축일로 제정, 고유 독서와 고유 감사송을 곁들인 명절미사로 거행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축문(祝文), 영혼이 제물을 받도록 병풍을 가리고 문밖에 나가는 합문(闔門), 상집에서 죽은 이의 혼을 부를 때 저승에서 온 사자를 먹인다는 사자(使者)밥을 차리는 것 등은 천주교에서 미신으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사항이다.
출처 : http://link.lalca.com/share/calender/ 의 만세력과 위키백과 두산백과 파란백과 네이트 풍속백과